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 하나님말씀 >
<2월 24일> 진리와 함께 가는 사람들(행20:1-12) 이정식 2013-02-26
  • 추천 0
  • 댓글 0
  • 조회 131

http://spbbc1.onmam.com/bbs/bbsView/43/118595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롬15:5-6).

 

1.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

  진리와 함께 가는 사람들은 진리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진리가 증거되면 두 부류의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진리를 따르는 사람과 진리를 미워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어떤 의견을 내어도 그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이 나뉩니다. 그런데 진리를 말하면 진리를 따르는 사람과 진리를 미워하는 사람이 갈라집니다.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을 우리는 제자라고 부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또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제자입니다. 이 사람들은 전에는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각자 자기 직업이 있었고 가정이 있었고 자기 관심사가 따로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방법대로 세상에서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을 전파했을 때, 그 복음 진리를 듣고 제자가 된 것입니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마4:18-20). 제자가 되는 모습입니다.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진리를 전하니까 "버려두고" "따르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누군가를 따른다, 무엇을 따른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집에 있다가도 동네 형이 와서 "야, 오늘 저기 가보자" 그러면, 두 말 않고 따라갑니다. 그 형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바울의 선교여행에 함께 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더베와 루스드라는 1차 선교여행 때 복음을 전한 곳으로 터키 중앙 부분의 갈라디아 지역의 도시인데 거기서 가이오와 디모데가 제자가 되었습니다. 베뢰아와 데살로니가는 2차 선교여행 때 복음을 전한 곳으로 마케도냐 지역의 도시인데 거기서 소바더와 아리스다고, 세군도가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는 3차 선교여행 때 복음이 전파된 곳으로 터키 서쪽 지역의 도시인데, 거기서 두기고와 드로비모가 제자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자기 스케줄로 바빴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후에 이 사람들의 스케줄은 바울의 일정표와 함께 했습니다. '불러 권한 후, 작별하고 떠나, 함께 가고, 먼저 가서, 기다리고, 다시 만나서 머물고'(행20:1-6).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행17:11)했는데 그걸로 끝난 게 아니라, 그중에 소바더가 제자가 되어 '자기 그물을 버려두고' 바울을 따랐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예수를 전하니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행17:4)랐는데 아리스다고와 세군도가 '자기 그물을 버려두고' 바울을 따랐습니다.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복음을 전"(행14:6-7)했고, 루스드라에서는 디모데가 제자가 되었고 더베에서는 가이오가 제자가 되었습니다. 에베소에서 두란노 서원을 세워 말씀을 가르쳤더니 거기서 두기고와 드로비모가 바울의 제자가 되어 전도여행에 함께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자기 살던 곳을 떠나고 자기 스케줄을 버리고 복음의 일정을 따라 사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진리를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2.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들

  진리와 함께 가는 사람들은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행20:7a). 예수 믿는 사람들이 주일에 모여서 예배하는 습관이 초대교회 때부터 습관적이었습니다. 주의 만찬을 행했습니다. 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전하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주간의 첫날에 모인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모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그리고 떡을 뗐습니다. 함께 모인 것입니다. 인터넷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닙니다. 다른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린 것도 아닙니다. 정해진 장소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모였습니다. 서로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서로 돌아보았습니다.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씀만 듣는 것이 예배가 아닙니다. 말씀만 듣는 것이 예배라면 인터넷 예배도 좋겠지요, 말씀만 듣는 것이 예배라면 딴 교회 가서 예배하는 것도 좋겠지요. 그러나 예배는 찬양과 말씀과 함께 식사하는 것과 교제하는 것과 서로를 돌아보는 것과 그 모든 일 가운데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예배는 서로 지체로서 연결된 공동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바빴습니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다음 날에 다시 떠날 계획을 세웠습니다. 시간이 없었습니다. 시간은 없고 권할 것은 많고 그러니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말씀이 길어졌습니다. 낮부터 교제하기 시작해서 말씀을 중간 중간에 전하기를 밤중까지 계속했습니다. 밤이 되니까 등불을 켰습니다. 등불을 많이 켰다고 했습니다. 내일이면 이 말씀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성도들이 잘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온 마음을 다하여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한 자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진리를 듣는 것입니다. 진리를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밤중까지 말씀을 전했는데, 그것을 끝나지 않고 다음날 아침 날이 새기까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밤을 꼬박 새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나누다가 밤을 꼬박 새운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다 보면 밤을 샐 일이 있습니다. 새벽송을 돌 때 밤을 새겠다고 다짐하는 주일학생들이 많습니다. 그러다가 졸음에 못 이겨 모두 잠이 들고 맙니다. 학생이나 청년들은 MT가서 밤을 새웁니다. 왜 밤을 새우느냐 노느라고 게임하느라고 밤을 새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나누다가 밤을 새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진리를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님들끼리 가끔 모이면 새벽 2-3시는 기본입니다. 그리고 이제 진리를 위한 설전을 벌이다 보면 날이 밝아올 무렵에야 잠이 듭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지명수배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에베소에 복음을 전했더니 소동이 일어나서는 "우리 생계를 망쳐놓는 사람이다" 하면서 에베소 시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이때부터 사도바울은 지명수배자가 되었습니다. 마게도냐에서 헬라로 가서 석 달 동안 있다가 배타고 수리아로 가려는 여행 계획을 세웠는데, 그때에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공모했습니다. 예루살렘 유월절 예배에 참여하려고 배를 타고 가는 사람이 많이 있었는데, 그 배에서 바울을 만나면 거기서 쥐도새도 모르게 죽여서는 배 밖으로 던져버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게도냐로 다시 돌아가서 드로아로 갔습니다. 거기서도 무엇을 했는가 하면 지명수배 당하게 된 이유 곧 진리의 복음을 가르치고 전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리를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어제 윷놀이 대회에 잠깐 다녀왔습니다. 거기서 카메라를 들고 왔다갔다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성훈 성도님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저 사람은 일주일에 세 번 산에 가는데, 그것도 무박으로 산을 탑니다. 백두산에서부터 한라산까지 안 가본 데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일주일에 세 번을 가려면 월요일 일하고 화요일 산에 가고, 수요일 일하고 목요일 산에 가고, 금요일 일하고 토요일에 산에 가야 일주일에 세 번 갈 수 있습니다. 보통 정성이 아닙니다. 그리고 지도도 산에 등산로 큰 길만 표시된 것이 아니라, 작은 길까지 표시된 지도를 들고 다니면서 다니고, 또 지도 없이도 밤에 별을 보고 산을 오르고 내린다고 합니다. 반 전문가입니다. 왜 그럴까요? 산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은 그 이전에, 어릴 때 사모하던 것을 놓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꼭 해보고 싶고 놓치지 않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을 합니다. 열심히 합니다. 그래서 했습니다. 쥐어 보았습니다.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꽉 쥐어보고 싶어 쥐었지만 허깨비였고 쭉정이였습니다. 쥘 능력이 없어서 안달이 난 것이 아니고, 목표가 없어서 괴로운 것이 아니며, 열정이 없어서 낙담된 것이 아니라, 그 꽉 쥐어본 것이 그것이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낙망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인생의 알맹이요, 하나님의 진리를 듣고 돌이킨 사람은 오직 진리만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칩니다. 모든 것을 다 투자했지만, 손에 넣지 못해 낙망한 것이 아니라 손에 넣어보았지만 그것이 진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망연자실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진리에 목마른 사람이요 진리를 갈급하는 사람이며,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이 됩니다.

 

3. 진리의 위로를 받는 사람들

  모두가 등을 기대고 서로 의지하면서 말씀을 듣고 있을 때 유두고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청년이 낮부터 밤중까지 계속 말씀을 듣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청년의 집중력이나 인내가 한계에 부딪힐 수 있습니다.  3초면 인상을 파악한다고 하고, 15분이면 세상을 바꿀 만하다고 하고, 50분이면 10분 쉬어야 합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말씀을 듣고 서로 질문을 하며 강론을 듣고 있었습니다. 창에 걸터 앉아 있었는데, 밤중이 될 때까지 주목해서 듣고 있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졸음이 와서 졸음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깊이 졸더니 3층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말씀을 듣던 모든 사람이 들을 만큼 그 떨어져서 부딪치는 소리가 둔탁하게 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며 듣고 있는 거룩한 자리에 나쁜 일이 생긴 것입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불길한 징조다'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잘 안 되는 일을 자주 겪게 되면 이런 생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왜 잘 안 될까 이유를 찾다가 무슨 꺼리를 발견하는 이상한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사실은 전혀 모르는 것이고,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알 수 없는 일인데, 무슨 일이 생기고 나면 '내 그럴 줄 알았다' 하루종일 진리와 함께 하는 것이 좋았을 것입니다. 내일이면 바울과 헤어질테니 그것을 생각할 때 더욱 간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고가 생긴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계획이 무리였어. 처음부터 알아봤어' 그런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세히 일으켜보니까 떨어져서 크게 다친 것이 아니라 죽었습니다. '아주 불행하고 불길한 일이다.'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집중하던 사람들도 그 마음이 얼마나 낙심되었겠습니까. 점잖은 사람도 '왜 이런 일이 이 은혜로운 곳에서 일어나야만 했지?' 하며 자문할 일입니다. 여러분, 무슨 일을 하다보면 이런 예기치 않은 일이 반드시 생깁니다.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짐 엘리엇은 청년 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잡힌 사람입니다. 진리를 위해 자기 모든 생애를 드렸습니다. 매일마다 성경 말씀을 묵상하며 자기의 연약함과 싸웠습니다. 청년의 정욕과 싸웠습니다. 그 모든 과정이 그를 경건한 사람으로 빚어갔습니다. 선교사로 헌신하였습니다. 선교 현장에 가기 위해서 준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떻게 선교해야 할 것인지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기도하면서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아주 위험한 곳에 선교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너무 위험했기 때문에 우선 경비행기에 먹을 것들을 준비해서 공중에서 떨어뜨렸습니다. 그것으로 자기들의 존재를 알리며 조금씩 기대하는 마음을 갖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그 땅을 밟기로 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전하면 그들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짐 엘리엇이 그들과 만나는 순간, 복음을 전하지도 못한 채 그는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곳에 괜히 간 것처럼 말입니다.

  유두고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도 바울이 조용히 내려가서 유두고 위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몸을 안았습니다. 마치 엘리야가 그렇게 했듯이, 베드로가 그렇게 했듯이. 그리고 말했습니다.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사람들은 웅성거렸고 마음에 동요가 일어났지만, 사도 바울은 떠들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안을 때 유두고의 생명이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진리되시고 생명되신 주 예수의 은혜가 그때 임한 것입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해주셨습니다. 바울은 어떤 질문도 하지 않고, 어떤 동요도 하지 않고, 어떤 법석도 떨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났"습니다. 하던 일을 계속 했습니다. 그의 확신은 '내가 진리의 사도로, 진리를 사모하여 진리를 전하고 있다'는 이 한 가지 확신뿐이었습니다. 그것을 방해할 어떤 생각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유두고는 살아났고 이것이 진리의 위로가 되었습니다. 짐 엘리엇은 죽었고, 그의 아내와 아들이 선교사가 되어 다시 그곳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진리의 위로가 됩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진리는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어제 저도 윷을 두 번 놀았는데 첫 번째 판에는 지고, 두 번째 판에는 이겼습니다. 우리 안수집사님 두 분도 윷을 놀았는데, 첫 번째 판에는 지고, 두 번째 판에는 이겼습니다. 본전치기 한 거죠. 하지만 첫 번째 판에 이기고 두 번째 판에 지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똑같은 본전이어도 말입니다. 마지막에 이기는 사람이 이기는 거니까요. 그 뒤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여러분 결국 져도 이기는 사람이 됩시다. 우리는 진리와 함께 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 진리를 따르는 제자가 되시고, 진리를 사모하는 제자가 되시고, 진리의 위로를 받는 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3월 3일> 주 예수께 받은 사명(행20:13-38) 이정식 2013.03.03 0 106
다음글 <2월 17일> 복음과 생계(행19:21-41) 이정식 2013.02.18 0 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