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 하나님말씀 >
<6월 18일> 자유(갈2:1-10) 이정식 2013-06-22
  • 추천 0
  • 댓글 0
  • 조회 127

http://spbbc1.onmam.com/bbs/bbsView/43/118609

  김하중 전주중대사는 무슨 일을 하든지 기도하고 했습니다. 대통령 비서실장을 감당할 때에 대통령께 무슨 보고할 일이 있어도 기도한 후에라야 그 일을 했습니다. 하루는 대통령께 보고하러 들어가서는 기도하지 못했다는 것을 ㄲ닫고 대통령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잊어버린 게 있어서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또한 대통령께서 전에 맺은 인연으로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으니까 약속을 잡으라고 했을 때,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었지만 "이 사람은 대통령께서 만날 만한 인물이 아닙니다." 하며 불가하다고 직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께서 "그래? 알았어"하고는 그 뒤로도 세 번을 더 만날 약속을 잡으라고 언질을 하는 것입니다. 비서실장이면 대통령의 명대로 따르면 될 것인데, 그때마다 안 된다고 퇴짜를 놓았습니다. 그 일이 지나고 하루는 대통령께서 가만히 불러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보게, 자네 참 고맙네, 내가 대통령이 되니까 모든 사람이 내가 하자는 대로 하고 옳다고 하는데, 그게 염려가 되었네 그런데 자네가 안 된다고 하니까 그게 참 믿음직스러웠어." 김하중 대사는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실력을 갖추되 인맥과 학맥과 지연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왕같은 제사장으로 사십시오."

  자유가 무엇입니까?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 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롬 6:20-21)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2-23).

  브릿지(Bridges)라는 학자는 말하기를 사람의 정서는 '흥분'에서 시작하고 생후 3개월이면 '쾌와 불쾌, 흥분'으로 나타나고, 생후 6개월이면 '불쾌'에서 '공포, 혐오' 등이 분화된다고 합니다. 어릴 때는 자기가 최고가 되고,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 즐겁고 기쁜 것입니다. 커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우리 그대로 남아있을 때 그렇습니다. 성경은 이것이 바로 죄의 종일 때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롬6:21) 이 때에는 하나님에 대한 관심도 없고, 하나님을 순종하고자 하는 생각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싶지도 않고 교회에 다니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 때 맺는 열매는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고 나면 '그 때 그 시절'이 그립기만 한 것이 아니라 부끄럽습니다.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우리 자신이 죽었음을 알고 나면 죄에게서 해방됩니다. 그리고 주와 같이 다시 살리심을 받은 것을 알면 하나님을 듣고 하나님을 기뻐하며 하나님께 순종하게 됩니다. 이제 맺는 열매는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요, 영생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자유'는 안 할 자유가 아니라, 죄에게서 벗어나서 하나님께 속하는 자유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날부터 14년 후에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두 번째 방문했습니다. 바나바는 바울의 동역자였고, 디도는 이제 막 구원받고 훈련 중에 있는 헬라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는데 주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 율법에 정한 할례와 제사와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께 나아가던 사람들입니다. 구약성경에 모세를 통해서 전수된 신앙생활이었습니다. 뭐라고 할까요? '부처님도 믿고 예수님도 믿으면 천국천당에 더 잘 갈 것 아닌가' 할 그런 사람들을 생각해 봅니다. 바울은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갈2:4a)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의 주장하는 바는 예수도 믿고 할례도 받아야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꿩 먹고 알 먹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치고 가재잡고 하는 식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갈2:4). 가장 좋은 것, 곧 예수 안에서 가진 자유를 잃어버리는 일이 될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꿩도 못 먹고 알도 못 먹고, 누이도 안 좋고 매부도 안 좋고, 도랑도 못 치고 가재도 못 잡고 한다는 말입니다.

  디도는 헬라인이어서 누가 보아도 할례를 받지 않은 것이 확실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간 것입니다. 그리고 할례도 받아야 한다는 사람들의 말에 한시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갈2:5a) 그 이유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하"(갈2:5b)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의 진리는 믿는 자에게 자유를 준다는 말입니다. 복음의 진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신"(갈1:4) 것입니다. 우리 죄를 대속하셨기 때문에 다시 죄를 위하여 드릴 것도 없고 제사할 것도 없고 종노릇할 것도 없습니다. 죄 때문에 연약함 때문에 연연하여 사로잡히고, 자기를 비하하고 열등감에 빠져서 허우적댈 필요가 없습니다. 확실한 복음을 얻지 못해서, 목사님이 기도하라니까 억지로 기도하다가 힘들어할 일이 없습니다. 전도하라고 하니까 전도해야만 성도로 인정받는 것처럼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배를 우선순위로 놓으라고 하니까 예배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처럼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엇을 행해서 대속을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를 사하여 깨끗하게 하시려는 것은 내 뜻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깨끗하게 하신 것은 내 행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셔서 이루신 것입니다. 완전히 이루셨으니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거기에 다른 것을 보탤 것이 없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자유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는 그 사랑이 일하셔서 이 모든 일을 행하게 합니다.

  기도 안 해도 되는 자유가 아니라 기도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전도 안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니라 전도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대중 가요 부르며 즐기는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니라 찬양하며 기뻐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우리 자신의 생활 때문에 복음을 위한 일을 등한히 할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복음을 위한 일을 더욱 뜨겁게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몸이 아프다고 예배 빠질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있어도 예배드리고야마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예수님이 좋으니까 말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니까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없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사랑하는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요일5:4-5) '세상을 이긴다'고 했습니다. 세상을 열렬히 사랑했던 내가 하나님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그 무엇보다 존귀히 여길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로는 서로 통하고, 맡은 역할은 다른 두 사람입니다.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갈2:7-8). 모든 그리스도인의 만남 속에 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진리를 가진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주되심을 인정하고 예수를 닮아가는 일에 열과 성을 다하는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통하면 맡은 일은 달라도 기쁜 마음으로 '교제의 악수'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한나라당 그리스도인과 민주당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누가 옳은 그리스도인입니까? 당파적으로는 서로 대적하는 관계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축복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모든 것을 이기는 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유의 주요 만주의 주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정치적인 신념보다 뛰어납니다. 그리스도께 복종된 사람들은 당파를 초월하여 축복할 수 있습니다. 서로가 반대되는 견해로 격렬하게 충돌하면서도 저녁에 전화로 친밀감을 표시할 수 있습니다. 세종대왕도 자신의 즉위를 반대했던 인물들을 정승 자리에 올렸습니다. 링컨은 자신의 정적을 장관으로 기용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는 일과 생각은 달라도 교제의 악수를 할 수 있는 이유는 복음의 진리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만났다고 해서 서로 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래 만날수록 서로 다른 점을 더 확실히 깨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 만난 사이라도 오랫동안 알았던 사이처럼 친해질 수 있습니다. 요나단과 다윗의 만남이 그랬습니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용사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무엇보다도 앞세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둘은 이전에 만난 적이 전혀 없습니다. 서로 어린 시절에 함께 한 단짝 친구가 아닙니다.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첫 눈에 알아보았습니다. 요나단이 자기의 병기든 소년과 함께 단 둘이서 블레셋 군대를 치러 갔습니다.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삼상 14:6).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갔습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 17:45)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을 신앙하므로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기록하기를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삼상18:1)고 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산헤립의 침략에 대비하여 성 밖에 있는 샘물의 줄기를 성안으로 끌어 들였습니다. 침공을 하면 성문을 모두 닫아야 하는데 예루살렘 성안의 사람들이 먹는 샘물이 바로 성 밖의 기혼샘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밖의 기혼샘과 성안의 실로암을 연결한 이 터널을 히스기야 터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공사를 시작할 때 기혼샘과 실로암 양쪽에서 서로 파 들어가는 방법을 취했습니다. 533m의 터널을 양쪽 끝에서 뚫기 시작했는데, S자 형태로 된 이 터널은 서로 만났을 때 15cm 정도의 오차밖에 없었습니다. 공사를 시작한 후 약 1.2m 남겨놓았을 때입니다. "3규빗(1.4m)쯤 남았을 때 반대편에서 상대방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터널이 뚫렸을 때 동료를 얼싸안고 도끼를 서로 부딪쳤다. 물은 샘으로부터 1천2백 규빗(5백25m)을 흘러나왔다."고 기록했습니다. 지하 터널의 역사적인 개통을 축하하는 이 글은 현재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통한 사람은 자유를 얻고 복음의 진리를 가진 사람들과 기쁨으로 교제합니다.

  만해 한용운은 '복종'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복종하고 싶은 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신앙의 자유는 오직 하나님께만 복종하고 죄와 세상으로부터는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6월 23일> 오직 은혜로(갈2:11-21) 이정식 2013.06.22 0 115
다음글 <6월 9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갈1:13-24) 이정식 2013.06.09 0 2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