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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0일> 더 높은 부르심(행21:1-14) 이정식 2013-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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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번뿐인 삶입니다. '진정한 행복을 시작한다'는 뜻으로 '삶'(SARM, Start a Real Movement)이라는 팀을 이룬 20대 젊은이들이 뭉쳐서 미대륙 횡단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 중에 한 청년은 내로라 하는 기업에서 3년 동안 회사에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일에 파묻혀 살다가 일이 끝나고 퇴근할 무렵에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내가 과연 세상에 한 뼘이라도 이로움을 줬을까?' 답은 회의적이었습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스티브잡스의 말만 크게 들렸습니다. '이것이 꼭 내가 완수해야 할 사명일까?'라는 질문이 속에서 계속 나왔습니다. 마침내 고민을 끝내고 사표를 내고 과감하게 새로운 꿈을 찾아 떠났습니다. 불투명한 미래보다는 가슴 설레지 않은 삶이 더 두려웠노라 말하면서 말입니다. 그들은 심장의 고동소리를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자기 직업에 머물고 있으면서 새롭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차정미 시인은 지독한 일 중독자였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예수를 믿었지만 주일을 지키는 것은 팔자가 좋은 성도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를 쓰고 또 민주화 모임에도 나가고 밤낮없이 바쁘게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4월 경에 시작된 잔기침이 그해가 다 가도록 그치지 않더니 만성천식으로 악화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자기를 위해서 중보기도하고 나가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예수님 대신 저분을 보내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눈물을 쏟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집에 붙들어 두신 이유가 있을 거라며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을 비방하던 죄를 회개하게 하셨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를 쓰게 하셨습니다. 30대 중반에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났는데 자신을 위해 창조주가 죽었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 시를 썼을 때 허무감이 밀려드는 원인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43장 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이 해답이 되었습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진 후에는 전도에도 열심을 냈고 <빈들에 혼자인 사람일수록> 등 시작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더 높은 부르심을 깨달은 사람들은 부르심 이외의 것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1. 더 높은 부르심은 머무르지 않습니다.

  밀레도에서 에베소에서 사역하던 목사님들에게 설교한 후, 눈물로 작별의 입맞춤을 하였던 바울은 고스로 가서 로도에 들리고 바다라로 떠나고 배를 타고 베니게로 갔습니다. 구브로 섬을 왼쪽으로 끼고 5일 길이 된다고 하는 두로에 도착을 했습니다. 바울은 두로에서 신자들을 만났습니다. 일주일간을 함께 지내면서 신자들이 바울에게 한 말은 "예루살렘에 가지 마십시오."라며 말렸습니다. 사소한 인정으로 한 말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렇게 알려주신 말이었습니다. 모든 신자들이 아내와 아이들까지 데리고 나와서 배웅하면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주님, 바울과 그 일행을 안보해 주십시오." 하며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그들과 함께 한 시간이 다 되자 그 곳을 떠나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두로에서 돌레마이로 떠나 거기 신자들과 함께 하루를 지냈습니다. 이튿날에 돌레마이를 떠나 가이사랴로 갔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야했기 때문입니다.

  가이사랴에 도착해서는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인 전도자 빌립을 만나 그 집에서 함께 지냈습니다. 여러 날을 머물렀습니다.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과 바울의 만남은 감격적인 것입니다. 빌립은 누구입니까? 사도행전 8장에 스데반의 박해와 순교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을 때,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복음을 전하던 사람입니다. 이방인 선교를 처음 시작한 이가 바로 빌립 집사님입니다. 사마리아 여러 성에서 복음을 전한 소식을 사도 베드로가 듣고 그 현장에 방문하기까지 했습니다. 성령께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로 인도하셔서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 맡은 내시에게 복음을 전했던 빌립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8장 40절에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던 사도행전 9장 앞의 기록이 빌립 집사의 복음 전도인 8장입니다. 전도자 빌립은 이방인 선교의 문을 처음 열었고, 사도 바울은 이방인 선교의 꽃을 세계적으로 피운 사람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주의 일을 하다가 만난 간증으로 교제할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빌립의 집에 "여러 날"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빌립의 집에 계속 남아있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떠났습니다.

 

  2. 더 높은 부르심은 사랑어린 충고를 넘어섭니다.

  그 빌립의 집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딸 넷 모두를 예언하는 사람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복된 가정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결혼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았지만, 가능하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처녀로 있는 것을 권장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빌립의 네 딸이 바로 처녀로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니 그 집에 또 다른 예언자들이 찾아와서 교제하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아가보라는 예언자가 유대에서 내려왔습니다. 바울의 허리띠를 가져다가 자기 손과 발을 묶고는 말하기를 "성령께서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이 이 허리띠 임자를 이와 같이 묶어서 이방인들에게 넘겨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행21:11b). 말로서 말리는 수준이 아니라, 눈 앞에서 동작과 연기로 바울이 당할 일을 보여주었습니다. 바울의 가슴이 얼마나 눌렸겠습니까?

  그런데, 예언자 아가보가 이 말을 하며 연기할 때에는 바울의 수행원이었던 누가도, 또 전도자 빌립도, 바울 이외의 모든 믿는 자들이 바울에게 한 목소리로 간곡히 말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행21:12). 처음 두로에서 말렸던 신자들은 바울이 자기 길을 떠나자 각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행21:6). 오늘 말씀에 보면 헌신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믿음의 분량에 따라 세 유형의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두로에서 만난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을 만류하다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전송하면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바울을 의탁하는 기도를 드릴 만큼 신실했습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방인 전도의 문을 처음 열었던 전도자 빌립은 사마리아를 거쳐 가사를 거쳐 아소도를 거쳐 가이사랴에 정착하였습니다. 복음 전도를 위해서 계속해서 여기 저기로 떠나 왕성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는 가이사랴에 정착하여 집을 얻고 계속 복음의 일꾼으로 살았습니다. 바울의 여행 계획을 듣고 빌립은 만류했습니다. 바울이 당할 위험을 바울도 알고 있었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행20:23)하였습니다. 빌립 집사와, 동행하면서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와 모든 사람들이 만류하고 있습니다. 복음 전도의 문을 힘차게 열었던 집사 빌립도 바울을 말렸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 복음을 위해 계속해서 전진하고 전진했습니다.

 

  3. 더 높은 부르심은 끝까지 이루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심장을 더욱 고동치게 한 단 하나의 사실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행21:13)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산다! 갑자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고난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가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2) 하니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도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 하나님의 사랑의 뜻을 따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그 발에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굵은 대못을 박는 망치 소리가 하나씩 하나씩 울릴 때마다 그 피는 손등과 발등을 타고 온 몸으로 흘러내립니다. 예수님은 말로써 우리를 정결케 하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몸으로, 생명의 피를 흘려 정결케 하셨습니다. 천지는 다 없어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계십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시며,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우리 가운데 예수로 오셨습니다. 우리 모든 생각과 마음의 죄를 사하시려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심으로 말씀이 또한 영생이신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 재미있던 모든 것이 예수님 오신 후에 미련없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 세상에 빛을 주던 모든 빛들이 바울을 설레게 했지만, 예수님 오신 후에 어두워지고 희미해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 바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모든 지식과 율법과 종교가 예수님 오신 후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아는 지식 앞에서 폐하여지고 말았습니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기를 3일 동안이나 했습니다(행9:8-9). 성령충만으로 안수받자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는데, 그 후로 그의 입술에 붙은 말은 "예수는 그리스도라"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는 말뿐이었습니다(행9:17-22 참조).

   2011년에 방영된 계백이라는 드라마 마지막 편은 황산벌 전투에 출정하는 계백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백제의 계백 장군은 신라 군사 5만과 당의 소정방이 끄는 군사 13만을 단 5천 명의 결사대로 맞서 싸워야 했습니다. 이미 국운이 기울었고 이번 전쟁에서 자기 생명도 보전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직감한 계백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그래도 계백은 "용기를 다해 싸워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자"는 말로 병사들을 독려했고, 4번의 전투에서 이겼습니다. 그 치열한 전투 중에도 어린 신라 장수 관창을 살려주는 여유와 어진 성품을 나타냈습니다. 계백의 심장이 고동치고 있었던 것은 나라와 나라의 은혜을 갚고자 하는 장수의 충심이었습니다. 바울이 결연한 각오로 외치는 것입니다. "내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나는 감옥에 갈 뿐 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행21:13b) 창조주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나를 위하여 다시 살으셨으니 그분을 위해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위해 끝까지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은고라는 한 여인이 계백 앞에서 고백하는 말이 있습니다. "장군, 장군으로 인하여 괴로웠고, 장군으로 인하여 행복했습니다. 무운을 빕니다." 이 고백은 예수님과 동행할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고백과 같습니다. '이것 없이 무슨 재미로 사나' 하면서 그렇게도 끊기 어려웠던 습관이 주님의 은혜를 입을 때 떨어져나가는 것을 봅니다. 십일조를 드리려면 심사가 어지러웠는데 십자가의 은혜를 알고 나면 미련이 없습니다. 주를 모를 때 쓴 시는 쓰는 데로 허무감을 주었지만 주를 알고서는 날마다 찬송시를 씁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고백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 주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주님으로 인해 괴롭기도 하지만 주님으로 인해 행복합니다. 이 세상살이로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인데, 제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닮아가고 있습니다. 내 속에 주님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나를 설레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참 감사하게도 경기도 고양시가 계백 장군의 기개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올해 고양 600년 기념사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조선 태종 1413년에 고양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고양이 <삼국사기>에는 '개백현'으로 되어 있습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계백은 백제 왕족인데, 계백의 조상이 백제 왕실로부터 봉토로 받은 땅이 고양시 행주 내동와 외동 지역이라고 합니다. 황산벌 전투는 충남 논산에서 이루어졌지만, 계백의 절개가 여기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생명을 건 각오가 여기 있습니다. 창조주께서 십자가로 오르신 절대 순종이 여기 있습니다. 주께서 부르신 더 높은 부르심에 순종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어서 헛된 소망을 떠나고, 인정에 잡히지 않고 계속 부르심에 순종하며, 끝까지 주 예수를 위해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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