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5일> 어린이 신앙(막10:13-16) | 이정식 | 2013-05-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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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어린이를 얼마나 아끼시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욘4:11)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십이만여 명인데 그들이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못살게 군 앗수르 이방인의 자녀들입니다. 이방인의 자녀들이었어도 하나님께서 회개를 통해 진노를 거두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잔뜩 기분이 나빠 있는 선지자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심정을 드러내시기를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면, 어린이의 신앙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어린이를 안고 그들 위에 손을 얹으시고 축복하신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15절에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받드는 태도"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어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아버지와 아버지의 권위로 다스려지는 가정 안에 내가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듯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그저 인정하는 순전한 믿음입니다. '받든다'는 말은 '봉사한다'(serve)가 아니라 '받아들인다'(receive)라는 말입니다. 어린아이는 제 부모와 함께 있을 때 가장 편안함을 느낍니다. 안정감을 느낍니다. 다른 사람의 품에는 익숙해지기 전에는 불안하고 불편합니다. 벌써 몸이 직감적으로 그것을 알게 됩니다. 아이가 재롱을 부리는 것도 안정감과 평안함이 있기 때문에 자기를 자유롭게 발휘하는 것입니다. 밖에 나가 놀더라도 어둑어둑해져서 집으로 돌아올 때가 되면 돌아오는 것이 정상입니다. 돌아오지 못하거나 부모가 찾으러 오지 않으면 그때부터는 우는 것이 정상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가 이렇게 편안하고 안정감있게 느껴지고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불편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마치 자기 소망을 이루지 못하도록 할 것같다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참되신 분이어서 우리의 것을 빼앗으려 하는 분이 아니라,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합니다. 죄를 회개하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 좋은 줄 어린아이가 직감하듯이 하나님 좋은 줄 압니다. 하나님이 제 아버지가 아니요,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데 어떻게 하나님이 편안하겠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사랑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겠습니까? 노방전도로, 읽어주는 전도를 통해서 구원받은 사람이 18명입니다. 이 가운데 90% 이상이 초등학교 학생들입니다. 죄인이라고 말씀하신 기록에 '네, 맞습니다.' 죄가 있으면 심판이 있다는 말씀에 '네', 그 죄를 예수님께서 대신 상하시고 맞으셔서 우리를 낫게 하셨다는 말씀에 '네', 죄 중에 죄인 예수 믿지 않은 죄를 떠나 회개하고 돌이켜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씀에 '구원받고 싶어요' 이렇게 나아갑니다. 머리가 커져 갈수록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하면 벌써 얼굴이 뭉그러지기 시작합니다. 거기서 스톱! '예수님이 우리 죄를 십자가에 다 지셔서 회개하고 믿기만 하면 그 순간 구원받습니다' '거짓말같이 그 짧은 시간에 정말?' 하며 다시 옛날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었어도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가 하면 어른이 되어서 어른으로 살지만, 하나님 앞에서 당연히 어린아이가 되는 사람입니다.이 시간에 특별히 주일학교 사역에 힘쓰시는 선생님들을 축복하기 원합니다. 그리고 'InJesus 꿈꾸는 주일학교' 프로그램으로 영유아반을 섬기는 사모님도 축복합니다. 정말 귀한 사역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빙 둘러섰고 어린아이는 예수님의 품에 있었습니다. 어린아이에 대해서는 그 아이를 안고 손을 얹으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아이를 축복하셨습니다. 오늘 행할 헌아식도 아이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 그렇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아이를 안고 그의 장래와 인생을 위해서 축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를 원하면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그의 사는 날 동안 순전함으로 받도록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제자들을 향해서 뭔가를 말씀하시기 원하셨기 때문에 행하신 일입니다. 제자들은 어른들입니다. 여기 어린아이도 나중에 자라면 어른들이 될 것입니다. 그 어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받드는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를 축복하셨습니다. 머리도 굵고 다 자란 어른이 어른 노릇에 익숙해진, 아니 마땅히 어른이 되어야 할 사람이 어떻게 다시 어린아이처럼 살 수가 있습니까?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51:5-7) 거듭나면 됩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면 됩니다. 다시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순전함으로 받들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구원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그때 비로소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정하신 죄 아래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을 떠난 죄를 회개하고 돌이킬 때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다 큰 어른이 엄마 젖을 다시 먹을 수 있습니까? 언젠가 tv에서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는데 여전히 엄마 젖을 먹는 어린이가 있었습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다 자란 어른이 어떻게 엄마 품에서 엄마 젖을 먹고 자라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2) 다 자란 어른이 되어서도 부모 말만 듣고 산다면 그것은 마마보이입니다. 자기 스스로 독립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연히 독립해야 합니다. 한 달쯤 전 오전에 차량운행을 하면서 보라와 시온이를 태워왔습니다. 아주 기쁘게 맞이해주니까 정겹고 뿌듯합니다. 차에서 내려서 시온이를 현관문에까지 안고 왔는데, 느닷없이 울어제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 사랑으로 안아서 데리고 왔는데 울어대는 것입니다. 알고보니까 '이쒸~내가 혼자 걸어서 현관문에까지 갈 건데 이쒸~ 목사님이 내가 걷지 못하도록 했어요 이쒸~' 하는 항의였습니다. 벌써 다 컸어요. 혼자서도 잘할 수 있다는 거죠. 대견스럽죠. 그런데 '혼자서도 잘해요'를 하나님께 대해서도 한다면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하나님께 대해서도 당신 말 듣기 싫어요 나 혼자서도 잘해요 그 말은 '나 내 육신의 뜻대로 살겁니다. 나 마귀의 자녀입니다. 나 혼자서도 잘하다가 영원히 멸망할 것입니다'하는 말과 똑같습니다. 길과 진리요 생명되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아니라면,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자라지 않는다면, 길이 아닌 데로 가겠다, 진리가 아닌 곳으로 걷겠다, 죽음의 길로 가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10:27)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뺴앗을 자가 없"(요10:28)기 때문입니다. 육신으로 사는 것은 부모를 떠나 독립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독립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멸망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아니하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막10:15b). 주께서 '결단코'(never)라고 말씀하심은 아주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변명도 핑계도 댈 여지가 없을 만큼 '결코'라는 뜻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동등되시면서도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 나와 하나님은 하나이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 내가 곧 그라 말씀하셨던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분에게 듣지 않고는 아무것도 행하지 않으신 이 사실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5월 가정의 달에 어떤 가정이 되어야 마땅하겠습니까? 아버지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어린아이와 같고, 어머니도 참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어린아이와 같고, 그 자녀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어린아이와 같고, 그 손주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드는 가정. 이 가정이야말로 하나님의 가정이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가정입니다. 소년 가브로슈는 부모에게서 버려져 거리의 아이들로 자라났습니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매일 밤 천둥과 비를 피할 수 있는 잠자리를 구하기 위해, 살기 위해 살아갑니다. 그런 소년에게도 자비심이 있어서 배다른 형제들을 알지 못한 채로 자기 처소로 데려와 먹이기도 하고 재워주기도 합니다. 천하의 악동처럼 자라났어도 그 마음 한 구석에 자비의 마음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또 의로운 분노가 있어서 첩자를 잡고 또 안팎의 소식을 전하는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두려움과 위협도 모르는 듯이 전장의 앞에 나섰습니다. 마지막 총탄에 쓰러질 때 함께 레미제라블을 보던 지금 주일학교 6학년 학생들의 눈에 뜨거운 눈물와 충격이 있었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자비심이 있고, 충성심이 있고, 사랑이 있고, 의로운 분노가 있습니다. 그래도 가브로슈는 거듭나야 했습니다. 버려진 아이로 자랐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 온전히 안겨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저항의 아이로만 아니라, 은혜와 자비의 아이로 자랐을 것입니다. 1957년 5월에 공포되고 1988년 5월 5일에 개정된 어린이헌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어린이가 차별없이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니고 겨레의 앞날을 이어나갈 새사람으로 존중되며 바르고 아름답고 씩씩하게 자라도록 함을 지표로 삼고, 1.어린이는 건전하게 태어나 따뜻한 가정에서 사랑 속에 자라야 하며, 가정이 없는 어린이에게는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알맞은 환경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2.어린이는 몸과 마음이 튼튼하게 자라도록 균형있는 영양을 취하고, 질병의 예방과 치료를 받으며 공해없는 따뜻한 환경에서 살아야 한다. 3.어린이는 누구나 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하고, 어린이를 위한 좋은 교육시설이 마련되어야 하며, 개인의 능력과 소질에 따라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4.어린이는 빛나는 우리 문화를 이어받아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 발전시키도록 이끌어야 한다. 5.어린이는 즐겁고 유익한 놀이와 오락을 위한 시설과 환경을 제공받아야 한다. 6.어린이는 예절과 질서를 지키며 서로 돕고 스스로 책임을 다하는 민주시민으로 길러야 한다. 7.어린이는 자연과 예술을 사랑하고 과학을 탐구하는 마음과 태도를 길러야 한다. 8.어린이는 위험으로부터 먼저 보호되어야 하고 안전을 지킬 수 있는 지도를 받아야 한다. 9.어린이는 학대를 받거나 버림을 당해서는 안되고 나쁜 일과 짐이 되는 노동에 이용되지 말아야 하며, 해로운 사회 환경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 10.몸이나 마음에 장애를 가진 어린이는 필요한 교육과 치료를 받아야 하고, 빗나간 어린이는 선도되어야 한다. 11.어린이는 우리의 내일이며 소망이다. 겨레의 앞날을 짊어질 한국인으로 인류의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 세계인으로 키워야 한다."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이 모든 것 이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받드는 어린이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 인류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 세계인이 되기 전에, 십자가로 하나님과 세상을 화목케 하신 주 예수의 사랑을 아는 세계인이 되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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