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4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갈5:13-26) | 이정식 | 2013-08-0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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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아라 마트 방향으로 가다 보면 한 상가 앞에 이런 글이 쓰여 있습니다. "이곳에 쓰레기 버리지 마시오. 적발 시에는~ 너네 집에 가서 확 뿌려버릴테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거 잘 모를 겁니다. 자기 집 앞에 다른 사람이 버린 쓰레기를 보면 아주 기분 나쁩니다. '너네 집에 가서 확 뿌려버릴테야' 하지 않고, '자기 집 쓰레기는 스스로 책임져 주시는 센스를' 하고 쓴다면 부드럽기는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권고로 알아들을 만한 사람이라면 벌써 알아들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번 다른 사람 집 앞에 버리는 습관을 들인 사람에게는 '너네 집에 가서 확 뿌려버릴테다' 정도는 돼야 정신 차릴지 모릅니다. 불특정의 나쁜 습관을 가진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은 책망하고 경고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사랑은 그저 봐주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깨닫게 하는 것도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잠27:5)고 하셨습니다. 한 때 교회 앞 전신주 밑에다 쓰레기를 갖다 놓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도저히 손해나 침해를 참지 못하는 한 이웃이 그 쓰레기더미에서 명세서를 찾아서 거기 적힌 사람을 찾아 고발하겠다고 어름장을 놓았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한두 번 지나가면서 전신주 밑에 쌓인 쓰레기를 본 사람은 거기에 쓰레기를 버리게 됩니다. 그곳에 안 좋은 문화가 생기는 것입니다. CCTV를 설치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쫓아다니면서 저지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우리 집사님들이 낸 아이디어는 그곳에 큰 화분을 놓고 식물을 심어 아예 쓰레기를 버릴 수 없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 방법은 지금까지 효과를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십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말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는 육체의 기회를 삼을 자유가 아니라,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육체의 기회로 삼는다는 것은 자기를 위하여 자유를 부려쓴다는 뜻입니다. 쓰레기를 무단으로 투기할 수 있는 자유는 자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방탕입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5:14-15).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할 수 있는 자유는 상대의 애환을 들을 수 있는 자유요, 듣고 또 들을 수 있는 자유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까지 권면하고 돌볼 수 있는 자유입니다. 하지만 서로 경우에 넘지 않도록 하고 지킬 것은 지켜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사랑은 쓰레기 투기나 교통 습관 같은 사회윤리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육체의 욕심을 쫓지 않고 성령을 쫓아 행할 때에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 둘 가운데 하나는 내쫓겨야 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7). 육체의 소욕은 몸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날 때부터 갖게 되는 욕구입니다. 그것은 자기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행하는 욕망입니다. 육체의 소욕 안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할 뜻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 수는 있어도 행할 힘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을 모셔들이면, 하나님의 영은 육체의 욕구를 거스립니다. 이 둘은 원수지간입니다. 이 둘이 공존하고 있으면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양심을 찌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면 자기 유익이 '너 뭐하러 그렇게 살려고 하냐' 하면서 가로막아 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성령을 쫓아 행할 수 있는 자유, 곧 육체의 욕구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육체의 소욕이 자기 원래 집을 떠날 때 고분고분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나가란다고 순순히 나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끝까지 우리 몸과 마음에 역사하고 틈을 타서 하나님의 성령을 압박하려고 합니다.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 물에 물탄듯 슬그머니 습관 속에 들어오듯이, 육체의 소욕도 교회 안에 슬그머니 행세를 하기 시작합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5:18). 성령의 인도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말씀과 기도, 섬김과 봉사로 나아가지만, 교회 안에는 구원이 없는 육체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둘은 서로 서로 영향을 주게 됩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만 성령을 쫓아 살지 않는 사람들 역시 성령을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성령을 따라 살고자 하던 사람들이 육체의 사람들에게 져서 밀리면 어느새 교회는 자기 이익에 맞으면 좋아하고 자기 유익에 합당하지 않으면 미워하는 공동체가 되고 맙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서 교회를 이용하는 사람들로 바뀌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그와 같은 것들"(갈5:19-21a)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5:21b).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혹시 천국 들어가는 것만으로 만족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회개함으로 생각을 고치시기 바랍니다. 전학 가서 배정된 교실에 들어가는 권리를 얻었지만 그 교실의 어떤 것도 손댈 수 없고 아무 권리도 없는 상태입니다. 새로운 직장이나 낯선 곳에 가면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런 지경이라면 이보다 더 부끄러운 것이 없을 것입니다. 진리 속에 들어갔는데 진리 속에 있을 곳이 없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께로서 시작하지 않으니까 술수를 쓰게 됩니다. 세상의 수많은 이익단체의 속성입니다. 그들은 이익을 내는 것이 주 목적입니다. 경쟁하던 기업들이 서로 연합하기도 하는데, 그 연합조차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익이 된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생각할 것 중에 하나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10:34)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당 짓는 것과 비슷한 말씀을 즐겨 하셨습니다.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25:46).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는 "화 있을찐저"하시면서 분노하셨습니다. 사도 바울 또한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마음을 격동시켰고 언제나 두 편의 무리가 갈라지도록 했습니다. 진리와 은혜를 세우기 위해 원수를 드러내는 것과 분쟁이 나게 하는 것, 시기와 분냄이 나타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자기 이익을 더 챙기기 위해서 일부러 원수를 맺거나 분쟁을 일으키거나 시기와 분냄을 조장하는 것은 죄악에 속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의 소욕과 싸우는 일을 넘어서서, 결국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5:22-23)입니다. 주님께서 "화있을찐저 너희 서기관과 바리새인아"하고 선언하실 때에도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주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의 매입니다. 세상은 '사랑의 매'를 법적으로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원천봉쇄해 놓았습니다. 하지만, 당사자는 압니다. 사랑의 매를 대는 사람도, 그 매를 맞는 사람도 그것이 사랑의 매인지 감정의 매인지 압니다. 있는 것으로나 보이는 것으로 희락을 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있는 것으로나 보이는 것으로 희락을 누리려고 하면 당장에 시험이 찾아오고 비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쁨을 즐거워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이미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즐거워합니다. 화평을 누립니다. 마음에 격랑이 일어나서 눈에 핏줄이 서고 목에 핏대가 서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거짓말처럼 화평이 사라집니다. 단 한 번도 화평을 모르는 것처럼. 하지만, 다시 주님께로 돌이킵니다. 갈등하면서 우리 속에 죄를 다시 보게 됩니다. 인격적으로 우리가 완성해 갈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욕심을 버리고 다시 돌아보면 죄악에 뒹굴고 있는 우리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때 주님께로 다시 돌아갑니다. 이런 사람인 줄 주님께서 벌써 아시고도 나를 위해 십자가로 사랑하셨습니다. 오래참습니다. 참기 싫을 때도 있습니다. 쏟아부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하지만 나와 상대방이 진리의 줄을 붙잡기까지 오래참으신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로 물고 뜯어보아야 상처만 남고 쓴뿌리만 쌓인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삶의 주관자가 아니라는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닌 데 긴 척 해봐야 아무 소득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와 나 사이에 소금을 두고 교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행할 수 없다는 것이 이런 뜻입니다. 나로서는 할 수 없다는 것이 이런 때입니다. 자비를 배웁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 처음 나온 사람에게 자비를 베풉니다. 믿음으로 섰다가 넘어진 사람에게도 자비를 베풉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였더라도 시험에 들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자비는 사람의 근본적인 불쌍함에 바탕을 둡니다. 모든 사람은 근본적으로 어리석고 무지합니다. 열 길 물 속을 꿰뚫고 있어도 한 길 사람 속은 들여다 보지 못합니다. 양선을 행합니다. 착한 사람이 됩니다. 공연히 사람을 좌지우지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착한 사람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착한 것이 좋은 것인데 이 때에는 도리어 약점이 됩니다. 그러면 착하기 싫습니다. 착한 행실이 얕잡아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도록 진보합니다. 충성을 다합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으니까,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이 말씀으로 주장하려고 듭니다. 하지만 충성은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충성이 강건할 때 비로소 사람을 향한 성실이 온전해집니다. 거꾸로 되면 사람의 종이 되고 맙니다.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은 아부하지 않습니다. '척'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은 결코 타협하지 않습니다. 온유하게 됩니다. 훈련되지 않은 야성으로 제멋대로 살 때 안타깝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들의 특징은 갈 데까지 가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 노를 억제하느니라"(잠29:11) "두루 다니며 한담을 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잠11:13)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32). 어리석은 자는 모두 탕진하려고 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온유하며 절제할 줄 압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삶의 푯대로 하고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길래 이런 삶을 꿈꾸며 실천하며 살까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5:24) 어떤 사람이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살 수 있는가 했더니, 십자가에 내 몸만 박힌 것이 아니라, 내 정과 욕심까지도 못박은 사람이 그럴 수 있다고 분명히 못박고 있습니다. 정이 사라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욕심이 없어졌다는 말도 아닙니다. 정과 욕심은 언제가 자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우리 가슴에 말하고 우리 생각 속에 찾아듭니다. 그러면 정과 욕심을 못박았다는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이 생각 이 마음은 육체인 네가 하는 생각이며 마음이구나! 나는 너를 듣지 않을 것이다. 내게서 썩 떠나가라. 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것이다 하며 선언하고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 본성대로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죽이는 일이 될 뿐이며, 자기 자신 죄인이 될 뿐인 것을 예수님 앞에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갈5:26)는 것은 허망하다는 것을 이미 아는 것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것을 인정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거룩하심을 배울 소망만이 갖게 됩니다. 라디오 MC 중에 허수경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첫 사랑과 결혼을 했습니다. 아이를 갖기를 소망했고 어머니가 되고 싶었습니다. 두 번의 유산 후에 어렵게 시험관아기에 도전했습니다. 번잡스러운 모든 절차를 다 마치고 남편이 오기만 하면 되는 날, 남편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밤 늦게 술에 취한 채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 아이를 당신에게서 낳고 싶지 않아" 너무도 뼈아픈 말입니다. 나중에 남편이 아이를 갖자고 다시 제안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아이를 낳을 자신도, 아이를 기를 자신도 없어"하며 매몰차게 갚아 주었습니다. 남편의 뼈아픈 말을 확실히 갚아주었습니다. 확실히 갚아주었으니 속시원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하는 후회가 있었습니다. 육체의 일이란 어찌 보면 정당한 것입니다. 너무도 정당하기 때문에 그렇게 행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행하고 나면 '똑부러진다'는 말은 들을지언정 하나님께 속한 희락도 사랑도 평강도 열매맺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정직할 순간에 진정으로 가치를 매기는 것도 '똑부러지게 갚아주는 능력'이 아니라, 온유와 절제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리스도를 얼마나 닮았느냐에 있습니다. 성령을 쫓아 사는 것,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 성령으로 사는 것은 유일하게 영과 혼과 육 모두를 만족시켜 줍니다. 대통령의 사람들은 대통령의 품격과 권위를 지켜주는 사람들입니다. 만일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거나 불법적인 일에 관여하다가 적발되면 그 자리를 물러납니다. 자기를 지명한 대통령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품격과 위엄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동시에 우리 스스로 주를 닮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따라 살기 위해서 때로는 아픔과 낙담, 실패와 좌절의 터널을 통과해야 합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우리 안에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는 이 놀랍고 기이한 약속 앞에서 기쁨으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육체의 정과 욕심이 꺾이우는 순간에 찾아오는 거룩함의 축복은 하나님의 영을 더욱 따르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사시기 바랍니다. 쓰레기를 버리지 못하게 하는 지혜를 넘어서, 그렇게 하려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축복하며 이끌어주는 사람이 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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