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7일> 주님 내 곁에(행22:22-23:11) | 이정식 | 2013-04-09 | |||
|
|||||
만화영화 라이언 킹은 참 감동적인 영화입니다. 심바는 동물의 왕, 사자의 왕인 무파사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자라서 왕이 될 거라는 확신에 여자친구 날라 앞에서 한껏 의기양양합니다. 그러다 2인자인 삼촌 스카의 계략에 빠져 아버지를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으로 멀리 도망을 갑니다. 조금씩 조금씩 성장하던 심바는 고향이 파괴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삼촌 스카가 아버지 무파사를 죽게 만든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도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던 심바에게 어느 날 무파사가 환상 중에 나타납니다. "네가 누구인지를 기억해라 Remember who you are"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나는 너와 함께 있다고 격려해줍니다. 심바는 용기를 얻고 고향으로 돌아가 스카를 물리치고 라이언 킹이 됩니다. 이런 스토리가 스크린 속에만 있지 않고, 현실 속에서도 있습니다. 실제로는 늘상 있습니다. 첫 여성 치안정감으로 임명받은 이금형 경찰대학장도 그렇습니다. 미술에 소질이 있어서 화가지망생이었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경찰에 입문했습니다. 고시 출신들은 5번 만에 승진하는 길을 그녀는 순경으로 시작해서 9번 만에야 이루어내었습니다. 그의 수첩에 적혀 있는 글귀는 "매일매일 자신감을 갖자"는 소박한 문구였습니다. 중학생 책상에 적혀있을 법한 글귀입니다. 하지만 항상 도전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매일매일 자신과의 싸움을 싸우기 때문에, 그의 말은 '나는 매일 도전하며 산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곁에는 '자신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화 속의 심바나 현실 속의 이금형 치안정감도 자기 곁에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떤 것이 있어야 할까요? 사도 바울은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를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말했습니다. 아름다운 신앙고백을 한 것입니다(행23:1 참조). 예배하는 우리 가운데 누군가 이런 신앙간증을 한다면 우리는 자랑스러운 박수갈채를 보내며 서로 격려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 주위에 모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바울을 위협하고 잔뜩 적의를 띠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바울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고 했습니다. 말을 하지 못하도록 입을 봉하라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22장 22절에서 사람들은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었습니다. 살려둘 자가 아니라고 하면서 아주 격하게 몸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곁에 있던 천부장은 무슨 죄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채찍질로 심문하려고 했습니다. 바울이 지혜를 내어 말하기를 "로마 사람된 자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행22:25)하고 어름장을 놓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강한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미국 시민권을 가진 사람을 북한에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사도 바울 당시의 로마는 오늘날의 미국과 같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바울을 천부장이 마음대로 심문할 수 없습니다. 천부장이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란 것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자기는 돈을 많이 써서 그 좋은 로마 시민권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을 다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법정에서 정당하게 다루는 길이었습니다. 바울은 지금 재판정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나니아 역시 바울의 입을 치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주 예수를 만나서 예수님의 부활을 전한 그 사실을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하늘 높이 계신 하나님께서 어찌 사람의 몸을 입고 비천하게 오셔서 사람에게 죽고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땅에 육체를 입고 있는 우리를 진정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런 방법으로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저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그 교훈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사람의 할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주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에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말은 아주 죄질이 나쁜 이단의 말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거짓으로 사람을 우롱하고 괜한 소동을 일으키는 말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대제사장인 아나니아를 대해서 바울은 율법을 말하며 자신을 변호했습니다.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행23:3).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면 두세 사람의 증인이 있어야 송사가 성립됩니다. 그런데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두세 증인의 고소를 확인하지도 않고 징벌을 가하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부장을 향해서는 로마시민권자로서 자기를 변호했고, 아나니아를 향해서는 율법으로 자기를 변호했습니다. 하지만 성난 군중들의 적의는 누그려뜨리지 못했습니다. 좌중의 형편을 살핀 바울이 지혜를 발휘했습니다. 군중을 살펴보니까 한 쪽 사람들은 사두개인이었고, 다른 쪽 사람들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울이 그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 외쳐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행23:6) 사두개인은 대개 하나님을 믿는 부유한 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천사도 영도 부활도 믿지 않습니다.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행23:8a)고 믿습니다. 성전 제사를 담당하고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지도층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부자들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재산 10억을 가지면 부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 물어봤더니 100억을 가진 사람이어야만 부자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100억을 가진다면 평생 세상을 즐기면서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이 세상은 보고 먹고 구경하고 경험할 세계가 많아서, 평생을 그렇게 산다고 해도 다 경험하지 못할 만큼 넓다는 사실입니다. 성경 말씀에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했는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 믿음에 꼭 천사나 영이나 부활이 있어야 할 필요가 별로 없습니다. 경전에 적힌 대로 교훈을 따라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가난한 축에 속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미래에 소망을 두는 특징이 있습니다. 현실의 괴로움을 미래의 소망으로 이겨내는 것입니다. 처한 형편이 그렇다 보니까 바리새인들은 천사도 영도 부활도 있다고 믿는 신앙으로 발전해갔습니다. 물론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 곧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을 바리새인이라고 소개하는 바울의 말을 듣고 군중들이 두 패로 나뉘어 서로를 이기려고 소란이 일었습니다. 이렇게 위기 상황이 계속되는 그날 밤에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격려하며 위로하셨습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행23:11). 사람의 위로와 격려를 생각할 때 우리가 듣고 싶은 말은 "수고했다. 이제 쉬어라" 하든지, "당분간 숨었다가 때가 되면 다시 시작하자"라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주님 정말 그 말을 듣고 싶었습니다. 제 육체 속에 숨고 싶었고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제 마음을 잘 아시는지 역시 주님이십니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격려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격려는 이런 위기 상황 속에 있지만 "담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더욱더 힘을 내라는 것입니다. 용기를 내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맡긴 일이 여기 예루살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 로마에까지 가서 내 복음을 증거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은 여기서는 네가 해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로마에 갈 때까지 너는 해를 당하지 않을 것이니까 입을 열어 복음을 담대히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하실 때 "주께서 바울 곁에 서" 계셨습니다. 환상 중에 나타나 심바를 고무시키고 용기를 주었던 무파사와 같이, 이금형 치안정감의 곁에 자신감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같이, 바울에게는 주 예수께서 찾아오셔서 곁에 서 계시는 것입니다. 자신과의 내적 싸움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육체와 세상을 대적하여 싸우도록, 복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시고 격려하시는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실 때 혼자 두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할 때 곁에 계신 예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은 세상을 거스리기 때문에 고난과 위협이 찾아오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우리를 격려하시고 위로하실 분은 오직 우리 곁에 서신 예수님이십니다. 그저 우리 감정을 위로하기 위해서 부르는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고백이 아닙니다. 그저 세상살이의 고단함을 이기도록 하는 격려로 '주님 안에 내가 살리'하는 고백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복음을 맡은 자가 복음의 최전선에서 당할 그 일에 대해 주께서 친히 위로하시고 계속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 곁에 계심은 우리가 그의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내 곁에 계심을 고백하는 것은 주의 복음을 위한 헌신된 자가 그 일을 계속하도록 북돋워주는 힘이요 능력입니다. 이것은 환상도 아니고, 자신감과 같은 정신적인 특징도 아닙니다. 항상 살아계신 주님께서 내 곁에 계시기를 원합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