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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3일> 오직 은혜로(갈2:11-21) 이정식 2013-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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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청년이 학교 건물 벽에 스프레이로 자기 이름을 휘갈겨 써놓았습니다. 얼마 후에 낙서를 한 청년이 붙잡혔습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대개 법정까지 가지는 않지만, 이 청년은 부모와 변호사와 함께 법정에 섰습니다. 변호사가 말했습니다. "제 의뢰인은 몹시 후회하고 있습니다. 법을 어긴 건 이번이 처음이고 자신이 한 일을 크게 뉘우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거들었습니다. "판사님 학교 건물 벽에 낙서를 지우는 데 드는 비용을 저희가 모두 내겠습니다." 판사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드님이 뉘우치는 것은 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실수를 통해 배워야 합니다. 부모가 낙서를 지우는 비용을 댄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아드님이 돈을 벌어 그 비용을 대는 것도 충분치 않습니다. 이 젊은이가 이번 일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저지른 일을 자기 자신이 직접 원상 복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판사는 이렇게 판결했습니다. "원상 복구가 불가능한 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피고가 낙서를 지울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본 법정은 피고에게 유죄를 선언합니다. 그리고 낙서를 지울 것도 명합니다. 도구와 세제를 사용하여 지울 수는 있지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피고 자신이 직접해야 합니다."

  꼭 필요한 일이라고 판단될 때, 고쳐져야 할 일은 따끔하게 고쳐야 합니다. 책망할 일은 정신차릴 만큼 책망받아야 합니다. 잘못과 범죄에 합당한 형벌은 사람을 적절히 교훈하고 바르게 인도할 수 있습니다. 생활 속에서, 삶 속에서 깨우쳐야 할 모든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방종하게 만드는 일이 될 뿐입니다. 지난 청년부 연합예배 때 김봉덕 전도사님이 2부 레크리에이션 순서를 맡았습니다. 각 팀을 나누고 게임을 진행하는데 선물은 1등 팀에만 있고, 개인별 게임에서도 값진 선물을 소수의 승자에게 주려고 했습니다. 인정이 많은 사람들이나, 혹시 선물을 받지 못해 기분이 상할 것을 염려한 스텝들은 반대를 했습니다. 그때 김 전도사님이 한 말은 "요즈음 청년들은 오히려 고루 주는 것을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잘한 사람은 좋은 선물을 얻고, 못한 사람은 못 얻는 것, 이것을 청년들은 더 좋아합니다." 그 말도 옳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진행했습니다. 그 전도사님이 현대 청년들의 마음을 잘 읽었습니다. 이런 일들에는 은혜보다는 정정당당한 페어플레이가 필요하고 결과에 대하여 깨끗하게 승복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잘한 사람에게 스톡옵션을 주고 먼저 나서는 사람에게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그러나, 오직 은혜로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은혜로만 들어가네 은혜로만 선다네 우리의 노력이 아닌 어린 양의 보혈로 그분의 임재 가운데 오라 하시네 우리를 부르신 그곳 은혜로 들어가네 주님의 그 은혜 범죄한 우리가 어찌 서리요 어린 양의 보혈이 깨끗케 하시네" 우리를 부르신 그곳은 어디입니까 은혜로운 곳 복된 곳입니다. 복의 근원이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복, 하나님의 은혜는 조상을 잘 섬기는 곳에도 없고, 내 노력 속에도 없고, 돈에도 없고, 힘에도 없고, 예쁜 얼굴에도 없고, 단란한 가정에도 없고, 영웅의 가슴에도 없고, 착한 마음에도 없고, 열심히 일하는 성실 속에도 없습니다. 산을 옮길 만한 큰 믿음에도 없고,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하는 장렬한 헌신에도 없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적적인 능력에도 없습니다. 요즈음 문제가 되고 있는, 빅데이터와 같이 엄청난 정보력에 바탕을 둔 정보국 요원들의 판단력에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일한 자가 그 삯을 받는 것처럼, 정당한 댓가를 받는 것일 뿐, 하나님께로 오는 복을 얻지는 못합니다. 노력이 낳는 열매만 거두며, 돈이 미치는 힘만을 누리며, 예쁨이 주는 매력만을 가지며, 단란한 가정이 주는 기쁨만을 가지며, 영웅의 가슴이 갖는 뜻만 가질 뿐입니다. 아주 합리적인 결과만을 얻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대개 불합리합니다. 몇 분만 쉬지 않아도 살 수 없는 공기에 대해 우리는 정당한 댓가를 그 원생산자에게 지불하지 않습니다. 단 3일만 마시지 못해도 온갖 원망을 할만큼 귀중한 물에 대해 우리는 정당한 댓가를 원생산자에게 지불하지 않습니다. 모든 생물이 자라고 모든 생물을 키우는 땅과 빛에 대해서 우리는 그 원생산자에 대해 아무런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지 않습니다. 위대한 모든 것은 합리적이지 않으며, 생명같이 귀중한 것은 합리적인 대우를 받지 못합니다. 내가 나를 살리고 있는 것이 아니니, 내가 살아 있음에 대해서도 댓가를 지불해야 하지만 우리는 지불하지 않습니다. 이 얼마나 비합리적인 태도입니까?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로 온 것인데, 우리가 하나님께 지불하지 않습니다. 전기 사용료나 상하수도 관리비나 생수회사에는 사용료를 지불하지만 원천적으로 주어진 것에 대해서는 지불하지 않습니다. 멀리도 말고 가장 사랑을 많이 주시는 부모님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값을 쳐주지 못합니다. 이 얼마나 불합리합니까? 우리의 모든 합리는 작은 동네 놀이터에서 소꿉장난하듯 행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합리를 찾을 때 합리를 찾고, 은혜를 찾을 때 은혜를 찾을 줄 아는 사람이 됩시다. 하나님의 복,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고 나면,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고 나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너나할것없이 사람은 참 은혜스럽지 못합니다. 본질상 은혜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꾸 딴 생각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을 잠깐 만나고, 안디옥에 있을 때였습니다. 게바라고 하는 베드로가 안디옥에 찾아왔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제자요, 사도 중에 사도요, 가장 변화무쌍하고 극적으로 예수님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는 구원받은 사람이었고, 성령을 받은 사람이었고, 믿음의 큰 일을 행한 '목사'였습니다. 그의 말은 교회에서 큰 권위를 가지고 있었고, 그의 행동은 많은 사람의 본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게바라고 하는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은 이방인과 식사를 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은 할례받은 민족, 깨끗한 민족이고, 이방인은 할례받지 않은 민족이요 부정한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뼛속깊이 유대인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이었던 고넬료를 구원하도록 베드로를 보내려고 했습니다. 주의 사자가 세 번씩이나 광주리 환상을 보여주면서,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는 말씀을 세 번 보여준 후에야 이방인에게 나아갔습니다. 베드로는 이 일을 통해서 이방인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멀리서 야고보가 보낸 유대인들이 오는 것을 볼 때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성경은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갈2:12b)라고 쓰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12사도 가운데 기둥같이 여기는 사도 세 사람이 있는데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고넬료에게 예수 복음을 전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할례자들 곧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하면서 베드로를 비난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그 환상을 말하면서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을 잘 변호했습니다. 아마도 그때 상처(트라우마)가 남아있었던 모양입니다. 베드로가 자리를 피하니까 베드로를 본받던 '남은 유대인들'도 다 베드로처럼 자리를 피했습니다. 사도 바울과 함께 동행하던 바나바도 슬그머니 베드로와 유대인들을 따라했습니다. 바울은 큰일났다고 느꼈습니다.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갈2:13b). 유대교가 믿는 구원의 방법은 할례를 받고, 이방인과 구별되며,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며,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폐하여진 것입니다. 유일하게 있는 구원의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베드로도 바나바도 이 복음 진리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사람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흠없고 점없는 어린 양같은 보배로운 피가 온전치 못한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길을 가면서 누구의 믿음이 더 큰가 하고 키를 재보던 제자들 모습을 다시 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8-9).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더 많은 섬김은 섬길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으로 자랑삼을 수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더 많은 복을 받았다는 것이 누리는 복으로 자랑삼을 수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증표는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하는 모든 일에 복주셔서 흥왕케 했으면 우리 속에 자랑삼을 수 있지만, 그것 역시 하나님께 합당하다는 증표는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만일 다른 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것"이며, 만일 다른 행위로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신 것"이다.

  닉 부이치치는 행복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당신에게 가진 계획을 알 때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이를 모르는 사람은 좋은 날만 기다립니다. 외부에서 올 행복을 기다리면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물질을 모을까 궁리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는 나는 팔다리가 없어도, 상황이 좋지 않아도 소망을 가집니다. 제 존재 자체로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낙담과 좌절 속에서도 내가 있다는 것만으로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이 단 한 가지 사실에 있습니다. 한 사람의 마음에 들게 사는 것도 불가능한 일인데, 하물며 하나님의 마음에 들도록살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고생만 있고, 파멸만 있을 뿐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그런 길에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로 오는 길을 활짝 열어놓으셨습니다. 가로막고 있던 죄를 멸하시고, 죄의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을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14:23).  

  전기는 각종 전등과 에어컨 등의 가전제품과 공장의 기계설비를 움직이는 힘입니다. 그런 전기는 연결될 때 힘을 발휘합니다. 연결되지 않은 전등, 코드를 꽂지 않은 전자제품, 플러그가 빠진 기계설비는 돌아가지 않습니다. 무용지물입니다. 발전소에 예비전력이 수백만 kw가 된다고 하더라고 연결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천둥번개가 5만볼트가 되든 10억볼트가 되든, 연결되지 않으면 땅으로 사라질 뿐입니다. 그러나 연결만 되면 전기는 그 힘을 발휘합니다. 사랑하는 연인끼리 손을 잡으면 찌릿찌릿 전기가 통합니다. 각자가 품 속에 가지고 있는 사랑이 손을 잡을 때 서로에게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표현하지 않으면 느낄 수 없지만, 서로를 향한 사랑이 연결되면 행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믿음으로 우리와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외의 다른 것으로는 도무지 이어질 수 없습니다. 다른 것을 넣는 일은 그만 하나님의 은혜를 막는 일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으면, 엉뚱한 일을 하고 죄가 여전히 있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입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나 교회생활을 잘하는 것으로나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으로 복을 얻기를 구한다면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지킬 것을 지켰을 뿐, 교회 생활을 잘했을 뿐,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을 뿐, 하나님의 은혜를 끌어대지 못합니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합니다.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서 나아가려고 하면 아무리 이루어도 아직 못 이룬 것이 더 많으니 도무지 이룰 수가 없습니다. 자기 만족에만 이를 뿐입니다. 그러나 사지가 없어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나를 덮기 때문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우리 몸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무도 주관할 수 없는, 내 영역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내 몸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몇 가지 일을 잘 해서 회장의 눈에 띨 수 있고 일 잘하는 믿을만한 직원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고속으로 승진할 수도 있습니다. 사장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회사를 통째로 맡기지는 않습니다. 회사를 아예 맡기려면 회장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구원받을 때 한 번 반짝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이런 나' '이렇게 부족한 나' '세상에서도 때로 직장에서도 그렇고 그런 나'를 창조주 하나님께서 당신을 내어주시기까지 하실 만큼 귀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나' '이렇게 멋있는 나' '이렇게 세상에서도 직장에서도 인정받는 나이지만 만족 없는 나, 채울 수 없는 나'를 온몸과 온 마음을 다해 죽으심으로 건지셨다는 사실입니다. '내 아들아' 하며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유일하게 찬양받으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직 높임 받으실 만한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영광과 존귀와도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세상 삶을 살다보면 이 이름의 존귀를 잊어버립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과 은혜로운 약속을 등한히 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거기가 네 문제의 시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돌아서서 다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확인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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