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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0일> 예수, 하나님의 도道(막2:1-12) 이정식 2013-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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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가 어느 나라에서도 대접받지 못한 처지에 있을 때 제자 안회에게 물었습니다. "회야, 시에 이르기를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에서 헤매고 있다'고 했는데, 나의 도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말이냐? 우리가 왜 여기서 곤란을 당해야 한단 말이냐?" 안회가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의 도가 지극히 크기 때문에 천하의 어느 나라에서도 선생님의 도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렇더라도 선생님은 선생님의 도를 발전시키고 계십니다. 그러니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받아들이지 않는 연후에 군자는 더욱 군자의 참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무릇 도를 닦지 않는 것은 우리의 치욕입니다." 세상에 많은 현자들이 도를 닦아 그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말씀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성경에는 무슨 말씀을 가르치셨는지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치기를 좋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다시 오셔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을 정도로 모였을 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막2:2b)셨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 처음으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이 나옵니다. 많은 중풍병 환자들은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렇게 불구의 몸으로 살게 되었을꼬' 하며 탄식하고 있을텐데, 이 환자와 그 친구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어떤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분이라면 이 결박된 상태를 벗어나게 해 줄지도 몰라! 그분을 만날 수만 있다면!' 예수님께서 다른 마을들을 둘러보시고 다시 가버나움으로 오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학수고대하던 이 사람은 친구들을 불러서 외출준비를 했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계시다고 하는 집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사람들은 왜 그렇게 많은지 예수님 앞에 가려고 기다리다가 날 샐 것같았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과 그 친구들을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만나야 하겠다는 일념밖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주저없이 생각하기를  '흐르는 물은 장애물을 만나면 돌아서라도 간다.'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막2:4)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했지요? 조금 바꾸어야겠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을 낸다.' 지붕은 들어가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빛, 비, 눈, 바람 등이 못 들어오도록 막는 역할을 합니다.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 선 지붕에 들어갈 길을 내려고 구멍을 뚫었습니다. 무엇이 이렇게까지 하게 했을까요? 2013년 10월 19일 어제 조종사가 기기 이상을 일으킨 전투기를 민가에 떨어뜨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끝까지 조종간을 잡고 있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목숨이 위태로운데도 전투기에 실려있던 연료를 다 소비할 때까지 1시간 이상을 공중에서 비행했습니다. 이륙하자마자 제대로 비행기가 통제되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중풍병에 갇혀 평생 '나는 복도 지지리도 없지' 하면서 살아간다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복이 없을지는 몰라도 복을 주시는 분을 만나면 내가 복되겠다. 내가 복을 얻겠다.' 

  예수님도, 예수님 앞에서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도 '무슨 일이 있는가' 하고 천장을 쳐다보았습니다. 흙먼지가 떨어지고 작은 구멍이 나더니 이내 침상 하나 내려올 만한 크기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 천장 구멍으로 한 환자가 매달려 있는 침상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단번에 보통 환자가 아니며 보통 문제가 아닌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예수님 발 앞에 중풍병자가 누운 침상이 내려왔습니다. 예수님도 그를 보았고, 둘러선 모든 사람들도 그를 보았습니다. 모든 사람의 이목이 이 사람에게 집중되었을 때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막2:5a) 사람들은 놀라운 광경을 보고 중풍병자를 보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다른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단지 나아야 되겠다는 욕심만으로 달려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 도요 하나님의 권세임을 알고 왔습니다. 낙심된 채로 한 번뿐인 인생을 마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전에는 자기도 그렇게 살았지만, 예수님이 하신 일을 듣고 믿음을 가졌습니다. '주님이시거든 지금 나를 만나주십시오!' '주시거든 나를 새롭게 해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평생 죄짓고 살던 강도가 십자가 위에서 '어차피 죽을 목숨'하며 포기할 수도 있지만,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겸손히 주님을 인정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2-43)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어느 날에'라고 한 강도에게 바로 '오늘'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믿음을 보시고 하신 말씀이 희안합니다. "중풍병자에게 이르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막2:5b). 귀신들린 자에게나, 열병이 있는 시몬의 장모에게나, 나병환자에게는 그 문제를 직접 해결해 주셨습니다. 전에 하시던 대로라면 "중풍병자야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으라"라는 말씀부터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하셨습니다. 몸의 질병은 몸뿐만 아니라 마음과 영도 병들게 만듭니다. 고칠 수 없는 병이라면 저주받은 병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졌길래' 하는 말은 매사에 복을 얻지 못한다고 일이 안 되는 쪽으로만 흘러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표현입니다. 없는 형편에 고생고생하면서 돈을 조금 모아서 작은 가게를 하나 내었는데, 그 가게를 낼 때 동업한 친구가 그를 배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마음이 병들기 시작하고 소망도 사랑도 친구도 믿음도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죄의 권세에 사로잡혀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몸과 마음과 영혼을 깨우쳐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그 사람들 사이에 하나님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중풍병까지 고칠 수 있을까 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는 마음 속으로 생각할 때 기가 막혔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막2:7) 병은 어떻게 기적적으로 고쳐질 수 있을지 몰라도 죄를 사하는 권세는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맞습니다. 서기관들이 맞습니다. 사람이 어찌? 그런데 예수님께서 깨우쳐주기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인 나 예수가 곧 하나님의 도다. 사람으로 온 나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너희의 주 그리스도가 되기 위해서 연약한 사람으로 왔다. 지금까지는 너희의 슬픔과 괴로움이 너희 마음과 영혼을 결박했지만, 나 예수는 그 결박을 깨끗이 풀어주기 위해서 왔다. 너희의 행복을 위하여. 지금까지는 각종 병에 시달리며 복없는 사람이라고 낙담하며 살았지만, 나 예수는 복이다. 복을 주러 왔다. 지금까지의 율법은 죄 아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무엇을 지켜야 하나님께 받아들여졌지만, 나 예수는 하나님의 길이므로 나를 영접하면 곧 하나님 안에 사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사람들에게 속고 인생에 치어서 소망도 사랑도 믿음도 깨어진 채로 살았지만, 나 예수가 곧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다.

  서기관들의 속 생각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막2:8b-9). 여러분 어느 것이 쉽겠습니까? 중풍병자가 일어나는 것은 지금 눈 앞에 보여져야 하고,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니까 중풍병자를 일으키는 것이 더 어렵겠습니까.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은 말로만 하는 거니까 훨씬 쉽겠습니까. 아닙니다. 서기관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죄의 한 열매일 뿐인 중풍병자가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기적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나 죄가 깨끗이 용서함을 받는 것은 죽어서 하나님 앞에 가봐야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는 죄를 용서받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죄를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 속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막2:10a) 잘 듣고 깨달으십시오. '사람의 아들' 예수께서 '땅에서'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 평생 죄짐을 지고 병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고 세상에 치이고 실패에 치여 살다가 죽어서 불쌍히 여기시면 죄 용서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벌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아. 이 땅에 사는 지금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 예수께서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왔다. 영접하라. 기뻐하라. 내가 하나님의 도다. 내가 하나님의 길이다. 죄를 사하는 권세를 영접하라.

  그러면서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막2:11) 명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막2:12a). '가라' 명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가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영접하면 곧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는 말입니다. 말이 아니라 말씀입니다. 죽어봐야 아는 게 아닙니다. 죽기 전에 살아 있는 지금 하나님의 복을 받아 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권세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인데 곧 이루시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서기관들이 또 한 번 놀랐습니다. 중풍병자가 일어나는 일이 희귀한 일일 뿐더러,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는' 일은 더욱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일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막2:12b). 그러나 여러분, 이렇게 놀라고만 있을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이 진실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작은 자여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는 말씀이었고, 그런 축복을 받는 이유가 '믿음을 보시고'였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15장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약속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5) 그때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라고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니 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으니 라고 했습니다. '그 믿음을 보고'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여기셨습니다.

  그후에 하나님께서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으로 알았고, 그것이 무엇이든지 순종하여 지켰습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b) 하시고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22:16-17,18) 아브라함은 믿음을 빼앗기기 않았습니다. 25년만에 낳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불합리한 요구에도 믿음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어떤 것을 말씀하시든지 그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한 연예인이 작업실에서 한 여대생을 만났는데 호감이 생겼습니다. 둘이 사귀기 시작했는데 알 수 없는 어떤 벽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교회를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의 고백입니다. "그녀를 만날 수만 있다면 종교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교회를 함께 다녔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교회에서 빼내 올 작정이었는데, 일단 교회에 잘 다니고 볼 일이었습니다. 교회에 참석할수록 이질감이 들었습니다. 우선 용어가 낯설었습니다. 마귀 사탄 귀신 예언 종말 피 보혈 등이 대화 속에 수시로 등장했습니다. 무섭기까지 했습니다. '이 사람들 정말 미친 것 아냐?' 교회 청년들이 노는 것을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어서 정말 가관이었습니다. 중고생들이나 하는 '공공칠빵''삼육구' 같은 게임을 하면서 너무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선물로 받은 성경책은 더 압권이었습니다. 무협지도 아니고 신화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다가 소그룹 공부시간에 '왜 비기독교인과 사귀면 안 되느냐'고 따졌습니다. 그룹 리더가 목사님께로 안내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그냥 이런 저런 질문을 툭툭 던졌습니다. 남자들끼리 할 수 있는 약간 원색적인 질문이었습니다. 그때 나의 퇴폐적인 생활, 내 치부를 들추는 것같은 질문이,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삶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멈출 수 없는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은 한참을 기다린 후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을 읽어줬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제 거듭났기 때문에 조금 전에 부끄러워했던 죄들은 모두 용서받았다. 이제 깨끗한 피조물로 새로워졌다." 그 말이 기뻐서 또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때 이후 나는 촌스러워졌고 유치해졌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눈물을 흘렸습니다. 너무 부족하고 부족한 나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일기예보'의 나들이라는 가수의 구원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죄 때문에 울고,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곧 죄를 깨끗케 하신 것 때문에 웁니다. 한 번은 슬프고 괴로워서 울지만 이후로는 기쁘고 감사해서 웁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할 수 없는 일, 곧 이 땅에서 우리 죄를 깨끗이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죄의 얽매임과 인생사의 여러 근심으로부터 해방되는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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