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 하나님말씀 >
<4월 21일> 예수 중심中心(행24:1-27) 이정식 2013-04-23
  • 추천 0
  • 댓글 0
  • 조회 141

http://spbbc1.onmam.com/bbs/bbsView/43/118603

  2002년 중국에 사스(SARS)가 퍼졌을 때 주중대사는 김하중 씨였습니다. 사스가 와서 교민철수 명령을 내려야 하나 고민할 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교민 철수 명령을 내릴까요?' '철수하지 마라' 다시 기도했습니다. '교민들 모두가 불안해 하며 철수지침이 내리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이 땅에 있는 너희 국민 어느 누구도 그 병에 걸리지 않도록 할 것이니, 너희들은 이 땅을 떠나지 말라.' 사스에 걸린 한국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덕에 김치 한류가 불었고, 별다른 요동없이 담대하게 지냈던 김하중 주중대사는 중국 정부와 중국인들을 감동시켰습니다. 2010년 그의 간증과 삶이 <하나님의 대사>라는 제목으로 3권이 출간되었습니다. 출간된 지 2년만에 초판 175쇄가 판매될 만큼 믿는 사람들이 애독했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다른 부분이 많지만, 작은 일부터 큰 일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은 잘 배우고 싶습니다. '교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감' 수준입니다. 애굽의 총리 요셉처럼, 바벨론 포로기의 다니엘처럼, 메대 바사 시대의 에스더 왕비처럼, 성벽을 재건한 느헤미야처럼, 자기 직업 속에서 하나님께 묻고 응답받은 기록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통일부장관까지 지낸 그가 처음부터 신앙을 가졌던 것은 아닙니다. 평생 신실했던 어머니의 기도, 믿지 않은 아내가 먼저 하나님을 만난 사건, 그리고 자기 딸의 금식 기도를 거쳐서 어렵사리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베이징대학 2학년이던 딸의 금식기도로 '한 번만' 교회에 가겠다고 약속한 그 약속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교회에 발을 끊어버린 그였는데, 오랜만에 참석한 예배 찬양에 마음이 평안해졌고, 목사님의 설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의 마음을 찔렀습니다. '내가 정말 죄인이구나. 그런데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에게 이런 복을 주시다니... 감사하다!' 그러면서 '아! 이제는 진짜 하나님을 믿어야 되겠구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앞으로 내가 하고싶은 일(곧 외교관)을 하려면 술도 마시고, 거짓말도 해야 하는데 하나님을 믿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것 아닌가, 내 꿈을 이루지 못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의 중요한 고백이 무엇인가 하면 '그러나 이미 교회에 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내 마음에 크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죄찔린 경험이 있는 사람 중심에 예수 중심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그는 결국 술 안 마시고도 대사 노릇을 잘 감당했고, 거짓말 하지 않고 참말만 하고도 중국과 한국 정부 모두에서 칭찬을 받았으며, 하나님을 믿어 아무것도 못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할 수 있었고, 자기 꿈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중심이 무너진다.'는 말은 보통 때같으면 좋지 않은 말입니다. 씨름과 같이 1대 1로 하는 경기에서는 중심이 서 있느냐 중심이 무너지느냐가 중요합니다. 중심을 무너뜨리면 반드시 이깁니다. 그와 반대로 중심이 무너지면 반드시 집니다. 팀 경기에서도 투수나 타자가 중심이 무너지면 집니다. 축구에서도 슛이 자꾸 뜨는 이유는 중심이 무너진 자세로 차기 때문입니다. 경기의 분위기도 결국 선수 개개인의 중심이 서 있느냐 무너지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그런데 중심이 무너지는 것이 좋은 경우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두 남녀 간에는 각자의 중심이 흔들리고 두 사람 사이에 새로운 중심이 세워지는 것이 좋습니다. '내가 왜 이러지 자존심 상하게' 하면서도 끌려갑니다. 하나님 앞에선 사람은 그 중심이 깨어지고 쪼개어집니다. 그 자리에 예수께서 중심이 되시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죄인을 의인삼으시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욕된 인생이 영광스러운 인생으로 변화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사도행전 24장 14절에서 21절까지 말씀 속에는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전에는 예수 믿는 사람을 핀잔을 주고 멸시했던 사도 바울이 주 예수를 만난 후에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예수님의 도 곧 십자가의 도를 말합니다.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유대인들처럼 같은 하나님을 섬깁니다. 어떻게 섬기는가 하면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구약에 기록된 말씀을 하나님 말씀으로 다 믿습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유대인들이 메시야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처럼 사도 바울도 기다립니다.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이 하나님께 향한 소망이 무엇인가 하면 의인과 악인이 부활하여 심판주 앞에 서게 되리라는 소망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바로 부활 후에 우리의 선악간의 행실을 낱낱이 심판하실 하나님을 믿으니, 양심에 거리낌이 없게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삶의 원칙입니다. 더욱 분명한 사도 바울의 믿음이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행24:24)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래 되었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을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였음이니이다"(사64:5b-7) 자연인으로서 우리의 선함도 올바름도 다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 날 때부터 검은 까마귀가 흰 백로가 되려면 분칠을 잔뜩 하는 수밖에 없지만, 그것도 몇 분 가지 못해 날갯짓 한 번에 흰 분이 다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믿음과 바울의 믿음이 다 똑같은데, 오직 '죽은 자의 부활'(행24:21)에 대해서만 다릅니다. 유대인이나 세상 모든 사람이 잘못된 것은 죄에 대해서 죽지 않고 의롭게 되려고 하는 데 있습니다. 검은 까마귀가 흰 백로가 되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첫 출생은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두 번째 출생이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 있고, 그 능력이 우리 것이 되는 것은 그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는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예수 중심이 견고히 섰습니다. 언제부터냐 하면 예수님을 영접한 그 순간에 이미 견고했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의 사람 사도 바울을 고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장로, 변호사 더둘로입니다. 바울이 가 있는 곳에 쫓아 와서는 고소를 하는데, 그 고소의 본 내용은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행 24:5-6)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고소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입니다. 대제사장입니다. 장로들입니다. 엘리트 변호사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고소하고 있습니다. '전염병같은 자' 영어 성경을 보니까 troublemaker, 곧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속을 뒤집어 놓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곧 예수 그리스도가 이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없으면, 사도 바울만 없으면, 믿음 좋다고 존경을 받으며 살텐데 예수님 이름을 들으면,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들으면 영락없이 죄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한 분 모친이 춘삼월 꽃피는 4월만 되면 감회에 잠깁니다. 하나 뿐인 딸, 애지중지하던 딸을 시집보내 놓고 억지로 마음을 다잡고 있는데, 3-4월 온 땅에 푸릇푸릇한 기운이 쏫아오는 것을 보고 그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그날부로 교회로 달려갔습니다. 그 딸을 보고 싶다고 볼 수 없고, 그리워해도 어찌 할 방도가 없으니 하나님 한 분께 모든 것을 맡기려고, 그 심사를 다 고백하려고, 누가 전도하는 것도 아닌데, 누가 오라고 초대한 것도 아닌데, 그 마음에 불이 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마음에 불이 나려면 이렇게 나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분란이 일어나려면 이렇게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내 주님을 듣고도 하나님의 사랑에 굴복되지 않은 이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 마음을 주체할 수 없기는 매한가지지만 죄악의 불이 붙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해서라도 자신들이 옳다 인정받으려 했던 그들이, 오늘 사도 바울을 고소해서라도 자신들이 신앙을 뽐내고 싶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진리가 중심에 서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이 사람들과 같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믿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을 고소할 것이라고 성경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영혼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그러나 믿는 자들에 관해서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21:6-7).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의 특징은 대부분 세상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이런 믿음은 불교에도 있고 유대교에도 있고 이슬람교에도 있고 힌두교에도 있고 심청이에게도 있고 춘향이에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말하는 자신이 죄악 중에 잉태되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죄악을 깨끗이 씻을 길을 알지 못합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나 헛된 소망을 가지며, 이 사람들은 율법과 선지자의 글들을 다 지킨다고 하지만 지키지 않고 증거도 없이 고발하고 있으며, 이 사람들은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믿는다고 하지만, 심판이 있음을 믿지 않으며 이 사람들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지 않고 신앙의 껍데기만을 잔뜩 쌓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모든 행위가 헛될 뿐만 아니라 항상 악할 뿐임을 주님은 아십니다. 사도 바울도 주를 몰랐을 때 그들처럼 살았습니다. 변호사 더둘로가 고소하기를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미웠으면 없는 사실도 만들고 보지도 않은 사실을 있는 것처럼 꾸밀까요? 그것도 엘리트라고 하는 변호사님께서. 바울은 성전을 더럽힌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되기를 원하십니다. 부패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성전 삼으십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저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히지 않게 하는 율법에 매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더럽히지 말라는 것이 성전을 위하심이겠습니까. 우리 자신을 깨끗케 하시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전도할 때 그 사람이 교회를 다닌다고 해도 구원의 확신, 천국 갈 확신을 한 번 더 물어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헛다니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아주 큰 교회에 다니는 한 분 아주머니가 저를 '개척교회' 목사라 생각하고 운동기구를 잡고 손발을 놀리면서 하는 말이 '성도가 한 500명은 되어야 교회 운영이 되지요' 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저는 척 하고 알아먹습니다. 여러분도 알겠지요? 그 말이 아주 그릇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벌써 그런 말을 하는 중심이 어디에 있나, 그 중심에 예수 있나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래도 계속해서 <복음이 마음에 이루어지는 구원> 책자를 읽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을 믿고 천국하는 거 다 알죠. 믿죠"' 하는데 얼굴이 언짢아요. 다 아는 얘기를 떠든다고 팽하니 들어가셨습니다. 아, 또 한 번 알아먹는 것입니다. 교육만 끝내주게 받았구나. 마음에는 없는데 마음은 텅 비어있는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기만 했구나. 스트레스를 너무 심하게 받아도 골치가 아프고 때로는 이빨도 아픕니다. 정신이 아파도 몸이 아는데,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 앞에서 어찌 심드렁할 수 있습니까? 자기가 죄인된 것과 예수를 주로 영접하면서도 무정한 사람은 그 신앙 생활도 무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죽으심 속에 회개가 없고 예수 그리스도 부활 속에 기쁨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심판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믿고 따를 신랑이 없는데도 장만해 놓은 세간살이만 보고 만족할 신부가 있습니까. 구원의 주님이 없는데 영생의 주님이 없는데 기쁨이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또 한 명의 안타까운 사람은 총독 벨릭스입니다. 재판장인 벨릭스 총독이 들어보아도 바울에게 뚜렷한 혐의가 없고 징벌을 할 만한 일이 없었습니다. 총독의 아내가 있었는데 아마도 예수 믿는 도라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는 모양입니다. 공개적인 재판이 끝나고 개인적으로 바울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들으려고 했습니다. 바울이 가서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에 대해서 강론했습니다. 죄와 죄의 형벌에 대해서 전도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벨릭스가 그 말을 듣고 두려웠고, 더 많은 말을 감당하지 못하겠으니까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했습니다. 분명 은혜를 받았습니다. 복음의 문이 다 열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동시에' 생각하고 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마음이 함께 있었습니다. '재판을 잘 봐줄테니까 내가 주권자니까 내가 재판관이니까 네가 뇌물을 주면 선처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 이런 심사였던 것입니다. 벨릭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두려워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돈을 받으려고 한 잇속도 그의 솔직한 마음이었습니다. 성경에는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두려우심에서도 벗어나고, 또 '동시에' 잇속까지 챙길 마음이 있는 한 하나님은 일하시지 않습니다. 벨릭스는 사도 바울에게 자주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들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벨릭스의 옥에 갇힌 바울이 2년씩이나 그 일을 계속했어도 아무 소득이 없었습니다. 주 예수도 얻지 못하고, 바라던 돈도 얻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이 욕심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시간 차이도 없이 간격도 없이 동시에  둘 다를 거머쥐려 했으니 말입니다. 심판대 앞에 설 사람이 심판장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김하중 대사가 신앙을 다시 시작하던 그해 12월에 어머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의 어머님이 자기가 교회에 다니지 않을 때에도 자주 이렇게 말씀해주셨다고 합니다. "나는 네가 언젠가 다시 예수를 믿으면 누구보다도 '크게' 믿을 것을 안다. 그래서 너에 대해서는 아무 걱정도 안한다." 하나님께 기도한 분량이 얼마나 되었을까요. 장례식을 마치고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는데 얼마나 많이 보셨는지 너덜너덜해진 성경책에 군데군데 빨간 줄이 쳐져 있었고, 책갈피에는 여러 개의 다짐의 글이 씌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갈피에는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의 뜻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이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어머니의 믿음이 그리스도인들의 본래 믿음이요 신앙 고백입니다. 예수 중심을 가진 사람, 예수 안에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뭘 얻으려고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감사한 것입니다.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 사랑으로 족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하신 말씀을 마지막으로 읽겠습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1:47).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4월 28일> 참된 사람 정신 차린 사람(행25장-26장) 이정식 2013.05.01 0 181
다음글 <4월 14일> 하늘 복음을 품은 사람(행23:12-35) 이정식 2013.04.17 0 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