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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9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갈1:13-24) 이정식 2013-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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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 3권 1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속으로 듣고 그의 말씀에서 위로를 받고 있는 영혼은 복 있는 영혼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가느다란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세상의 속삭임에 귀를 멀리 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속에서 가르쳐 주는 진리에 귀를 기울이고 세상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는 귀는 복이 있습니다. 이 바깥 세상 일에는 눈을 감고 내적인 일만을 보려고 하는 눈은 복이 있습니다. 내적인 일에 깊숙이 들어가며 날마다 그 자신이 하늘의 비밀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전적으로 그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려 하고 이 세상의 얽힌 일에서 놓임을 받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러니 아하, 나의 영혼이여, 이렇게 내적인 것이 중요함을 생각하고 감각의 욕망들에는 눈을 감고 멀리 하여, 당신 자신속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부끄러운 과거를 털어놓고 있습니다.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 곧,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였습니다(갈1:13) 스데반이 설교했던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행7:51)이었습니다. "너희(유대인)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너희 조상(유대인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행7:52-53) 바울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간"(행7:54)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을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한 청년의 발 앞에 두"(행7:58)었는데 그 청년이 바로 예수님을 알기 전에 사울 곧,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사울은 그가(스데반)이 죽임당함을 마땅히 여겼습니다(행8:1) 그는 스데반을 향해 무정한 자였고, 무자비한 자였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스데반을 장사하고 크게 울었지만, 사울은 교회를 잔멸하기 위해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겼습니다(행8:2-3). 사울은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습니다. 그는 살인의 무리에 가담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도 바울의 잔인하고 무자비한 모습은 찬송가 <이전에 주님을 내가 몰라>에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주님을 내가 몰라 영광의 주님을 비방했다 지극한 그 은혜 내게 넘쳐 날 불러 주시니 고마워라"(찬송가 통378, 597).

  그가 원래부터 나쁜 사람이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는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요청해서 받을 만큼 자기 일에 대해서만큼은 모든 사람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었고, 옷을 벗어 사울의 발 앞에 놓을 만큼이나 유대교 안에서 확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일에 열정이 있고 성실하고 충성되고 열심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일신과 성공과 안녕을 위해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러나 석학이라고 불리는 이어령 교수가 70평생을 하나님에 대해서 속깊은 곳에서 비판을 했던 것처럼, 유독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독기를 품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많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 믿기 전의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에 대한 적의를 가지며, 예수 믿는 사람을 업신여기는 정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어떠한가요? 하나님은 그런 사람도 구원받고 진리에 이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갈1:16a)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알았지만, 정작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몰랐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을 무수히 읽었지만 성경이 누구를 향해 쓰여진 것인지 몰랐습니다. 또한 이 성경이 자신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몰랐습니다. 몰랐기 때문에 자기 생각에 옳은대로 행동했습니다. 하나님을 멸시하고 교회를 핍박하고 목사를 능욕하고 예수 믿는 사람을 하찮게 여겼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사람 좋은 사람이었고 믿음직스러운 사람이었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무자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악독한 생활의 한복판에 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예수님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네팔에서 선교사역을 하는 이해덕 선교사는 염세주의 문학에 빠져있었습니다. 염세주의 문학이란 인생은 허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의 형이 목회자였고, 자신도 성경을 2번을 읽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교회에 나오라고 권했을 때 하는 말은 "다메섹 길 위에서 빛으로 둘러싸인 바울 사도 같은 경험을 하지 않는 한 나는 절대 예수를 믿을 수 없을 겁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 탓에 늘 더 넓은 세상을 꿈꿨기에 해운회사에 입사하여 7년간 회항선을 탔습니다. 그때 번 돈의 대부분은 가족 생활비와 동생들 학비로 썼습니다. 1983년에 중동건설 붐으로 이라크에 건설근로자로 떠났습니다. 더 이상 배 안에서 인생을 낭비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넓은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오랜 해외생활은 몸과 마음을 지치게 했고, 의미 없는 삶이 싫어 자살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만약 계시다면 절 만나 주십시오. 아니면 전 인생을 끝낼 겁니다." 한 달 동안 아무도 없는 교회에서 매일 1시간씩 새벽기도를 했습니다. 25일 동안 성경을 읽고 기도해도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또 다시 허무함이 밀려왔습니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돌아가 술이나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 속에서 성령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약속했으면서 안 지킬거냐고. 그러다 29일 되는 날, 정말 기적같이 주님께서 만나주셨습니다. 여느 날과 똑같이 새벽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바울처럼 강력한 빛이 두 번 둘러싸더군요. 기쁘고 놀라 눈물이 나왔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염증을 느끼지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염증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입으로는 뭔가 있다고 말을 하고 듣고 배우지만, 실제 생활에서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고 그냥저냥 살아가다보면 신앙생활도 염증이 생깁니다. 그 일이 그 일 같고 오늘이 어제같기만 한 것입니다.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는 분은 자신을 이런 상태로 놔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앙생활의 기쁨을 회복하기 위해서 뭔가를 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새롭게 만날 수 있는 강력한 방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갓 시작한 기도라도 '정말 들으실까 듣지 않으실까' 하면서 하는 믿음의 싸움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우리 생활 속에서, 우리 문제 속에서 맛보게 하는 능력입니다. 기도는 '이대로 계속 갈 수는 없다'는 절박감입니다. 그 절박감이 밀어붙이는 결단이며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속에 나타내시는 일입니다. 누군가 찾기만 하면 그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주님께서 우리 마음 속에, 우리 의심 속에, 우리 적대감 속에, 우리의 무자비함 속에조차 나타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요6:28)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셨습니다(요6:29).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마음을 꽉붙들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포로된 이야기, 우리 속마음이 억눌린 곳, 우리 내심에 예수님을 비방하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요, 가장 하고 싶으신 일입니다. 지금도 행하고 계신 일입니다. 마음이 깨닫지 못하면 아무것도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마지 못해 하는 종교생활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신앙을 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다른 사도들을 만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끼리 인맥을 쌓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인맥을 쌓기 원했다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후 삼  년만에"(갈1:17-18a). 여러분, 우리의 믿음생활이 쿨(cool)한 생활이 되기 원합니다. 어떤 것이 쿨한 믿음이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만일 목사님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전하지 않는다면 목사님을 신뢰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목사님이 성경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전한다면 그 말씀에는 순종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배우려고 할까요 무엇을 얻으려고 할까요, 우리끼리 서로 인정하고 인정받기를 사모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 속으로 크게 외치기를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릅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따릅니다.' 사람의 말을 따르는 사람들은 시시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은 영광스러운 인생이 됩니다.

  바울이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메섹으로 다시 돌아간 후 3년 만에야 게바라 불리는 베드로를 만나러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 안에 굳게 섰을 때 올라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도 오랫동안 머문 것이 아니라 단지 15일 정도 머물렀습니다. 15일 동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은 만나지도 못했습니다. 만나려고 애를 썼다면 왜 못 만났겠습니까. 15일이면 걸어서라도 예루살렘 곳곳을 다 밟을 수 있는 시간입니다. 굳이 애써 만나려고 하지는 않았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설령 하나님께서 사도로 세우신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에게서 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직접 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동료가 있다는 것은 큰 격려가 되는 것입니다. 함께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뜨겁게 포옹할 수 있는 동역자가 있다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도리어 성령께서 자신의 동역자요 위로자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애써 만날 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요, 힘써 교제할 분은 주 예수와 성령님인 것을 바울은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그렇게 살다 보니까 사람들의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바울을 보며 하는 말이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 곧 복음을 지금 전한다"하며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갈1:23-24).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도리어 적개심을 품고 살던 바로 그것을 도리어 선전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을 누가 그렇게 바꿀 수 있겠습니까? 정갑영 연세대 총장이 1만 여 청년이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진 화살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자기 인생의 전부를 드려서라도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기를, 그분을 닮아가기를 소망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영광스럽게 살기 원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모는 자식 잘 되기를 바랍니다. 무슨 대견한 일이라도 하면 고마워서 눈물이 날 정도입니다. 자식이 영광의 자리에 오른다면 부모는 어떤 시름이 있다고 해도 배부를 것입니다. 우리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을 바라기만 한다면, 우리가 어떤 소망보다 예수 만날 소망을 가진다면 주님은 만나주십니다. 그때 우리의 고백은 이렇습니다.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나를 부르셨습니다"(갈1:15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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