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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8일> 예수의 흔적을 가진 사람(갈6:11-18) 이정식 2013-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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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상 선수 볼트가 다시 100m 200m에서 우승을 했습니다. 경쟁자들이 없지는 않지만 사람들은 볼트를 환호합니다. 그의 여유있는 미소와 폭발적인 스피드, 그리고 번개 세리모니 등이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더욱 진기한 일이 생겼습니다. 볼트가 100m를 우승하고 들어오는 순간에 하늘에서 번개가 치는 장면이 찍힌 것입니다. 그의 별명 중에 하나가 '번개'인데, 그가 우승할 때 하늘에서 번개를 쳤다. 그러니 '하늘도 그를 축하한다'는 그런 환상적인 장면이 연출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늘과 연결되는 것을 좋아합니다. 1421년에 세계 최초로 대항해에 성공한 명나라 정화 선단이 200여 척을 이끌고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바다에서 광풍이 일고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내리쳤습니다. 선원들은 바다의 신이라 여기던 '마조'에게 제발 목숨만 살려달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때 '신의 불'이라 불리는 정전기 불꽃 현상이 정화의 기함 꼭대기에 비쳤습니다. 그리고 쓰기를 "신비로운 불꽃이 일자마자, 폭풍의 위협이 누그러졌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일로 생사를 모르는 대항해 속에 정화의 선단을 하늘이 보호한다는 믿음이 생겼고, 그는 마침내 대항해를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를 기분좋게 하는 일이지만, 그러나 이런 것을 따라가면 우리가 잘못됩니다.

  사도 바울은 강조하고 또 강조하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갈6:11).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여러 가지 말로 권면했지만, 그 모든 것을 다시 정리하면 이렇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외모는 십자가를 가리운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갈6:12). 눈에 보이는 뭔가를 바라는 것은 우리 몸이 집요하게 붙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육체의 자랑을 낳습니다.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갈6:13). 살아가면서 자랑할 거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기분좋은 일입니까? 자랑할 때 우리 속에 에너지가 쏫아납니다. 그 자랑을 듣고 있는 사람에게는 고역일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살면서 자랑할 거리가 없다면 그 얼마나 심심한 삶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외모를 좇는 것은 십자가의 박해를 피할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는 자랑거리가 아니라 수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가장 죄질이 나쁜 죄인을 벌하는 형벌입니다. 가족 중에 누군가 그런 일을 당한 사람이 있다면 천추에 한이 될 것입니다. 그 동네를 떠나지 않고는 그 부끄러움을 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의 저주를 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형벌을 당하셨습니다. 그분은 번개를 치며 강림하실 수도 있으신데, 십자가 위에서 천군천사로 호령하며 당신 스스로를 구원하실 수도 있었는데, 아무것도 행하지 않으시고 사람의 제도에 순종하여 사람의 형벌에 순종하여 죽임 당하셨습니다. 결정적인 순간, 그 마지막 순간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시면서 예수님을 높일 수 있었습니다. 그랬다면 우사인 볼트가 우승할 때 친 번개처럼, 정화 선단에게 임한 '신의 불'처럼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마지막 살떨리는 순간에 죽임 당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육체의 바람대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오르셔서 죽임당함으로 선포하신 것은 '이 육체는 그 죄와 함께 죽임당하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육체가 죽임당함은 육체의 자랑 또한 십자가 위에 못박힌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증명하신 첫 번째 진리입니다.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신앙의 외모를 쫓는다는 것입니다. 완장을 차는 것과 같고 직위를 주는 것과 같습니다. 자리가 사람을 바꾸고 지위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자리가 달라지면 거기에 맞게 변화됩니다. 지위가 높아지면 역시 거기에 맞게 변화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정작 나 자신 속에 있는 '나'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승승장구할 때는 모르지만, 추락할 때는 시련이나 핍박이나 중상모략 앞에서 아무 준비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압니다. 외모와 자리와 완장이 우리를 강건하게 하지 않습니다. 역할만 달라졌을 뿐 우리 속사람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할례를 받으면 율법을 지키려는 수고를 등한히 하게 됩니다. 내적 확신으로 말씀을 순종하는 힘을 갖지 않고, 사람의 눈에 띠는 몇 가지로 자기 신앙을 포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 내용물이 좋지 않으면 포장이 좋을수록 멸시받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한 말씀 한 말씀에 순종해가는 사람은 자기 안에 자랑이 있습니다. 자기 속으로 어제는 순종하지 못했던 내가 오늘은 말씀을 순종하게 되었노라는 이 자랑이 가만히 자기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 자랑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랑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의 자랑은 예수 십자가뿐입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면 박해를 받습니다. 세상은 십자가를 혐오스럽게 생각합니다. 십자가를 꺼립니다.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고 유대인은 표적을 구한다고 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어떤 사람은 지혜를 구하고 어떤 사람은 표적을 구하는데, 십자가는 사람들의 눈에 지혜도 아니고 표적도 아닙니다. 사람들의 동경하는 것이 지혜와 표적인데, 그것이 아니니 인정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환대받지 못할 십자가를 자랑하기까지 한다면 어떤 취급을 받겠습니까. 그런데 요즈음 사람들은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같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십자가 목걸이도 있고, 십자가 귀걸이도 있고, 십자가 책갈피도 있고, 십자가가 예쁘게 새겨진 티도 있고, 형광색으로 빛나는 교회 십자가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랑할 십자가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b)는 말씀 속에 있습니다. 우리의 자랑할 십자가는 세상 모두를 못박게 하는 십자가입니다. 이 세상 모든 정욕도 안목도 자랑도 십자가에 못박히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로 깨닫고 보니 정욕은 우리의 올무요, 깨닫고 보니 안목도 우리의 족쇄요, 깨닫고 보니 자랑도 우리를 채운 수갑이었습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근심을 주고, 자랑하면 할수록 고통을 만들며, 안목을 넓히면 넓힐수록 갇혀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뉴튼은 자기 평생의 노력과 성과에 대해 '넓은 바닷가 해변에서 돌을 던지며 노는' 소꿉놀이 정도에 비유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세상 안에서 살다가 세상에서 끝마칠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미리 십자가 위에 세상을 못박으셨습니다. 이제 '맞다 세상은 못박히고 내 속에 가득한 세상도 죄찔림으로 못박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성령께서 알게 하신 사람은 내가 적극적으로 세상을 대하여 못박히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못박힘으로 세상에서 건짐을 받습니다. 정욕과 안목과 자랑에 대해 못박힘으로 정욕과 안목과 자랑에서 구원받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다시 살리심을 받으심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무릇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갈6:16). 십자가의 자랑은 새로 태어나는 자랑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로서 다시 태어나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다가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는 인생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역사하셔서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쪼개십니다. 하나님보다 높아진 모든 이론을 파하는 강력으로 역사하십니다. 왜 우리의 본성과 존재를 변화시키시면서까지 사랑하시는지 궁금해할 때,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우리를 새로 지으시기 위하여 친히 십자가의 박해를 받으시고, 다시 살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새로 태어날 방도가 없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는 새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다시 살리십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b)고 고백하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인은 그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사랑하지만, 그들이 할례를 쫓고 십자가를 붙잡지 않을 때는 그들과 함께 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바울에게 요구했습니다. 대사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같이 주께 인정된 사도들에게서 받은 자격증이 있느냐고. 그러나 바울은 대답했습니다. 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난 사도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갈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1:11-12).

  자격증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볼 때 이런 태도는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자격증도 없이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사기꾼이거나 돌팔이거나 사정상 어쩔 수 없어서 다른 사람의 자격증을 대신 걸어놓는 사람뿐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당당히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눈에 보이는 자격증은 없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으나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자격증이 있다. 나는 십자가 위에서 새로 난 사람이라는 자격증을 가졌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다가 고난받은 흔적을 가진 사람이다. 나는 그분께서 친히 세우신 사도다." 믿는 자의 자존심은 무엇입니까 믿는 자의 자부심은 무엇입니까? 우리들의 자랑은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입니까? 교회의 직분입니까 교회를 섬긴 연수입니까? 그런 것이 우리 스스로를 격려할 만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들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로부터 새로 난 사람, 거듭난 사람이라는 자부심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과 연관된 사람이라는 이 자부심, 이 자존심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랑하다가 죽을 이름입니다. 나의 육체와 씨름하면서 육체와 마음의 부패함을 확인하며 주께서 돌이키라는 말씀이 얼마나 은혜인지 고백하는 이름입니다. 다른 사람을 말씀으로 도우면서 그리스도의 인내와 성실을 배워가는 이름입니다. 억울한 일 앞에서 밤잠을 뒤척이다가도 내일 아침이면 다시 주 앞에 기도하며 순종하므로 그리스도를 직접 닮아가는 이름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못박히고, 또 스스로 세상을 대하여서 못박히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이름입니다. 이 놀라운 이름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자랑하며 살기로 작정합시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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