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1일>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갈4:12-31) | 이정식 | 2013-07-2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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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에서 복음전할 때 바울은 사람들이 터부시할 만한 그런 병이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이것을 간질이라고도 하고, 안질이라고 합니다. 간질은 갑자기 몸에 경련을 일으키고 입에 거품을 물기도 하고 의식을 잃기도 하는 병입니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갈4:13-14a). 그 병은 당시는 물론이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악령에 들린 사람으로 치부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침을 뱉으며 그 부정한 사람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을 그렇게 대하지 않고 영접했습니다. 또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갈4:15b)는 구절에 따르면 안질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심한 눈병일 수 있습니다. 그 병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의 관습으로 볼 때 사람들이 족히 꺼릴 만한 병을 가진 것이 확실합니다. 하지만 복음을 듣고 변화된 사람들은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뱀이 물려도 죽지 않던 바울, 귀신을 내어쫓던 바울, 대사도 베드로를 꾸짖던 바울, 죽도록 돌에 맞아도 그 다음 날 일어났던 바울이 자기 질병을 조금도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보통 질병이 아니라 사람들이 침뱉을 만한 질병이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기쁨으로 받았을 때는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갈4:14b)습니다. 복음을 만난 사람은 서로서로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보고 영접합니다. <땡큐>라는 프로그램에 김희아 씨가 나왔습니다. 김희아씨는 모반증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피부에 검은 사마귀나 얼룩덜룩한 점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곳이 아니라 가장 눈에 띠는 얼굴에 큼지막하게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어릴 땐 몰랐지만, 학교에서 친구들이 자기 얼굴을 그린 그림을 보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거울을 보며 '이거 없애주세요' 기도하기를 진물이 나도록 문질렀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피했고, 될 수 있는 대로 땅만 보고 다녔고,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길을 걸었습니다. 머리를 길러서 얼굴을 가리고 다녔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선생님께서 노래를 시켰고, "희아 노래 잘하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듣는 칭찬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머리를 묶고 사람들의 허리춤이 보이는 정도는 고개를 들게 되었습니다. 스무살이 넘어서 소개팅을 했습니다. 첫 만남부터 2년 동안 데이트를 하면서 화장으로 가리고 만났습니다. 남자가 우연히 자기의 맨 얼굴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끝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너 만나고부터 이랬다". 하지만 그 남자는 하나님이 짝지어준 사람이었습니다. 결혼을 했습니다. 혼자서 다른 사람의 시선을 감당하는 것은 훈련이 되어 있지만 아이들 앞에서는 부담스러웠습니다. 어려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고 성했던 오른쪽 얼굴에 상악동암이 찾아와 반쪽 얼굴뼈를 다 들어내야 했습니다. 이제 몸의 다른 살을 이식했습니다. 늘 마스크를 찾아 쓰곤 하던 엄마에게 딸이 "엄마, 괜찮아 우리가 있잖아" 하는 말을 듣고 마스크를 쓰지 않고 외출을 합니다. 그가 쓴 자서전 책 이름은 <내 이름은 예쁜 여자입니다>입니다. 희아씨는 감사를 찾았습니다. 자기가 살기 위하여 감사를 찾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감격적으로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갈4:12a). '너희가 처음에는 이방인이었으나 그리스도 예수로 인하여 속량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나 또한 처음에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이었으나 그리스도 예수로 인하여 속량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내가 너희와 같고, 너희도 나와 같이 되었다. 그러니 육체로 보기에 뭔가 석연치 않은 결함과 약점이 있는 것같았어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사랑하신 그 사랑이 완전하므로 너희가 나를 신뢰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교제입니다. 눈에 밟히는 무슨 약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영접하는 것입니다. 구수하게 흉을 볼 수는 있을지언정 그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겸손히 영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희아씨에게 하나님의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중1 때 선생님, 데이트로 만난 남편, 두 딸들, 하지만 무엇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났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고 자기 안에 있는 상처도 위로받습니다. 주변의 부담스런 시선을 견디느라 톡톡 쏘는 듯한 성격이 되었어도 감사와 사랑 안에 살아갑니다. 그런데 사단이 밀까부르듯 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복음에서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거짓 선생들이 가만히 들어와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표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부정한 음식을 먹지 말고 할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자녀되는 확실한 표라고 주장했습니다. 믿음이 굳게 서지 못한 갈라디아 성도들은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하나 둘씩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바울을 영접했던 이들이 거짓 선생들의 꼬임을 받은 후에는 도리어 바울을 원수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갈4:16). 유혹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높이지 않고 자기들을 따르도록 유혹합니다.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갈4:17). 복음을 버리면 소망이 사라집니다. 소망이 사라진 자리에는 죄가 나타납니다. 김희아 씨를 보던 사람들처럼, 외모를 보고, 멸시를 하고, 돌을 던지고, 동네에서 내몰고, 욕하고 때리고 버리고 놀림감으로 삼고 하는 일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바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실 자리가 없습니다. 보약이 된다면 무엇이든지 찾듯이, 복이 된다면 어떤 신이든지 어떤 방법이든지 쓰는 것과 같습니다. 복을 구하는 사람은 복이 없어 보이는 자를 핍박합니다. 복이 될만한 사람을 가까이하고 복이 안 될만한 사람을 업신여깁니다. 그러니 여기로부터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모든 행동을 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다시 세상적인 삶으로 돌아가려는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탄식하는 마음으로 의심합니다. 그리고 정색을 하고 목소리를 바꾸어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해산하는 수고와 같이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다시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왜 이렇게 안 좋은 일이 계속 되는가? 팔자가 이런가 어쩔 수 없는 운명인가. 하나님은 나를 싫어하시는가 나는 구원만 간신히 받고 복은 물건너 간 사람인가' 하며 의심하는 사람에게 말씀합니다. 복음을 가졌느냐! 하나님의 복음을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것입니다. 주일 예배 출석 성도가 5만을 헤아리던 고 하용조 목사님은 간암수술을 5번이나 받았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세 번을 신장투석을 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그렇게 하면서 복음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는 복이 없는 사람인가요? 릭 워렌 목사님은 간질과 흡사한 희귀병을 앓아 갑자기 쓰러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강단에서 쓰러질 것을 대비해서 다른 목사님이 대기하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 몸에 정한 가시도 큰데, 2013년 봄에는 우울증을 앓고 있던 막내 아들이 자살로 그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가요? 아닙니다. 아마도 갈라디아 사람들이 복음을 받았지만 속으로 기대했던 복보다는 핍박이 오고 불화가 오고 실패가 찾아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복음이 전부가 아닌 모양이다' 생각이 들어서 할례를 행하고,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고, 다시 신령하게 동물로 제사를 드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을 끌어댈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모든 것을 받은 것입니다. 바울은 강력하게 되묻습니다 "내게 말하라!" "(복음을 떠나)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갈4:21). 율법의 선생은 얼마나 허무하며, 율법의 형상은 얼마나 초라한가 보아라. "아브라함의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갈4:22). 아들은 다 같은 아들이로되, 계집종 (하갈)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 (사라)에게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갈4:23). 여러분 그러나 이것은 적자와 서자가 다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냐 율법의 자녀냐의 구별입니다. 행위로 하나님께 나아가느냐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느냐의 차이입니다. 바울은 더욱 큰 소리로 외칩니다.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갈4:24a). 언약이 두 개입니다. 먼저 된 언약과 나중 된 언약이 다릅니다.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갈4:24b-25). 시내 산에서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 율법의 자녀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계집종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과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의 아들은 같은 것이며, 이는 유대인의 예배장소인 이 땅의 예루살렘과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두 종노릇하게 하는 언약입니다. 그러나, 다른 언약이 또 하나 있으니 이는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4:26). 또 다른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것이니, 위에 있는 하늘의 예루살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 약속은 하늘의 약속이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율법의 아들, 죄의 아들, 이스마엘과 같은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고, 다시 살으셔서 그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아들, 생명과 성령의 아들, 이삭과 같은 약속의 아들로 삼으신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두 번째 언약일 뿐만 아니라 한 영원한 언약입니다. 너네 어머니는 누구며 우리 어머니는 누구냐? 이 세상과 육체에 종노릇하는 어머니는 하갈이요 하갈의 후손이나, 우리는 위로부터 난 자니 사라와 같이 자유하는 어머니가 우리 어머니라. 처음은 육신의 부모에게서 똑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요 멸망의 아들이요 종노릇하는 아들이더니,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우리가 본질상 하나님의 아들이요 영생의 아들이요 자유한 아들이 되었도다. 하나님의 영원한 새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그 옛날 아브라함 집에서도 하갈과 하갈의 몸에서 육체를 따라 난 이스마엘이 잉태하지 못한 사라를 핍박하였듯이, 이제도 성령을 따라 난 자가 핍박을 받고 있도다. 그러나, 여러분들아 단호하라.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갈4:30). 여러분의 마음에서 하늘에서 난 복음을 내쫓고 이 땅의 율법으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다시 종되게 하려는 계집종, 율법을 내어쫓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 있는 우리를 '내 아들아' 하고 부르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영접하는 순간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자리잡으시고, 영원히 떠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연약과 결점과 율법적인 체질을 가진 우리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샘물처럼 지어내십니다. 그분의 사랑의 은혜 안에 거하면 우리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면 그것이 인격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인격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후퇴시키지 않고, 그렇게 중화시켜 버리지 않고, 그렇게 물타기를 하지 않고 오직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속에 '바로 그'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도록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삶은 얼마나 명쾌하며 얼마나 가슴뛰게 하며 얼마나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우리 마음을 훔치는 거짓말하는 선생들을 내어쫓으십시오. 세상의 가치관을 내어쫓으십시오. 그들은 자기들을 따르게 하려고 열심을 내고 우리에게 잘해 주는 것뿐입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에서 떼어놓으려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세상을 내어쫓습니다. 복음 안에서 평화와 기쁨을 누립니다. 중국 선교의 아버지 허드슨 테일러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만났고, 그때마다 믿음으로 이겨내려고 무척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노력하면 할수록 거룩은 점점 더 멀어져 갔습니다. 테일러의 마음 속에 큰 고민은 '어떻게 해야 믿음을 강하게 할 수 있을까?'였습니다. 믿음을 열심히 추구하는데도 믿음이 강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중에 테일러는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믿지 못할지라도 그분은 신실하시다! 나는 예수님을 바라보았다. 예수님을 바라보자 얼마나 큰 기쁨이 흘러넘치던지,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를 결코 떠나지 않겠다!"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려는 내 모든 노력은 헛수고였다. 나는 더 이상 애쓰지 않으련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겠다고 약속하셨으니까." 테일러는 자신이 하나님께 헌신됨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헌신된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으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고난받으셨고, 하나님의 성실하심으로 모든 공포를 이기셨고 죽음까지도 이기셨습니다. 그 어떤 낙담과 좌절감과 죄와 부족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여전히 우리 앞에 든든히 서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구원의 주님이 테일러의 마음 속에 든든한 형상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하신 일은 모든 두려움과 실망에서 우리를 든든히 세워주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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