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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0일> 설예배_새로운 삶(행19:1-20) 이정식 2013-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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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설날입니다. 갑자기 설날의 '설'이 뭘까 하는 궁금증이 생겨서 '설'의 유래를 찾아보았습니다. 세 가지 견해가 있는데 첫째로 설은 '낯설다'에서처럼 '아직 익숙하지 않고 서투르다'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둘째로, '서럽다'의 '설'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셋째로는 산스크리트어에서의 '살' 우리말에서 나이를 뜻하는 '살'에서 비롯하여 '새로 돋고 새로 솟는다'는 말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몸을) '사리다'에서 '조심하다, 삼가다'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 모든 어원상의 견해가 설날의 어떤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동짓날부터 시작된 새해를 맞이하는 마음은 설날 새롭게 출발하여서 정월 대보름에 이르기까지 준비해갑니다. 예전에는 액땜을 한다고 하여서 정월대보름 때까지 날카로운 연장에 손을 대지 말라고까지 했습니다. 설을 맞아 정초에 새로운 삶을 살고 싶은 생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참으로 새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말씀에는 진정으로 새로운 삶을 사는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무리들'이나 '이방인들'이나 믿지 않은 '유대인들'을 만난 것이 아니라 믿는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이 이미 믿었기 때문에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사도 바울이 처음 듣는 질문을 합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19:2a). 우선 우리는 성령을 받는 것이 없이 믿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교리에서 조금 벗어난 해석이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제자'들에게 사도 바울이 이 질문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질문을 듣고 제자들은 상당히 당황하고 있습니다.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행19:2b) 금시초문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믿을 때에 아무도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이 없고 들어 본 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시금 물었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슨 침례를 받았느냐?"(행19:3a)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침례를 받는 것은 주의 가르침입니다. 제자들이 답변하기를 "요한의 침례니라"(행19:3b). 이어지는 말씀을 살펴보면 에베소에서 만난 믿는 제자들의 새로운 삶은 믿지 않았을 때보다는 다른 삶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하기 원하시는 새로운 삶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온전한 복음을 저들이 갖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설날이 주일인 관계로 미리 울산에 다녀왔습니다. 거기서 조카들과 아이들이 눈썰매를 타러 갔는데 장장 4시간을 탔습니다. 아주 실컷 탔습니다. 실컷 탔다는 것은 싫도록, 지치도록, 더 이상 미련이 없을 때까지 탔다는 말입니다. 눈썰매 타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무엇이든지 실컷 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실컷 놀아서 좋고, 또 집으로 가다가 실컷 자니까 좋고, 그런 후에 깨고 나면 또 다른 걸 할 새 힘이 날테니까. 청년들이나 어른들도 하고싶은 것을 실컷 하게 놔두고 그러다 그 일에 미련이 없어진 후에 믿음으로 돌아온다면, 그렇게 된다면 사역이 참 편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오직 복음을 믿는 믿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제자들의 대답이 신통치 않은 것을 안 바울은 "요한이 회개의 침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행19:4). 그러니까 에베소의 제자들은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요한의 침례를 알았지만, 예수의 침례를 몰랐습니다. 요한의 침례는 회개의 침례입니다. 그것은 '내 뒤에 오시는 이'를 여전히 기다리는, 대망의 침례입니다. 죄사함의 침례입니다. 물로 주는 침례입니다. 회개의 침례입니다. "내가 이제 하나님을 믿고 회개하였으니 내 삶이 잘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내 삶을 인도해 가실 것을 믿습니다. 내 장래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러나, 이 침례는 온전치 못한 침례요 온전치 못한 믿음입니다. 예수의 침례는 기다리는 침례가 아니라, 이미 오신 것을 마음으로 받는 침례입니다. 다 이루신 것을 믿는 침례입니다. 내가 믿는 순간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을 감격하는 침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신 사실을 내 마음에 믿는 것입니다. 부활의 침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다' '다시 태어났다'는 것을 확정하는 침례입니다. 이제는 주를 위해 살고 주 안에서 살고 주의 뜻을 위해 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을 시인하는 침례입니다.

  바울의 가르침을 들은 제자들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습니다(행19:5). '요한'의 침례를 받았지만 이제는 '주 예수'의 침례를 받은 것입니다. 성경에서 유일하게 기록된 재침례의 기록입니다. 우리 성서침례교회의 역사적이며 제도적으로 추적이 가능한 뿌리는 재침례교도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2년 전에 침례탕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침례식을 거행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어떤 성도님들은 다시 침례받고 싶다고 고백한 분들이 있습니다. 그 취지는 다르지만 그렇게 말하는 분들의 심정이 무엇이겠습니까? '내 믿음이 좀더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잘 믿고 있는 사람들을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전히 믿는 사람은 옛 사람이 무너지고 새 사람이 선 것을 보는 것입니다. 죄악에 이끌리던 삶을 미련없이 떠나보내고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신 구원의 삶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맞이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주님뿐입니다'라고 하는 믿음의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좀더 새롭게 살자고 다짐하는 정초의 다짐이 아닙니다. 두 번째 인생을 살고자 직업을 바꾸는 그런 새로운 삶이 아닙니다. 자기 신을 섬기기 위하여 출가외인이 되는 삶이 새로운 삶이 아닙니다. 다시 태어나는 새로운 삶인 것입니다. 어떤 곳에도 없는 다시 태어나는 복음의 삶입니다.
  설 명절에 가족들끼리 모입니다. 모여서 함께 화목한 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번에 고향에 다녀오면서 그런 생각이 들어왔습니다. '아, 이제 우리집도 안정이 되어가는구나! 내가 무슨 힘을 써서가 아니라 우리가 무슨 노력을 해서가 아니라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해주시는구나' 결혼할 때부터 지금까지 근 15년 이상 동안 형제들간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돌이켜 보면 그런 충돌이나 갈등은 '내가 옳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내가 옳으니까 내 형을 고치려고 합니다. 내가 옳으니까 내 형수를 변화시키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할수록 서로간에 불신이 커지고 오해는 더 큰 오해를 낳았습니다. 이제 깨닫게 된 것은 '아, 내가 아는 그 형, 내가 아는 그 형수가 아니다. 나도 내 것이 아니지만, 그들도 내 것이 아니며, 내가 아는 그들이 아니며, 오직 그들도 하나님의 것이다.' 내가 보고 듣고 판단한 그 사람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께 맡기지 못했던 지난 시간은 어리석은 시간이었습니다. 오직 주 예수 앞에 겸손히 행했어야 할 것을 그렇게 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께 맡길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나의 사명에 더욱 주목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 지방은 마술이 유행하던 곳입니다. 에베소에서는 수많은 책들이 마술에 관한 책이었습니다. 그런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정초에 무슨 결심을 하듯이 하는 것으로 그 문화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다시 받고 바울이 안수했더니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였습니다.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는 사람이 12사람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신비가 마술의 신비를 물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방언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배우지도 않은 말을 하고 예언을 하는 것은 신비로운 증거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병고침을 받는 것과 같은,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표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주 예수를 향한 믿음의 불씨가 번져가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이 석 달 동안 하나님 나라를 강론하니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비방도 했습니다. 두란노 서원은 믿는 제자들을 따로 구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 설립하였습니다. 하나님께로 거듭나는 새로운 삶을 선물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바울에게 특별한 징표를 주었습니다. 2년 동안 그곳에서 말씀을 전할 때 놀라운 능력이 나타났는데,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갔습니다(행19:11-12). 방언도 나타나고 예언도 나타나고 병고침도 나타내게 하셨으니,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복음의 문을 여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하심이 우리에게도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목사도 더 많은 능력이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바울의 능력 행함이 소문이 될 만큼 퍼지니까 그를 따라하는 따라쟁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술을 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들린 자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행19:13). 그 중에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있었습니다. 그들도 그렇게 따라하여 악귀들린 자에게 나가서 외쳤더니, 악귀가 대답하기를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행19:15) 하며 뛰오 올라서는 눌러서 이기고 벗은 몸으로 도망가게 만들었습니다. 예수 믿는 믿음은 얼렁뚱땅이 아님을 볼 수 있습니다. 청년 시절에 이 말씀을 보면서 걱정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선포하는데 나에게도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는 누구냐?'하면 어쩌나. 모른 체하고 점을 치러 갔는데, "당신은 여기 올 사람이 아닙니다"는 말을 듣지 못하고 점괴가 나오면 어떻게 하나. 여러분 예수 믿는 믿음은 더욱 확실하고 더욱 실제가 되고 내 영혼과 정신과 몸이 온전히 시인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믿음이 이렇게 세상의 영을 이길 때, 예수 믿는 믿음이 이렇게 악귀를 제어하게 될 때 세상이 불살라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수백 수천 권이나 되던 에베소 비법서들이 무용지물인 것이 드러났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이 그런 비법서들보다 더욱 신비한 것임을 듣고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이전에) 행한 일을 알리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모아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들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참된 것이 오니까 그림자는 물러갑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니까 어둠의 일들이 떠나갑니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행19:20). 아멘. 우리가 듣고 보는 이 말씀은 말만이 아니라 능력이며 진리입니다.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습니다.  내 마음 속에도 우리 마음 속에도 능력을 발휘합니다. 이전에 행하던 어둠의 일을 자백하게 하고 이전에 의지하던 모든 비법들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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