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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4일> 하나님의 의중意中(행21:37-22:21) 이정식 2013-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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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의 일생은 어느 정도는 결혼할 남자에게 달려있습니다. 남자의 일생 또한 어느 정도는 결혼할 여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일생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데 달려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통수권자 박정희 대통령이 대기업 회장이던 정주영 회장을 불렀습니다. 무슨 의중이 있을 것이었습니다. 부하 직원은 상사의 의중이 무엇인지를 생각합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의중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의중 안에서 한 사람의 일생은 이렇습니다. 부모에게서 태어납니다. 그리고 그가 성장합니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그 마음에 없는 때가 있습니다. 성장할수록 하나님이 없으므로 죄악이 꽃을 피웁니다. 그 악의 꽃이 찬란하게 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찾아오십니다. 그가 만일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는 거듭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 곧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중 속에 있는 한 사람의 일생입니다. 사도 바울이 태어났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태어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많고 많은 지구상의 나라들 가운데 유대 땅 길리기아 지역의 다소라는 도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고향 땅 어딘가에서 태어났습니다. 사도바울은 자라면서 가말리엘이라는 스승을 만나 율법의 교훈으로 엄격하게 훈련받고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을 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누군가를 만났고 그에게서 배워서 뭔가를 열심히 하면서 살아 왔습니다.

  탄탄대로로 잘 나가는 것을 누구나 꿈꿉니다. 우리가 세상을 보니까 세상이 분명한데, 유명인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절제를 했겠습니까? 그래도 표절이 있고, 성추행이 있고, 마약이 있고, 도박이 있고, 뇌물이 있습니다. 농구선수 서장훈이 은퇴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앞으로 살면서 저는 명예를 더 얻으려고 노력하지 않겠습니다 돈을 더 벌려고 노력하지도 않겠습니다 낮은 곳을 바라보며 겸손하게 살겠습니다 오랫동안 좋은 꿈 잘 꿨습니다. 앞으로 부모님께 효도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명예를 더 얻기 위해서, 돈을 더 벌기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행복하기도 했지만 항상 이겨야 한다는 중압감으로 고통스러웠습니다. 내 농구인생은 30점'이라고 했습니다. 채워지지 않은 허기가 여전히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마음 속에 계시지 않는 허기가 은퇴의 피곤함과 함께 그 마음 속에 가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신차리시기 바랍니다. 여전히 이런 것을 보고 '세상은 다 그런거야'한다면 아직 다시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 마음에 선이 없기 때문에,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그 마음에 죄가 있기 때문에 죄가 꽃을 피운 것입니다. 그 많던 시간동안 누구의 말을 들었을까요? 그 많은 세월 누구를 따라갔을까요? 내 인생의 호랑이를 잡으려고 두려움을 무릅쓰고 호랑이 굴에 들어갔고, 죽을 힘을 다하여 호랑이와 싸워 마침내 호랑이를 잡았습니다. 목적을 이루었는데 '누가 잡으라고 했지?''왜 잡으라고 했지?' 까닭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파놓은 자리는 하나님께서 채우십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위한 열심으로 예수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가두고 죽이는 데 참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의중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바울은 하나님께서 가리키는 곳과 정반대로 맹렬하게 살았습니다. 먹고 살기에도 바쁜 통에 그는 율법을 거슬리거나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사람이 있으면 도시락을 사들고 다니면서 색출해냈고, 자기 일신의 영달보다도 더욱 율법의 일을 챙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암행어사로 자처했습니다. 산헤드린의 공문을 가졌으니, 검문 검색 기소권까지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훼방하는 이단의 무리들을 잡아가두었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멘'하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인생의 스승 가말리엘은 만났지만, 하나님의 의중이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의중을 전혀 깨닫지 못한 사울은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변화되기 전의 바울처럼,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데 열심이었습니다. 그 모든 열심이 도리어 하나님을 거스리는 것이라 말하는 바울에게 모든 분노를 쏟아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분노가 가득한 유대인들을 향해서 바울은 자기가 예수 만난 일을 간절히 증거함으로 하나님의 의중을 깨닫게 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다마스커스로 올라가는 사울에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두려우심이 임했습니다. 대낮에 큰 빛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사울은 거룩하게 압도하는 분위기 때문에 그 마음이 혼비백산했고, 사지에 힘을 다 잃었습니다. 무릎은 저절로 꿇려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무릎은 꿇기 위해서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꿇지 않은 무릎은 반드시 사람과 다른 피조물에게 꿇고 있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형벌받게 하려고 그리스도인을 감옥으로 끌고가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사울의 열심이 아주 최대로 꽃피우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행22:7). "주님 누구시니이까?"하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행22:8). 지금까지 사울에게 예수는 자칭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단의 우두머리였습니다. "내가 곧 그니라.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라"라고 하면서 고작 나사렛에서 태어난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능멸했습니다. 사람이 되어가지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참람한 일입니다. 그리고 죽었습니다.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사울에게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가 죽고 끝이 난 것이 아니라, 살아계시며, 지금 자기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사울은 살아계신 예수님 앞에서 연한 순같이 되었습니다. 그 마음으로 무릎꿇고 엎드렸습니다. 우리 주님도 연한 순같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 아들도 모든 피조물도 연한 순같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마음입니다. 연한 순같기에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53:2).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고운 모양도 없고, 하나님 앞에서 뽐낼 풍채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고운 모양을 흠모하고 풍채를 흠모하고 학위와 이력을 흠모하지만, 예수님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아버지 하나님만이 그 아들에게 진실한 아름다움이며 또한 진실한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아들에게 진실한 고통을 주실 수 있으며, 아버지 하나님만이 그 아들에게 진실한 아름다움을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주님 되심이 인정되고 나니까 그렇게도 분명했던 세상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나니아는 앞을 보지 못하는 사울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행22:13). 즉시 다시 보니 이제는 우당탕거리는 세상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의중이 보입니다. 이제 보이는 것은 온 세상의 모든 죄인을 구원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보입니다. 이제 또한 그 귀에 들리는 것은 시사뉴스 연예계 토픽이 아니라,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이 들립니다. 그제서야 하나님의 의중을 깨달아 알았습니다. 비로소 "네가 예수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행22:15)하신 창조의 목적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거듭난 것입니다.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침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행22:18)고 했습니다. 앞에 살았던 모든 인생은 죄 중에 빠져있던 인생입니다. 주 예수가 보이지 않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의중을 깨달았습니다. 그냥 그렇게 살다 갈 인생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을 향해 창세 전부터 계획하신 뜻을 알았습니다. 인류 첫 시작부터 살인으로 점철되어 지금까지 언제나 매시간 모든 사람에게 주홍같은 붉은 죄가 넘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흘려 모든 죄를 양털같이 희게 도말하신 십자가의 일을 믿는 순간, 영접하는 순간, 내 속에 있던 죄는 깨끗이 씻김을 받고, 주께서 내 마음에 계시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아담 한 사람이 죽어서 그 죄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한 사람이 죽었지만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가 모든 죄인을 구원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분의 피는 하나님의 피입니다. 그분의 피는 거룩한 피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우리 마음 가까이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사울의 마음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하나님의 선물은 믿음입니다.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을 때 그 거룩함은 나에게 임합니다.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죄사함의 능력이 나를 깨끗케 했습니다. 영원히 사는 생명이 나에게 이루어졌습니다. 영생이 나의 것이 됩니다.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릅니다. 하나님 은혜의 충만함이 우리에게 이루어집니다. 이제는 더이상 허덕이지 않습니다. 정욕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명예와 돈과 권력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하는 중에 때를 따라 주시는 하나님의 보너스일 따름입니다. 하나님의 의중 속에는 이 세상살이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준비하고 계십니다. 믿고 맡기고 기다리면 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8:10b). 죄악 중에 출생한 자는 반드시 은혜 안에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기쁨이 없는 사람은 죄에 눌린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슬픈 사실을 봅니다. 바울과 함께 동행하던 사람들은 빛은 보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듣지 못했습니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행22:9) 바울은 예수님의 거룩한 빛에 압도되었고, 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함께 동행하던 사람들은 거룩한 빛만 보았을 뿐,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 사람들의 이름이 누구인지 성경은 전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주 슬픈 일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에서 너무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빛을 보셨습니까?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여러분의 것이 되셨습니까?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셨습니까? 성경에 없는 이상한 말씀이 아니라, 바로 성경 속에 기록된 당신을 위해서 하신 말씀, 나를 위해서 하신 말씀을 듣고 받으셨습니까? 사랑과 기쁨을 값없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구원을 주시고, 우리를 불러 쓰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중을 보았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당신은 사도 바울입니다. 그러나, 동행하던 사람들처럼 그저 신앙의 분위기만 갖고 마당만 밟는다면 그 사람은 왔다간 흔적은 있겠지만 그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오직 주 예수를 찬양합시다.

  1761년 8월 17일에 태어났습니다. 자라서 정원사로 일하다가 몸에 맞지 않아서 구두공이 되었습니다. 함께 구두공으로 일했던 친구 와르(John Warr)와 밤새도록 신앙에 대해 논쟁하고 토론했습니다. 조금씩조금씩 하나님을 기뻐하는 힘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점점더 힘을 얻었습니다. 그러다가 단순히 기독교 신앙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교회에 왔다갔다 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779년 2월 10일 국가 기도일 기도모임에 참석한 캐리는 하나님의 깊은 음성을 듣고 자신의 모든 생애를 그리스도께 헌신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대중 설교를 통해 인도인을 구원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인도 선교회 활동 7년 만에 첫 열매를 얻기도 했습니다. 그의 팀은 40개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였고, 1천 명이 넘는 침례자들의 모임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그는 현대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입니다. 윌리엄 캐리의 묘비에는 '1761년 8월 17일 출생, 1834년 6월 9일 죽음. 가엾고 비천하고 연약한 벌레같은 내가 주님의 온유한 팔에 안기다'라고만 적혀 있습니다. 주를 찬미하는 인생은 여전히 자신은 연한 순같은 존재임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중을 알아 거듭나서 두 번째 인생, 주 예수를 위하는 인생을 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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