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8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갈5:1-12) | 이정식 | 2013-07-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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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한 부인이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보니 자궁암에 걸린 것같다는 소견이 나왔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얼마나 상심이 컸던지 눈앞이 캄캄해지고 다리가 후들거렸습니다. '큰일났다' 생각했지만 정신을 차린 후에, 그래도 한 번 더 검사를 받아보자는 심정으로 다른 병원으로 가서 한 달 동안 정밀 검사를 받았습니다. '정말 암이면 어떻게 하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한 달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정밀 검사를 판독한 그 병원의 의사 선생님이 최종 소견을 말씀하기를 '이거 암 아닙니다 건강하니까 평안히 집으로 돌아가세요'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너무 기뻐서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기쁜지 그 기쁨을 감사로 나타내고 싶었습니다. 한 달 동안 암에 눌려 살던 감옥생활, 지옥생활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 너무도 감사했던 것입니다. 그 병원에 천 만원을 기부했다고 합니다. 의대생들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돌팔이 의사 때문에 이 고생했네'하고 넘어가겠지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같은 그 기쁨이 더 컸기 때문에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자유는 이런 것입니다. 7월 초순에 교하도서관에 갔더니 거기 신간코너에 진열된 열댓 권의 책이 모두 '여행, 캠핑' 관련 책이었습니다. 떠날 때가 된 거죠. 빠삐용은 도망갈 틈만 있으면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쉽게 쓰지 못하도록 가둬놓으면 아이폰도 탈옥합니다. 우리가 만일 어떤 것에 갇혔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우리 또한 마찬가지로 그렇게 할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구속하려 들고 속박하려 든다면 그 사람을 피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 말고도 우리를 가두어놓는 것이 이미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송이 눈만 내려도 가지가 부러질 수 있는 것은 이미 쌓인 눈이 많은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때는 우리 자신에게서부터 도망치고 싶은 때도 있습니다. 세상에! 나 자신이 나의 감옥이라니 아이러니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옮기기도 하고, 떠나기도 하고, 다시 시작하기도 합니다. 여름 휴가는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줄 절정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마음이 눌리게 만드는 모든 감옥은 다 느낄 수 있고 깨달을 수 있지만, 죄의 감옥은 깨달을 수 없습니다. 다른 모든 감옥에 대해서는 대처 방안이 있어서, 캠핑도 가고, 쇼핑도 가고, 콘서트에도 가고, 여행도 가고, 직장도 옮기고, 학원도 다니고, 그래서 실력도 갖추고,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낚시도 하고, 등산도 합니다. 생활의 변화를 줄 수 있는 방법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죄의 감옥에 대해서는 스스로 깨닫지 못합니다 깨닫지 못하니 어떻게 할 방법도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십자가는 우리에게 걸림돌입니다. 십자가는 은혜를 보기 전에 먼저 죄를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가 걸림돌이 아니라 은혜가 될 때에야 모든 닫혔던 문들이 열리고 자유롭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으니,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전까지 종의 멍에를 메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종의 멍에를 푸는 유일한 것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과연 그 멍에를 푸셨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김서택 목사님은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교회에 다녔고 나중에는 주일학교도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구원의 감격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냥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여전히 하나님을 믿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주님이 마음에 계신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악한 자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습니다. 자기 속에 있는 죄성을 심각하게 발견한 것은 대학생 때였습니다. 살면서 좀더 나아지겠지 생각했지만 그렇게 될 것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본성에 속하는 문제였습니다. 속으로는 하나님을 아주 미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냥 이유없이 미웠습니다. 그리고 그러다가 지쳤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나를 맡아주세요 내게 오셔서 내 주가 되시옵소서.' 암인가 아닌가 진단하는 방법이 있듯이, 내가 죄의 종인가 아닌가를 판단할 수 있는 정밀진단법이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8절에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라고 하셨습니다. 입술에는 하나님이 있지만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이 죄의 종입니다. 죄에게 꼼짝못하고 갇혀 있어서 죄가 끄는 대로 말하고 죄가 이끄는대로 순종하며 행동합니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롬1:29-31)에 속하면 나는 죄의 종입니다. 일단 말기암 선고가 나면 살 확률이 거의 없는데, 이런 것이 내 마음에 있을 때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이 정하셨습니다(롬1:32a).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위를 돌아보면서 하는 말이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롬1:32b)고까지 말하는 것입니다. '갇혔다'는 것을 어떻게 말할까요? 저를 가르치셨던 선생님 중에 한 분이 버스를 타고 학교로 가고 계셨습니다. 한 참을 가는데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심해져서 식은 땀이 나고 도저히 학교까지 갈 수 없게 생겼습니다. 중간에 버스에서 내려서 화장실을 찾는데 잘 눈에 띄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런 일 겪어보셨습니까? 밥을 먹고 난 후에 체하는 것도 비슷합니다. 체하면 손발이 차가워지고 가슴이 답답하고 식은 땀이 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체할 때 드는 생각은 세상에 이것보다 더 괴로운 것이 있을까 합니다. 다른 사람의 어떤 소리도 곧이 들을 수 없고, 그 말을 따르는 것은 아예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는데, 내 마음이 듣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분이 계십니까? 지금 붙잡혀 있는 것입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고 자유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있지 않은 것입니다. 바늘로 엄지손가락을 따고 체기가 내려가면 살 것같습니다.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후에야 '내가 하던 일이 뭐지?' 합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 중에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유혹을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약해지니까 믿음으로 활동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엉뚱한 수를 쓰는데 보이는 활동과 행위로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멀어진 자로다"(갈5:3-4). 할례를 받는 것에 대해서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창17:13b)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할례는 우리 몸에 받는 것입니다. 마음은 여전히 하나님을 떠나 있는데, 몸에 할례를 받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붙잡지 않고 다른 것을 붙드는 잘못을 행합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갈5:9). 그런데 이런 모습이 온 교회에 퍼집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진리를 순종하게 하며, 순종하는 일에 달음질치게 하시는데(갈5:7-8), 이 사람들은 진리를 순종하지 않고, 몇 가지 말씀을 지키는 것을 자랑하기 시작합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의 눈에 띌 만한 것을 지킵니다. 서서 오랫 동안 기도도 하고, 헌금도 하고, 전도도 하고, 봉사도 하고, 예배도 드리고, 직분도 받고, 심지어는 자기 마음에도 확실한 표시가 나기를 원합니다. 신실한 모습이 사람들 눈에 자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인데, 보이는 행위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자기 행위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이 했는가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에 주목하면 할수록 자유가 아니라 얽매임과 구속이 올 뿐입니다. 하나님 밖에 있으면서 어떻게 자유를 바라겠습니까? 하나님을 멸시하면서 어떻게 자유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캠핑 가서 안 싸우고 오면 다행입니다. 또 잘 다녀왔다고 하더라도 그게 전부입니다. 갔다 와야 하니까 갔다 온 것일 뿐. 소망이 생긴 게 아니며 사랑이 커진 것도 아닙니다. 내가 새사람이 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저 그렇습니다. 우리는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속마음은 기도한다고 바뀌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기 위해 예배해야 합니다. 하지만 일시적일 뿐 예배한다고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를 아름답게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속마음은 섬긴다고 새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나를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나, 양잿물로도 씻을 수 없는 마음의 감옥, 그 죄에게 사로잡힌 마음을 해방하시키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십자가로 죄와 사망을 멸하시고, 하나님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가게 하시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모셔들이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주인이 하나님이 되실 때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것을 전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갈5:10b).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하노라"(갈5:12). 사랑으로써 나타나는 믿음이 아니라면 누구든지 자기가 옳다 하는 것으로 자랑하며 이간질하며 판단하며 정죄하게 될 것입니다.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은 바로잡아야 합니다. 세상 윤리에 비추어도 미치지 못하는 태도는 고쳐져야 합니다. 하지만 믿음 안에서 드러나는 행위로 의롭게 되려고 하다가는 악독을 품게 하고 시기질투하게 하고 수군수군하게 하고 비방하게 하고 무자비하게 됩니다.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중하면 다른 것으로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할까요. 그것은 다시 죄의 종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납니다.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갈5:7). 구원의 은혜 속에서 잘 성장하고 있던 사람이어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으로 달음질치다가,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는 믿음의 표시를 내는 데로 달음질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갈5:11). 사도 바울은 할례 받으라고 전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전했습니다. 은혜의 출처, 사랑의 근원, 소망의 샘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랑이 없다면 그리스도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헛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믿음은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믿음입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내 소망이요 은혜라는 것을 믿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다른 아무것도 변화된 것이 없는데도, 다른 사정이나 형편이 달라지지 않았는데도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향한 감격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어서 오는 불안에서 자유를 얻습니다. 사랑받지 못한 자는 두려워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두려움에서 자유를 얻습니다. 문제가 닥쳐와서 마음을 빼앗긴 후에도 문제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들을 다루신다는 것을 믿으면 자유를 얻습니다. 깊은 바다로 꺼져내려가고 또 내려갈 때 '나는 죽었다. 이대로는 죽는다' 한없이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꿈 속에서도 죽을 것같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갑자기 몸을 붙잡고 바다 위로 밀어붙이는 힘을 느낍니다. 물밖에 있는 빛도 보입니다. 쑥 올라올 때 잠에서 깨어납니다. 죽다가 살았습니다.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독생자를 보내셔서 우리 모든 죄악을 대신하여 죽으신 사랑, 그리고 능력으로 다시 사셔서 우리 모두를 하나님 앞에서 다시 살게 하신 능력이 여러분과 저를 우리 성품의 속박에서, 인간관계의 결박에서, 우리 정욕의 힘에서, 사랑없는 이 세상에서 건지셔서 자유케 하고, 도리어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세상을 껴안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시키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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