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7일> 나의 최고봉, 최후 보루(갈3:15-29) | 이정식 | 2013-07-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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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교수님이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스트리아에서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귀국한 후에 철학으로 여러 대학에 강의를 하러 다녔습니다. 20년이 넘도록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공부하고 또 공부했습니다. 보기보다는 머리가 복잡했을 것인데, 스스로는 박사가 아니라 협사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제일 확실히 알았던 것은 자기가 연구한 서양철학자 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철학을 강의하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버스를 타러 가면서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나는 지금 행복한가?" 갑작스럽게 불거진 질문이었지만 이내 심각한 질문이 되었고, 마침내 답이 나왔습니다. "나는 지금 행복하지 않다." '행복할지도 몰라, 다들 그렇지 뭐 뾰족한 수 있겠어?' 했다면 그만일텐데, "나는 지금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 확실했습니다. 그날부터 그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작정했습니다. 하던 일도 그만두었습니다. 생각만으로는 행복하지 않고, 몸도 행복해야 하고, 영혼도 행복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분이 잘한 일은 자기 자신에 대해 정직했다는 사실입니다. 행복하지 않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행복하지 않다면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다른 어떤 핑계도 변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요10:10)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풍성한 삶은 바로 행복한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상태로 그대로 놔둬서는 안됩니다. 고통이 없다는 말이 아니며, 근심이 없다는 말이 아니며, 잠잠히 인내를 이루어야 할 일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내가 행복하지 않다면 그것은 아주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바꾸더라도 행복을 얻어야 합니다. 지존자에게서 사랑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 사랑을 받았다"하고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조용필의 Hello 뮤비에는 매력적인 여자를 처음 본 순간에 번개맞은 것처럼 감전된 소년이 등장합니다. Hello 한 마디에 '너를 보고 싶고, 너란 사람을 알고 싶'은 것이 소망이자 행복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우리를 위해 계셨습니다. 그리고 벌써부터 우리를 위해 불행을 가져온 뱀의 머리를 깨뜨릴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심판 때의 방주를 통해서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이 될찌라"(창12:1b-2). 다시 자손의 약속을 주실 때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했고,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찌어다"(갈3:7)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3:14)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3:26) 하나님의 주시는 행복이 우리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눈동자가 보이십니까? 한 모친의 딸이 키가 좀 작은 편이었고 그 사위는 아주 컸습니다. 첫 아들을 낳았는데 모친의 조마조마한 기도제목이 무엇이었는고 하니 '하나님 제발 아들 키가 컸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혹시라도 자기 딸을 닮아 키가 그만그만하면 시댁쪽에서 탓을 할까봐 그랬다고 합니다. 조금 후에 딸을 낳았습니다. 그 모친의 기도제목이 무엇이었는고 하니 '하나님 제발 이번에도 키가 컸으면 좋겠습니다' 였습니다. 왜냐하면 아들은 아쉬움이 없을 만큼 컸는데, 또 딸이 작으면 그것 가지고 시댁에서 탓을 할까봐 그랬습니다. 이해가 가고 동감이 되시죠? 참 감사하게도 이 집 식구들은 모두 아빠 기럭지를 닮아서 모친의 기도는 행복한 기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봅니다. 우리 삶에 이런 걱정거리가 한두 개입니까? 너무도 사실적이어서 가슴에 탁 맺힐 것같은 걱정거리가 한두 개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 했으면''~ 했더라면' 하면서 세월을 다 보내고 이런 걱정거리들에 붙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태초부터 나를 더욱 사실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갈3:15b). 그리고 먼저 조건없이 언약을 주셨습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3:16) 그 언약이 3000년을 건너뛰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달음질쳤습니다. 그 언약은 과녁을 겨냥해 날아가는 화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 꽂혔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는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갈3:27).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3:29). 어떤 복을 주셨는가 하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이 될찌라" 내가 복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복을 구하여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복이라는 것입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나에게 생긴다는 말일까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세상 모든 여자들이 싫어하는 한 가지씩을 가지고 있는 네 가지 없는 남자들'이어도,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말거리에 오른다고 하여도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복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것이 최고봉이기 때문에, 아무 문제 없노라고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이런 사실이 잘 안 믿어진다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이 안 믿어졌기 때문에 계속해서 자신들을 갈고 닦았습니다. 율법의 말씀에 따라 신실한 종교인으로 살려고 애를 썼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이런 노력들은 극에 달했습니다. 여기 눈물겨운 사람들의 노력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배를 경건하게 드리는 데에 집중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기도 생활에 힘을 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소리내어 기도하지 말고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꾸짖었습니다. 사람들은 전도 활동에도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가 열심을 내어 한 사람을 전도하여다가 지옥자식을 만드는구나"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십일조와 헌금 생활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보다 더 중한 의와 인과 신을 도외시하는 것을 꾸짖으셨습니다. 사람들은 더 많은 헌금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과부의 두 렙돈이 더 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여 주여 하고 더 많이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겉모양은 경건하였지만 속에 알맹이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았노라는 이 알맹이, 하나님께서 내 모든 죄악을 사하셨다는 이 알맹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신기한 점은 하나님께 사랑받는 순간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 앞에 떤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 만족을 얻으려고 했던 바로 그것이 죄요 하나님을 떠난 것이요 행복에서 멀어진 것이었습니다. 복을 얻기 위하여 복을 떠났습니다. 얼마나 이상한 일입니까?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2:19b). 하나님을 떠나고 복을 떠나 복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3:19). 율법은 언약이 있은 후 430년 뒤에 온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축복의 언약을 하신 후에 430년이나 지나서 모세를 통해 주신 것이 율법입니다. 언약이 먼저고 율법은 나중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것이 아니라, 중보자 모세의 손을 거쳐서 내려온 것입니다. 말하자면 대통령이 직접 담화하신 것이 아니라, 대변인이 대신 낭독한 것입니다. 그 뜻은 대통령의 뜻이지만, 그 무게감은 대변인을 통했기 때문에 덜 중한 것입니다. 8.15 경축사를 대통령이 직접하는 것과 국무총리가 대독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 내용은 대통령 재가가 난 것이지만, 그 무게감은 다른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거스리지 않습니다. 다만,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갈3:22) 때문입니다. 율법의 제일 사명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제이 사명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회의를 하기 위해 신학교에 갔습니다. 점심식사를 한 후에 다시 들어오는데 가방을 둘러멘 한 청년이 A4용지 반토막을 내밀었습니다. 목사님 네 분에게 각각 "예수 믿으세요" 하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전도선물도 없이 그냥 자기 간증을 써서 전도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전도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혼자 그렇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 전도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먼저 한 가지 소식을 알려드립니다. 우리의 조상은 원숭이가 아닙니다... 저는 교회에 오랫동안 다녔습니다. 찬양대도 하고 교사도 하고 리더가 되었고 목사님께도 인정받는 청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동안 지은 죄를 주일에 교회에 가서 버리고 오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마치 교회는 죄를 버리고 오는 쓰레기통과 같았습니다... 그러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저주받으셨다는 사실이 처음 듣는 것처럼 제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내가 내 죄를 위해 해야 할 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모든 일을 이루셨습니다." 이 청년이 자기 마음에 받은 예수님이 얼마나 좋았던지 목사님도 눈에 안 보이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되었건 집사님이 되었건 성도가 되었건 불신자가 되었건 상관없이 자기 전도지로 전도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께로 시작되지 않은 모든 것은 알맹이 없는 쭉정이입니다. 율법이 좋은 것이지만,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몽학선생이요 초등학문이어서 어릴 때 우리를 인도한 것입니다. 성장하면 결국 그리스도께 양도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않는(갈3:25) 것이 마땅합니다. 이 믿음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바로 그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것을 믿어 약속의 자녀가 됩니다. 이제 그 약속의 자손 곧, 믿음이 오셨으니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오, 나의 복은 어디 있는가' 하는 분이 계십니까? 주 예수 믿는 믿음 안에 내가 복입니다. 어떻게 확인할 수 있나요? 때가 되면 우리 소망하는 것을 하나씩 이루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혹시 행복 체크리스트가 있다면 믿음으로 주와 함께 하다가 하나씩 체크만 하면 됩니다. '이것 주셨구나 당연하지, 오랫동안 견디게 하시더니 이것도 주셨구나 당연하지, 감사하지.' 너무도 오랫동안 응답이 없는 일이 있을지라도 우리 마음 속에는 주님은 나의 최후 보루시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 속에 갇혀 있어도 주를 통하면 나는 복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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