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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7일> 복음의 사람(행18:12-28) 이정식 2013-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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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은 옛 것을 깨뜨리고 새 것을 세우는 것입니다. 복음은 옛 사람은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복음은 죄에서 떠나 의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복음은 어두움에서 나와서 빛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올빼미가 싫어하는 것은 촛불을 들이대는 것입니다. 올빼미는 야행성이기 때문에 주로 밤에 활동합니다. 어두운 데서도 볼 수 있는 눈이 있죠. 먹잇감을 구할 때는 닥치는 대로 잡아서 쌓아둡니다. 재물을 쌓아두듯이 닥치는대로 말입니다. 그러니 올빼미는 너무 밝은 빛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의 사람은 참빛 되신 주님, 태양빛보다도 더 눈부신 주님 앞에 서는 것을 기뻐합니다. 비록 자기 자신의 추한 모습이 감출 수 없이 드러난다고 할지라도, 말씀 앞에 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내 부끄러운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가면 주님께서 깨끗케 하시고 고치시고 또 새롭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사람은 내가 다른 사람 눈에 어떻게 비칠까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사람은 내가 보기에 저 사람은 어떻다 라고 평가하는 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사람은 하나님 말씀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를 더욱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 핑계대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판단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을 가장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그분이 나를 죄인이라고 하셨으면 누가 뭐래도, 무슨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죄인입니다. 그분이 나를 의인이라고 하셨으면 누가 뭐래도, 무슨 일을 한다고 해도 나는 의인입니다. 오늘 네 사람을 통해서 진정한 복음의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발견하기 원합니다.

 

1. 고린도의 유대인들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행18:13) 사도행전 15장 5절에도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법은 모세의 율법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학교에서는 학교의 규칙을, 집에서는 부모님의 말씀을, 직장에서는 직장의 내규를 따르는 것이 옳습니다. 그것이 경외하는 사람의 모습이 맞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과 각종 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입니다. 선생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서 "선생님 사랑해요"한다면 말이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님 말씀을 다 따른다고 해서 선생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제 1월 첫 산행을 다녀왔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 가운데 금융 사기에 관한 말이 나왔습니다. 요는 믿을 만한 사람이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믿을 만한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정해진 규칙대로 일을 잘 처리할 뿐 아니라, 인간관계도 좋은 사람일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 속에 있는 것은 딴 생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속에 딴 생각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사람들 눈에 신뢰를 주고 일에 성실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규칙을 지킨다고, 모세의 율법을 따른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처리는 확실한데 정이 안 간다"면 그것은 마음을 주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죄의 속성은 하나님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죄는 결코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백년이 가고 만년이 가도 죄는 결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고린도에 사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로 들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전한 복음은 율법은 죄가 드러나게 하고, 죄는 우리를 저주와 죽음 아래 살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고서는 생명과 기쁨을 얻을 수 없고 도리어 두려움과 슬픔 속에서만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주셨으니, 그 생명 안에서 살라고 한 것입니다. 세상 모든 죄를 십자가에 못박으셨으니, 죄에서 해방됨이요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그것을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2. 갈리오 총독 

  갈리오는 1세기 철학자 세네카의 동생입니다. 형 세네카가 동생 갈리오를 평하기를 "인간들 중에 갈리오처럼 어떤 사람에게나 상냥하게 대했던 자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인격적으로 아주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우리 나라 역사 속에서 그만한 인품을 찾을라치면 황희정승과 비견될 만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방하려고 하지 않고, 도리어 세워주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상대방의 장점을 읽고 그것을 격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한계와 범위를 넘어 월권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하여 법정에 세우니까 갈리오는 말했습니다.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주는 것이 옳거니와 만일 문제가 언어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행18:14-15).

  아주 공평한 법관입니다. 우리 나라나 다른 나라에도 이단을 규제하는 법은 없습니다. 이단을 규제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사회적으로 범죄를 일으키거나 일반적인 법규를 위반하는 일이 생겼을 때입니다. 죄형법정주의와 같습니다. 언어 명칭과 유대인의 율법에 관한 문제를 로마법으로 다룰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화가 난 유대인들이 바울 대신에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서 법정 앞에서 때려도 갈리오는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처럼 사람을 두려워하여 없는 재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갈리오는 자기 소신이 뚜렷한 사람이었습니다. 갈리오는 인품으로도 좋은 사람이었고 자기 소신도 뚜렷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복음에 대해서도 상관하지 않았다는 데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갈리오는 대중의 생각에 맞추지 않고, 권력자에게 아부하지 않으며, 치우침이 없이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해서도 중립을 지켰습니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 중립이 없듯이, 선과 악 사이에 중립이 없듯이, 생명과 사망 사이에 중립이 없듯이, 저주와 축복 사이에 중립이 없듯이, 하나님께는 중립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몰입할 때 몰입하며, 집중할 때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랑도 빠져야 합니다. 중립적인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다른 어떤 것보다도 사랑하는 것만이 선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만이 복음의 사람이 걷는 길입니다. 세상의 모든 존경과 경의를 다 받더라도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자, 그가 갈리오였습니다.

 3. 아볼로

  아볼로는 성경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아볼로는 언변이 좋았습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주의 도를 배우기를 열심히 했습니다. 게다가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는 선생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taught about Jesus accurately 요한의 침례만 알 따름이라"(행18:24b-25) 아볼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초대 교회에 그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도 아볼로를 바울에 필적할 만한 사람으로 평가했고, 바울도 아볼로를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3:6)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심었고, 아볼로는 복음 가진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든든히 성장하도록 도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아볼로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언뜻 보기에 부족할 것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교회 안에서 존경을 받아야 할 사람인 것처럼 보이는 아볼로에게 결함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누가 알아차렸는가 하면 성도였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였습니다. 아볼로의 설교를 들어보니까 성경에 해박하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자세히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요한의 침례만 알 따름이더라"고 했습니다.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가르쳤다고 하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도 알았을 것입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요한의 침례만 알 따름이었다고 말씀한 것을 볼 때 죄와 회개에 대해서 확실히 선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의 생명의 주가 되신 것을 알지는 못했습니다. 주를 영접할 때 영생을 주시고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것을 잘 몰랐던 것입니다.

  내가 죄인인 줄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할 줄도 알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주신 영생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하심과 같이 내 영이 부활한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미 지존자의 아들이 된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부족함과 죄송함만 느끼지 하나님 주신 기쁨으로 기뻐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는 성경말씀은 알지만, 내 영혼 속에 이미 모든 것이 끝난 일이라고 확정하지는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죄를 완전히 씻으신 것과, 예수님께서 모든 영생을 완전히 부어주신 것을 고백하지 못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의 설교를)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more adequately/perfectly 풀어 이르더라"(행18:26b). 성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학자인 아볼로를 데려다가 완전한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서 말해 주었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아볼로는 모든 복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다음부터 아볼로의 설교는 달라졌습니다. 그 설교는 오직 "예수는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자요, 생명의 주가 되셨고, 영원한 주인이 되셨으니, 나는 이제부터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나는 그분의 사랑 안에 살고, 그분의 은혜 안에서 삽니다. 내 연약함이나 부족함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자랑할 수 있게 된 것은, '내가 이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완전히 사랑하셨다'기 때문입니다.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 Jesus was the Christ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행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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