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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30일> 우리 눈 앞에 분명한 것(갈3:1-14) 이정식 2013-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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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초 중에 제일 값비싼 약초는 산삼일 것입니다. 산삼은 웬만하면 '억' 소리나는 것입니다. 요즈음에도 직장을 그만두고 산삼을 전문적으로 캐는 사람이 있습니다. 산삼을 캐는 사람들을 심마니라고 하지요. 찾기 어렵다는 산삼을 보면 본 사람은 "심봤다!" 하며 세 번을 외칩니다. 기뻐서 외치는 소리인 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내가 여기서 산삼을 보았으니 다른 심마니들은 그 자리에 앉아 있으라'는 뜻이랍니다. 그리고 산삼을 발견한 그 자리에서 처음 발견한 사람이 다 캔 후에라야 다른 심마니도 활동할 수 있는 선점, 독점의 권리입니다. "내가 찜했어, 움직이지 말고 손도 대지마!" 이런 말입니다. 거의 천명天命처럼 나눠가질 수 없을 만큼 귀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부친 가운데 한 분이 법흥리 근처에 사실 때 산에서 뭔가를 보고 캐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한 뿌리 드신 후에 몇 뿌리를 가지고 집으로 내려가셨습니다. 동네 어른께 "이게 뭡니까?" 여쭈었더니, "그거 어디서 났느냐?"고 되물으셨습니다. 그게 산삼이었다는 말씀이죠. 그래서 그분과 함께 다시 그 자리로 가보았습니다. 이상한 것은 캐 낸 흔적은 있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랍니다. 옆에 계시던 부친이 댓거리를 하시면서 하는 말씀이 "거 원래 산삼이 보일 때만 보이고 안 보일 땐 안 보인다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도라지가 아니고, 더덕도 아니고, 인삼도 아니고 장뇌삼도 아니고, 산삼입니다. 아무래도 사람이 산삼을 찾는 게 아니라, 산삼이 자기를 줄 사람을 찾는지도 모릅니다.

  귀한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허망한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없습니다. 경건하지 않은 사람의 인생을 쳐다보는 사람은 복이 없습니다. 죄인의 길을 엿보는 사람도 복이 없습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를 곁눈질하는 사람도 복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기를 즐거워하는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제일 값비싼 복을 보여주기를 원하십니다. "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가운데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3:1).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보다 더욱 귀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산삼은 귀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몸에 아주 좋습니다. 못 먹어봤지만 좋습니다. 다이아몬드 안 가져 봤지만 좋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것은 아주 좋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에게 찾아올 액운도 저주도 없습니다. 이삿날에 날 잡을 필요도 없고, 침대 머리맡에 몇 백만원짜리 부적 액자를 사놓을 필요도 없습니다. 창조의 주님께서 우리 아버지가 되시는 날, 그리고 예수께서 내 주님이 되시는 날 죄의 값이 사라집니다. 허물과 잘못은 많으나 죄값이 치러졌으니, 부정탈 일이 없습니다. 우리 영혼에 깊은 평화가 찾아옵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은혜와 감사가 찾아옵니다. 좋지 않은 일이 생겼어도 주께 하소연할 수 있습니다.

  '내가 우리 조상님께 잘 해드렸어야 하는데... 내가 그때 내게 온 기회를 잡았어야 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원하시는 그 수준높은 순종을 했어야 했는데...예전에는 뜨거웠지만 지금은 잘 안 되는게 하나님께 죄송한데...몸이 열 개인 것처럼 피곤한 줄도 모르고 봉사했었는데...내가 젊은 날 좀더 현명하게 시간을 아끼고 성실했어야 했는데... 말씀은 자꾸 들어오지만 그 말씀을 행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미운데... 내가 겪은 여러 환난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나를 정말로 기뻐하시는지 의심스러운데... 다른 사람에게 말은 못하지만 내 속으로 씻을 수 없는 범죄를 행했는데 어찌... 나는 선을 원하지만 내 속에 악이 있는 것을 어쩔 수가 없어 낙심되는데... 시간이 갈수록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아져가는데... 다 옳은 말이지만 그 말대로 행할 수 있는 힘이 없어서 괴로운데... 나만 실망스러운 것이 아니라 내 주변에 있는 그리스도인도 오십보백보인데... 아, 차라리 하나님께서 내 마음과 내 삶에, 눈에 보이고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도장을 콱 찍어주셨으면 좋겠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얼마나 어렵고 힘든가!' 하고 주저앉아 있을 때, '할례를 받으라!' 그러면 그것이 표다. '부정한 음식을 먹지 말라 그것이 표다' '음행을 하지 말라 그것이 표다' '안식일을 지켜라 그것이 표다' '예수님도 믿고 할례도 받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라'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입니다. 

  그때 사도 바울이 외치는 것입니다. "어리석도다 성도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가운데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갈3:2b) 아니라! 너희가 시작할 때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시작하지 않았느냐 어찌 성령으로 시작해놓고 육체로 마치려고 하느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심은 율법의 행위를 잘 해서가 아니라 듣고 믿었기 때문이며, 너희가 믿은 이후에 겪은 여러가지 하나님의 능력과 응답 또한 율법을 잘 지켜서가 아니라 듣고 믿음으로 그 복을 주신 것이 아니냐. '호랑이 없는 골에 단비가 판을 친다'고 했으니, 단비가 판을 침은 호랑이가 없는 탓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분명하게 보인다면 이런 꾀임에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를 잡아 가두는 옛 허물이 있어 자업자득이려니 하고 체념조로 달려가게 하는 일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우리가 확인할 것은 나  대신 죽으셔서 내 죄 값으신 예수님을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 갚으셨다는 믿음이 있으면 지금 내게 찾아온 어려움은 내 죄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정당한 보응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뜻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뜻입니다. 하지만 내가 주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여전히 거절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죄의 값입니다. 내가 잘못한 값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값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창15:6) 창세기 15장에 아브람을 부르실 때 하나님은 다짜고짜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15:1b)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이 부모님을 잘 섬겼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브람이 자식농사를 잘 지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브람이 큰 그릇될 만한 성품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브람이 족장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브람이 뭔가를 분명히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가지고 있는 선한 것, 좋은 성품 때문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람이 물었습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약속하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아브람이 하늘에 빽빽한 별들을 쳐다본 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5b).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으니 의롭다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약속하실 때 아브람에게 조건을 단 것이 없습니다. 아브람을 저울에 달아보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의 사람 됨됨이를 본 것이 아닙니다. 될성부른 나무의 떡잎을 먼저 조사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무조건적으로 일방적으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루셨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이 믿을 때 의롭다 하심같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죄사함을 믿을 때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성령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에게 행하신 약속을 때가 되어 다 이루심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모두 이루시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들으시고 응답해주십니다. 의지가 나약하고 우유부단해서 스스로 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강하게 하셔서 의지로운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애교가 없어서 문제입니까?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문제가 아닙니다. 적은 애교라도 크게 보이게 하셔서 만족케 하십니다. 잘 웃지 않는 홍명보가 4강에 오르는 페널티킥을 넣고 난 후 웃었습니다. 그 한 번의 웃음이 온 국민을 행복하게 했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공부가 하기 싫고 재미없어서 문제입니까? 소망하기만 한다면 공부의 맛을 보여주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시는 분이 공부의 맛을 보게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힘으로나 능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행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한 새로운 법을 주셨으니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신 것입니다. 이 모든 축복이 '믿을 때' 주어집니다.

   홍수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폐허만 남습니다. 인생의 저주가 휩쓸고 간 자리에도 폐허가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주가 휩쓸려 떠내려 간 자리에는 하나님의 복만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우리를 대신한 저주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너 나 우리, 1인칭 2인칭 3인칭 할 것 없이 우리 각 사람이 받을 저주를 다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대신하여 에누리 없이 받으셨습니다. 어찌 그리스도께서 덮으시고 없다 하시고 다 갚아버린 빚을 다시 들추어낼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없다 하셨으면 없는 것입니다. 누가 있다고 말합니까? 우리 육신일까요 상식일까요 이웃 사촌일까요 마귀일까요?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들을 필요가 없고 들어줄 가치가 없는 말입니다. "누가 너희를 꾀더냐?"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정사들이나 권능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사람을 괴롭히는 돈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롬8:38-39). 하나님께서 없다하시고 갚아 끊어버리신 저주가 어찌 하나님을 대적한단 말입니까. 십자가는 저주와 멸망을 모두 삼키는 하나님의 블랙홀입니다.

  대구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다부동에 치열한 전투가 연일 계속되었습니다. 국군 1사단이 전방을 막았고 바로 뒤에 미군 27연대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마이켈리스 대령이 다급하게 전화를 걸어서 "한국군이 무너졌다.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내려오는 한국군에 실망했다. 계곡 안에서 '이 상황이라면 우리는 철수한다'고 전해왔다. 사령관이 나서서 수습해라. 안 그러면 우리는 계곡을 비우겠다." 그 말은 전해들은 사령관 백선엽은 지프차를 타고 전속력으로 전장에 달려갔습니다. 다부동 입구에 들어섰을 때 '핑~'하는 소리가 나면서 운전병이 쓰러졌습니다. "빨리 위생병에게 가라"고 소리친 후 지프차에서 내려 뛰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이대로 무너질 것인가' 수많은 생각들이 뇌리를 스쳐지나갔습니다. 마지막에 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어머니, 내게 힘을 주셔야 합니다'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내 어머니가 간절히 의지했던 그 종교에 나도 의지하고 싶었다. "이번의 위기에서 구해주신다면 앞으로 열심히 믿겠습니다." 어처구니없는 기도였지만 나는 하늘에 그런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이 위기를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열심히 믿고 따르겠습니다."

  산 중턱 쯤에서 뿔뿔이 흩어져 후퇴하던 대대장과 부대원들을 만났습니다. 먼저 앉힌 후에 "지금까지 정말 잘 싸웠다. 이제 우리는 물러설 곳이 없다. 여기서 밀린다면 우리는 바다에 빠져야 한다. 우리가 밀리면 미군들도 철수한다. 그러면 대한민국은 끝이다. 내가 앞장서겠다. 내가 두려움에 밀려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쏴라. 나를 믿고 앞으로 나가서 싸우자." 그리고 옆구리에 권총을 빼내들고 적들이 넘어오는 산봉우리로 뛰어나갔습니다. 대열의 가장 앞에 섰습니다. 부대원들이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고, 함성소리고 들렸고, 누군가 어깨를 잡으면서 말하기를 "사단장님, 이제 그만 나오세요. 우리가 앞장서겠습니다." 부대원들은 포탄이 넘나드는 그곳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나갔고, 결국 기적적인 승리를 일구어냈습니다. 백선엽의 '사단장 돌격'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지킬 수 있었고, 대반격의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과연 하나님께서 사람을 크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는 분이시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총을 잘 쏠 줄 모르는 장군이었고, 싸움을 잘 하기보다는 기다리기를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사단장 돌격을 할만큼 용장은 아닙니다. 그가 가진 것은 '도저히 물러설 수 없다'는 상황이 닥쳐올 때 생기는 버티기뿐입니다. 그러나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그는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아직 하나님을 알기도 전에, 어머니의 하나님을 부르면서 서원기도와 같은 기도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이런 것입니다.

  6.25전쟁 곧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부터 휴전협상이 진행되었습니다. 한 쪽에서는 전쟁을 하고 한 쪽에서는 협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협상에 임하던 미국측 인사 버크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선에서 전개되는 사건들이 협상 테이블에서 오가는 어떠한 말보다도 훨씬 더 큰 협상결과를 가져왔다." 여러분, 여기 예배드릴 때 선포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누립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삶의 현장에서 누려지고 체험될 때만이 우리가 살고, 예배도 회복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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