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 하나님말씀 >
<1월 20일> 성도의 더욱 중한 관심사(행18:1-11) 이정식 2013-01-25
  • 추천 0
  • 댓글 0
  • 조회 107

http://spbbc1.onmam.com/bbs/bbsView/43/118591

  무슨 일에 달인이 되거나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남들과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손놀림이나 그 방법이나 마무리나 매듭이 특별한 것입니다. 똑같이 수고하지만 뭔가가 다른 것입니다. 직업이나 직장은 세상살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살아갈 수단을 얻고, 그 속에서 보람을 누리고, 그 속에서 안정감을 얻습니다. 또한 삶의 애환이나 여러 가지 스트레스도 직장 생활 속에서 많이 받게 되니, 누군가 나에게 '성실하다'느니 '유능하다'느니 '믿을만하다'느니 하는 모든 됨됨이가 평가되는 곳도 직장입니다. 더 나은 미래를 보장받아 더 높은 지위로 올라가는 통로도 대개 직장 생활을 통해서 얻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직장생활에 가장 민감하고, 그 직장이나 직업 생활의 변화에 예민합니다. 될 수 있는대로 우리는 성실하다는 평가를 얻고, 될 수 있는대로 우리는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고, 될 수 있는대로 우리는 믿을많하다는 신뢰를 얻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즈음에는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일에 능숙한 사람이라면 더 좋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특별한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바울이 자기 생업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의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행18:3).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서 고린도라는 유명한 상업도시에 들어왔을 때입니다.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계속 이동하는 바울이 천막 만드는 일을 했다면, 그는 어디에서든 '멍석을 깔아놓기만 하면' 천막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 랍비들에게도 손으로 하는 일을 가질 것이 권고되고 있었습니다. 노동의 수고를 할 것은 초대 교회 이후 많은 수도원들에서도 하루의 주된 일과 중에 하나였습니다. 단지 재미삼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라는 상업도시에서 팔릴 수 있는 천막을 만든 것을 볼 때, 바울은 자기 생업에 능숙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붓상처럼 떠돌이가 타지 시장에서 자기 제품을 팔아서 먹고 살려고 한다면 그 제품이 웬만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가죽으로 된 천막을 만들었거나 올이 굵은 직물을 짜는 일에 바울은 유능했습니다.

  평생 농사를 짓던 할아버지 한 분이 농사를 지으면서 싸리로 만드는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싸리로 만드는 일에 전문가가 다 되었습니다. 하시는 말씀이, "싸리는 광대싸리 외싸리 참싸리가 있어. 채반은 그중 참싸리로 만들어야 해. 그래야 단단하고 질기거든. 여름 중복허리에 한참 물오른 참싸리를 베어다 껍질을 까서 말려. 그런 다음에는 물에 불려야 해. 그래야 잘 휘어지고 부들부들해지거든. 만든 다음 잘 말리면 딱딱하고 튼튼해져. 예전에 이것을 선물하면 다들 좋아했어. 지금은 참싸리를 구하기가 참 힘들어져서 아예 만들지를 못해. 또 갈대가 꽃피는 양력 8월 초쯤에는 갈대를 뽑아다가 소금물에 보름이나 한 달을 절였다가 말려서 비를 만들면 고급 비가 돼" 그 어르신에게는 한 생애 동안 숙달하여 몸에 익은 지식이었을 것입니다. 네, 이런 지식은 빨리 기록해 놓아야지 안 그러고 세월이 지나면 다 잊혀질 지식이며 능숙함일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에 온 이유는 이 일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만든 천막을 보면서 사람들이 '거 참 일등, 특등 천막이네'하는 칭찬을 듣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와서 천막을 만들 때는 충분히 팔릴 수 있는 제품을 만들 만큼 능숙했지만, 그가 고린도에 온 이유는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하나님 말씀을 강론하고 사람들을 하나님 말씀으로 권면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행18:4). 여기에 갈피를 끼워두시기 바랍니다. 그의 관심사는 하나님입니다. 그의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 복음이었습니다. 홍해 바다가 갈라지듯이 확실히 갈라세워야 할 일입니다. 요단강 물의 근원이 위에서부터 끊어지듯이 뚝 끊어져야 할 대목입니다. 인생에 전반전이 있고 후반전이 있다면 확실히 달라져야 할 부분입니다. 내가 일산 시민도 되고 천국 시민도 된다면 확실히 천국 시민 노릇에 방점이 찍혀야 할 부분입니다.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가 섞일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야 합니다. 여기 보니까 바울이 고린도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났습니다. 그들도 생업이 천막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보게 되겠지만, 이 두 부부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헌신되었던 부부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니라 성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말입니다.

  소설을 쓰는 아내를 둔 서울대 미대 교수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모두 예수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10여 년 전에 세계적인 석학인 이어령 전문화부장관과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이어령 선생이 "너무 종교 생활에 빠지지 말게. 예술 창작은 어떻게 보면 악마와 손을 잡는 거니까."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동안 '이분이 예수님을 믿었으면 좋겠다 하던 마지막 바람을 접었다'고 했습니다. 이어령 선생은 학계에서는 그를 넘볼 자가 없을 만큼 탁월한 분입니다. 십여 년이 지난 후에 이어령 선생이 무릎을 꿇고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장면을 보았고, 이어령 선생은 이제 "어떤 예술이라도 하나님이 빠지면 온전할 수 없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비록 칠순이 넘어 주를 영접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우물을 파는 데 열심을 다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복음으로 그가 학자가 아니라, 석학이 아니라, 전 문화부장관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더욱 중한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관심사만 아니라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은 우리의 고백이요, 우리의 찬양이며, 우리의 할 말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죄악 가운데서 건져내랴!"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우리 마음만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제 바울이 겪었던 일, 그래서 우리도 겪을 그 일 속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고린도는 상업도시였고 부자도시였고 그래서 사람들이 영적으로 교만하였고, 성적으로 문란했던 도시입니다. 바늘로 찔러도 들어가지 않을 것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도 들어가지 않을 것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여 심히 떨었노라"(고전2:2)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마게도냐에 두고 온 동역자 실라와 디모데가 고린도에 왔습니다. 그랬더니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했습니다(행18:5). 뜻을 같이 는 사람이 함께 하면 힘이 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살면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학생들이 싫어하겠지만 학생은 공부, 청년들은 직장과 배우자, 결혼한 자매들은 아기, 더 나가면 뭔가 좀 존재감있고 의미있는 일을 찾고 싶어합니다. 그 모든 것이 능숙해야 할 일이지만, 성도가 붙잡힐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지 않고는 예수는 그리스도라 고백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충만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가 뜬구름 잡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붙잡힌 자라야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이유를 알게 됩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온 것이 복음을 위해서 온 것처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천국복음을 위해서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주님 대신 세상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번개처럼 선포됩니다. 천지가 먹구름으로 뒤덮혀 있을 때 휘번쩍이는 번개가 하늘을 갈라놓습니다. 그러면 여기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 집에, 그리고 그 회당장 그리스보의 집에 그 말씀이 낙뢰처럼 떨어져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게 되고, 또 한 번의 하늘 번개가 땅 위에 낙뢰처럼 떨어져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서 침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행18:7-8). 번개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영혼의 머리에 낙뢰처럼 떨어져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가 찔러쪼개어지며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영접한 사람들에게 영원토록 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번개가 치고 나면 다시 하늘이 어두워짐과 같이, 아니 번개가 치고 나면 천둥소리가 들리는 것같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비방합니다. 바울은 담대히 하나님의 방법대로 행하였는데,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행18:6). 유대인이 듣지 않으니까 이방인들에게로 갔습니다. 회당에서 예배당에서 듣지 않으니까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트라우마라는 것이 남습니다. 상처가 남습니다. 그들의 비방하는 모습이 어떠했겠습니까. 얼굴을 붉게 하고 눈을 부라리며 손으로 삿대질을 하며 금방이라도 돌로 치듯이 덤벼들지 않았겠습니까. 그렇게만 했겠습니까. 더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아주 불쌍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그 눈빛들입니다. 하룻 밤 자고 아침에 다시 복음을 전하려고 하면 어제 그 살벌한 비방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장에 담대함으로 맞섰지만,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입니다. 안 가고 싶은 것입니다. 다른 데로 가고 싶은 것입니다. 더 좋은 땅이 없나 살피게 되는 것입니다. 천막이나 만들껄 하는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친히 도우십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행18:9b). 하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다"(행18:10a). "내니 안심하라"는 말씀입니다. 너의 생명에 아무 지장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해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실한 격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교제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소원이자 성도의 소원입니다. 우리는 우리만 천국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천국을 누릴 것을 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뜻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울은 그 완악한 고린도 사람들을 상대하기 위해 부드러운 말과 설득력있는 언변에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다"(고전2:4)고 말했습니다. 사람의 지혜의 말로 천국 문 앞에 이르게 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람으로 하여금 천국문에 들어가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천국문에 들어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음이 역사할 때 들어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두렵고 떨리는 도시에 1년 6개월씩이나 머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고 하나님께서 환상 가운데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과 함께 하심은 바울을 사랑하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바울을 통해 구원받을 영혼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과 함께 하셔서 해를 당하지 않게 하신 이유는 바울을 아껴서이기도 하지만,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친백성이 될 준비가 된 사람이 고린도에 많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관심사는 우리의 관심사입니다. 세상살이에서도 우리의 관심을 끌고 붙잡힐 만한 곳이 많이 있습니다. 공부에, 직장에, 가정에, 너무 예쁜 아이에게 우리는 충분한 관심과 사랑을 베풀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가진 복음을 다른 사람도 가져야하리라는 이 관심사를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진정한 이유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안녕 가운데 보호해 주시는 진정한 목적이며,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랑의 면류관이기 때문입니다.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1월 27일> 복음의 사람(행18:12-28) 이정식 2013.01.30 0 116
다음글 <1월 13일> 하나님의 소생所生(행17:16-34) 이정식 2013.01.15 0 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