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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8일> 참된 사람 정신 차린 사람(행25장-26장) 이정식 2013-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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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bbc1.onmam.com/bbs/bbsView/43/118604

  클래식라디오 방송에서 한 아나운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분노하는 사람,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을 위해 뭔가를 하지 않고는 배겨내지 못하며, 분노하는 사람도 그 분노를 쏟아붓기 위해 뭔가를 하지 않고는 배겨내지 못합니다. 곧 이 두 사람은 가만히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맞습니다. 누군지 몰라도 참 통찰력 있는 관찰입니다. 사람의 소망은 진실한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무료하지 않습니다. 권태롭지 않습니다. 억지로 하지 않습니다. 인천에서 의정부까지 왕복 4시간을 달려도, 주말에 서울 부산을 왕복해도 피곤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위해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 됩니다. 그런데 선한 일을 이렇게 연인 사랑하듯 사랑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2년이 지나고 총독이 벨릭스에서 베스도로 바뀌었습니다. 유대인은 여전히 호시탐탐 바울을 해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습니다.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더라"(행25:3) 하지만 아무리 고소하려고 해도 증거가 없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하되 능히 증거를 대지 못한지라"(행25:7). 왜 그런고 하니 바울에게는 그들이 정죄할 만한 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변명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행25:8). 바울은 유대인의 율법을 지켰습니다. 성전의 거룩함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로마 황제에게도 로마법에도 죄를 범한 일이 없습니다. 성도의 행실은 이런 것입니다. 세상 법에 비추어 고소당할 만한 일이없어야 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위하는 사람이면 그렇습니다. 아무 위한 것이 없이 교회 생활을 한다면 모를까 '주 예수와 복음을 위한다면!' 그렇습니다. 유대인에게 의지했다가는 제대로 된 재판을 받을 수 없을 줄 안 바울은 최고법정인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직접 상소를 했습니다. 가이사의 재판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아무도 바울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바울 혼자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총독 베스도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행25:19).

  SBS 4월 17일자 기사의 내용입니다. 글로벌 컨설팅 회사 매킨지의 한국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중산층의 절반 이상이 지나친 교육비와 가계 빚 때문에 적자 가구로 전락했고, 빈곤층으로 추락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 중산층 가구 비중은 1990년 75.4%에서 지난 2010년 기준으로 7.9%가 줄어들었습니다. 중산층 중에서도 수입보다 지출이 많은 적자가구도 54.8%로 절반 이상이나 됩니다. 안정된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소득은 제자리이거나 줄고 있는데, 자녀들을 위해 쓰는 사교육비와 아파트를 장만하면서 생긴 주택담보대출 때문에 가계 빚이 늘면서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입니다. 번듯한 대기업을 다니는 사람들이라도 노후 준비를 제대로 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고, 자영업이나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상당한 부를 축적했거나 부모로부터 물려받을 재산이 있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매달 매달 생활비도 빠듯하거나 부족합니다. 가끔 사석에서 "늙으면 어떡할래?"라고 물으면 다들 "어떻게 되겠지!"하는 막연한 낙관을 소망처럼 붙들거나 때로는 잊어버리려 애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50대들의 자화상을 그리며 서울대 송호근 교수는 <그들은 소리내 울지 않는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참으로 이런 문제들이야말로 얘깃거리와 화젯거리가 될텐데, 예수가 죽은 것을 살아있다고 하는 주장으로 고소하고 고소당하고 죽이려하고 변명하려고 하는 것을 보니 총독 베스도가 기가 막혔습니다. "내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는지 몰라서"(행25:20) 맨붕이 온 것입니다. 그래서 더 상위 법원에다가 이 문제를 의뢰하는 것인데, 그 상위 법정이 아그립바 왕의 법정입니다.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행25:23) 아마도 아그립바는 왕이 입는 자주색 예복을 입고 이마에 금으로 된 머리띠 모양의 왕관을 썼을 것이고, 그 신하들은 우리나라로 하면 정일품에서 종구품에 이르기까지 모두 대동하여 근엄과 위엄이 가득한 모습으로 등장했을 것입니다. '나의 명예와 지위는 여기까지다!'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베스도의 명으로 데려온 바울은 어떻습니까? 바울은 왕관도 없었고 왕의 예복도 없이, 다만 수갑을 차고 장발장처럼 24601 번호표를 단 죄수용 웃옷을 입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전승에 따르면 키가 작고 대머리였으며 눈썹은 짙었고 코는 구부러졌고 다리는 휘었다고 하니 볼품이 없는 몰골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보고 생각하기에 '저 사람은 영락없는 죄인이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끝난 게임일 것같은 분위기에서 바울은 조용하고도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기품과 자부심을 가지고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힘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 가지 세상의 3종세트를 쫓아 살아갑니다. 보통 우리는 아무렇게나 목적도 방향도 없이 되는대로 살다가 이 세 가지를 쫓아 마음을 정하게 되는 것을 '철들었다'고 합니다. '정신 차렸다'고 합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는데 바울은 명예와 권력에 대한 탐욕이 있었습니다.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생인의 생활을 하였다"(행26:5) 가장 엄한 파에서 가장 엄격한 종교생활을 해내는 것은 다른 종교인들에게 인정받는 길입니다. '경건하다, 거룩하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나도 당신들처럼, 벨릭스 총독, 베스도 총독, 아그립바 왕 당신들처럼 똑같이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열심히 반대할수록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생에 도움이 안되는 예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죽일 때에 찬성 투표를 던졌습니다. 나도 당신들처럼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예수를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해서 배교하게 하고, 분노가 극에 치달아 외국에까지 가서 박해를 했습니다(행26:9-11 참조).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분노에 휩싸인 자는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분노를 쏟아붓기 위해 무슨 일이든지 행하고 맙니다. 살기가 등등하도록 말입니다.

  그러나, 내가 한창 그렇게 열심을 내고 있을 때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비추는지라"(행26:13). 사도 바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였습니다. 세상 소식과 세상이 추구하는 것을 쫓아 살던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해는 대낮같이 밝았는데, 그보다 더 밝은 빛이 찾아왔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26:14b) 사도 바울도 전에 그랬고 우리고 그랬습니다. 예수 믿지 않고 사는 것이 예수 하나님의 아들을 박해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또한 내 영혼이 고생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열심히 살려고 했을 뿐 내 영혼이 울고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잘 아시는 하나님은 아십니다. 바로 그런 삶이, 돈과 명예와 권력과 성취를 쫓아 달려가는 그 삶이 바로 네 영혼이 고생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살수록, 힘을 낼수록 더 가시채에 찔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26:15)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박해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님을 박해하지는 않을지라도 예수님을 무시하기는 쉽습니다. 이제 내가 너를 찾아온 이유는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행26:17-18). 이것이 바로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들의 삶의 목적이요,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어둠에서 나오라. 사탄의 권세에서 돌아오라. 죄사함을 입으라. 하나님의 기업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길을 지도하는 수많은 스승들이 있고 수많은 가르침이 있지만,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것은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행26:19) 하늘에서 보이신 것입니다. 영원히 썩지 않을 하늘에서, 영원한 생명의 하늘에서, 오직 하나님의 권위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할 일 곧 우리의 할 일은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는(행26:20) 일입니다.

  이 모든 말씀, 이 모든 성경 말씀, 이 모든 바울의 주장의 근거가 무엇인가 하면, 오직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난"(행26:23) 일입니다. 모든 말씀과 모든 축복과 저주가 반석되신 그리스도 위에 서 있습니다. 바울은 사도행전에서 자기 구원간증과 신앙간증을 4-5번 계속 반복합니다. 자기 변화된 믿음, 충성된 믿음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계속 반복합니다. 이 믿음은 모든 사람에게 주시기 원하시는 믿음인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라. 그 속에서 돈과 명예와 권력은 쓰러지고, 죽음도 쓰러지고 멸망합니다. 그 외에 다른 기초를 놓을 것이 없습니다. 그 밖의 모든 다른 기초는 썩어질 것이요 무너진 것이요 이미 멸망된 것입니다. 2천년 전의 십자가가 이미 그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베스도가 바울에게 말하기를 "바울아 네가 미쳤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행26:24)했습니다. 여전히 그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바울이 이 말을 받아 베스도에게 다시 항변하기를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행26:25)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내가 정신차린 사람이요 베스도 당신이 미친 것이오'라는 것입니다. 이미 멸망된 것을 총독 벨릭스도 여전히 쫓아가고 있고, 새로 온 총독 베스도도 쫓아가고 있으며, 아그립바 왕도 역시 십자가로 멸하신 것을 쫓아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시 얼굴을 돌려 아그립바 왕에게 향하여 말하기를 "이 일은 한 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행26:26b) 하며 선지자들도 끊임없이 말해온 것입니다. 밝히 말하였습니다. 맞습니다. 복음의 일은 한쪽 구석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주일에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저 먼 나라 구석 나라에서 행해진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온 천하 모든 세계 모든 민족 모든 사람 위에 선포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제 '빈 방 있습니까' 공연을 보았습니다. 시내에 나가면 노래방도 있고 PC방도 있고 각종 방도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마치 종교방처럼 일주일에 한 번 다녀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다. 노래방, PC방처럼 어느 곳에 가야 있는 방이 아닌, 각 사람의 마음에 예수님방이 정중앙에 자리하도록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여기 개역개정 성경에 고상한 오류가 있습니다. 그것은 번역할 때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에서 '온전한'이라는 번역을 한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reasonable'(온당한)이라는 번역어를 선택했는데, 개역한글에서는 '정신 차린'이라는 번역어를 썼습니다. 개역한글이 더 정확한 번역이라고 믿습니다. '미친 것'은 '정신 차린'것과 확실한 대비가 됩니다. '온전한'은 주로 영어 단어 'perfect'의 번역어요 헬라어 '텔레이오이'의 번역어인데, 이렇게 번역하는 것은 바울의 이전 삶과 예수 만난 이후의 삶을 '온전히' 대비시켜 주지 못합니다.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이 구원받기 전의 삶과 구원받은 이후의 그 불연속적인 삶을 제대로 표현해내지 못합니다. 로고스 바이블에는 헬라어 '소프로쉬네스'에 'of good sense'라는 번역어를 주고 있습니다. 미친 인생과 정신 차린 인생은 그 단어의 목소리나 빛깔에 걸맞는 상대어입니다. 우리는 알고 돌이켜야겠습니다. 미친 인생을 살 것인가 정신 차린 인생을 살 것인가.

  아그립바 왕이 말을 듣다가 마음에 감동함이 있었을 터이지만, 짐짓 체면을 의지하여 "(바울아)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행26:28)이라고 하며 공을 넘기려 하니, 바울은 "말이 많으나 적으나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행26:29) 하면서 그 확신을 나타냈습니다. 바울의 확신은 조금도 물러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확신은 자기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 벨릭스 총독이나 베스도 총독이나 아그립바 왕이나 로마 황제 가이사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초대교회 성도나 현대 교회의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이렇게 수갑에 채워져 죄인처럼 된 것 외에의 모든 확신, 모든 헌신, 모든 사랑, 모든 신앙이 각 사람에게 그대로 전수되기를 원하노라. 왜냐하면 그 믿음이 예수께서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실 때 선물하기 원하신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알기 전에 우리는 매어있는 것이 다릅니다. 어둠에 있을 때에 우리는 경제와 삶에 매입니다. 거기에 매여있으니 모든 근심도 그 속에서 나오고, 모든 자랑도 그 안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행26:18)고 하시면서, 주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그 은혜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은혜를 알기 전에 사람들이 경악하는 것은 삶의 희망이 없어서 경악하지만, 은혜를 안 사람들이 자기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는 것에 경악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갑니다. 세상에 사랑이 없다고 노래하던 사람이 이미 충만하신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사랑 속에서 만족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은 눈을 들어 하늘을 볼 줄 압니다. 이런 사람은 사랑은 없고, 문제만 있는 세상을 보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10) '아, 그렇다. 사랑 없는 세상에 사랑이 이미 충만하였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충만하구나.' 하고 거기서 삶을 시작합니다. 그 은혜 위에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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