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 하나님말씀 >
<1월 13일> 하나님의 소생所生(행17:16-34) 이정식 2013-01-15
  • 추천 0
  • 댓글 0
  • 조회 151

http://spbbc1.onmam.com/bbs/bbsView/43/118590

  '소생'이란 말은 요즈음 잘 사용하지 않는 말입니다. 옛 사극에서나 나올 법한 말투인데 '아무개의 소생'이라고 하거나 '소생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할 때 쓰는 말입니다. 여기 번역하기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소생'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는 그 원어가 '테크나 쎄우'에서 '테크나'이고, 여기 하나님의 소생은 '게노스 운 휘프라콘테스 투 쎄우'에서 '게노스'로 되어 있으니 원어상으로도 차이가 있습니다. 말의 차이는 느낌의 차이로 나타나는데 '하나님의 자녀'는 인격적이며 정서적인 느낌을 주지만, '하나님의 소생'은 그저 객관적인 사실을 말한다는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말의 차이나 느낌의 차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적인 차원에서는 완전히 다른 뜻으로 사용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소생으로 남아있을 것인가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될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개척하고, 데살로니가 교회를 개척한 후에 그리스의 아테네(아덴)에 가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아덴에 가서 실라와 디모데가 올 때까지 기다리던 중에 아덴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상(偶像)은 '사람을 본뜬 인형, 본체를 본뜬 모양'이라는 말인데, 하나님을 본뜬 신상들이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올림포스의 12신 이외에도 수많은 신들의 이름이 있고, 그 신들이 책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각기 신전도 있어서 예배까지 드리는 것입니다. 광화문 앞에 세운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상처럼 나라와 민족의 훌륭한 인물을 문화적으로 기리기 위한 동상이 아니라, 종교적으로 경배하기 위해서 세운 신상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알지 못하는 신에게'(행17:23)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단도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보면서 '쯧쯧' 혀를 차면서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음에 격분했습니다(행17:16b). 그 격분된 마음으로 한 일은 도끼를 들고 우상들을 파괴한 것이 아니라, 회당에서 장터에서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면서 '예수와 부활'(행17:18b)을 더욱 힘써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입에서 마땅히 가장 귀하게 나와야 할 말은 예수와 부활입니다. 세상의 부정과 불법을 향한 분노가 있습니까 환멸이 있습니까? 그럴 때에 더욱 소리 높여 할 말은 예수와 부활입니다.

  먼저 자기가 하나님의 소생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삶을 살펴보겠습니다. 이는 아테네의 한 시인이 자기가 지은 시에서 한 말로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행17:28b)고 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의 특징은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에 많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아테네 사람뿐만 아니라 아테네로 몰려온 사람들 또한 '아테네에 가면 새로운 지식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던 것같습니다.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행17:21a)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지혜와 보화를 보이신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지혜를 추구합니다. 지혜를 추구하기 때문에 새로운 지식과 지혜에 대해 환호하고 감격해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렇게 신적인 지혜를 구하는 사람들이 두 그룹이 있었는데 그것이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행17:18a)입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육체적 정신적 영적 쾌락, 곧 행복이 최고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스토아 학파는 신적인 도를 얻기 위해 절제하며, 자연과 우주의 원리를 찾기 위해 열정을 쏟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신(神)은 사람에게서 멀고 높고 지극한 존재로 계시기 때문에 그분을 제단을 쌓아 경배하며, 또한 신이 사람에게도 신성을 주었으므로 그 신성을 잘 갈고 닦아서 신의 수준에 도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들에게는 '범사에 종교심이 많'(행17:22b)을 수밖에 없었고, 또한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행17:24b)리라 여겨 경배하며 사람의 섬김을 받기를 원한다(행17:25)고 생각했습니다.

  새로운 세계, 새로운 물건, 새로운 아이돌, 새로운 이야기는 비단 사춘기 학생들만이 아니라 청년, 장년 너나할 것없이 좋아합니다. 요즈음처럼 신기술이 주는 혜택이 생활 속에 팍팍 느껴지고, 그 기술이 세상의 흐름도 바꾸어간다는 것을 체감하는 시절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동시에 세상의 많은 스승들이 나타나서 우리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며, 우리 마음에 신적인 어떤 것을 동경하도록 이끌어주는 현자도 있습니다. 대기업은 지고 중소기업이 뜨고, 대학교수나 유명하다는 사람은 지고 삶으로 자기 길을 개척한 사람들이 뜨고, 정식 코스를 밟은 사람들은 지고 유투브를 통해 마음껏 숨은 실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뜹니다. 우리의 정신을 쏙 빼놓을 만큼 현란한 기교와 탄탄한 삶의 철학을 가지고 나아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배워야 하고 그들을 누려 마땅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현대의 에피쿠로스 학파요 스토아 학파들이며 그들의 후예들입니다. 저들은 예수와 부활에 관해서는 아무런 흥미도 관심도 깨달음도 없습니다.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행17:18)"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행17:20) 지혜를 얻고자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인 예수를 들을 귀가 없습니다. 행복을 얻고자 하지만 행복의 근원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해 깨닫는 가슴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는 사람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신 것이 아니라,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입니다"(행17:24-25) 그러니 그분은 하늘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교회에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걸어가며 들어가며 일하며 만나는 매순간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거룩한 척하고 세상에서는 자기 습관대로 행하는 사람은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 바로 곁에서 보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그분은 우리의 섬김이 필요한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호흡을 주시고 만물을 친히 주셔서 우리를 섬기신 분이십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습니다"(행17:26). 하나님은 오직 한 혈통으로 모든 인류를 만드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간혹 생명과 호흡과 만물로부터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행17:27). 하나님은 얼마나 우리에게서 가까운가요? 수백 km 상공에 계신가요? 수억 광년 너머에 계신가요?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 자신 속에도 계시니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합니다"(행17:28a). 내가 사는 것은 하나님의 힘으로 사는 것이며, 내가 움직이며 활동하는 것도 하나님의 힘으로 움직이며 활동하는 것이며, 심지어 내가 존재하는 것도 하나님의 힘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나의 행실, 그 수많은 사람들의 행실과 마음의 숨겨진 동기와 비밀을 보지도 못하시면서 어떻게 공의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그분은 우리 존재 속에 계시고 우리 존재를 살게 하시고 움직이시며 명을 따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믿는 사람들을 아무리 욕하고 다녀도 교회에 발걸음을 한 번 옮기는 것이 두렵고 떨림이 되는 이유는 왜 그렇습니까? 자기 마음 속에 온갖 부패와 악이 드러날까 겁이 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되 마음 속에 그분의 강력한 사랑만이 아니라 그분을 두려워하는 마음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믿지 않을 때에도 우리를 살게 하시고 활동하게 하시고 존재하게 하셨듯이, 믿은 이후에도 우리를 살게 하시고 활동하게 하시고 존재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내 마음 가는대로 내 마음이 끌리는대로 마냥 그렇게 사는 것은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행위입니다. 다만 우리 마음이 허용하는 대로 살 수 있는 까닭은 그분의 은혜와 진리의 보증 안에서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생이 하나님의 자녀로 어떻게 변화되는 걸까요? 여기까지 인정하고 다 안다고 하여도 여전히 하나님의 소생일뿐 하나님의 자녀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소생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비결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행17:30)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한 혈통으로 지으셨다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 지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의 범죄가 동일하게 우리 속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성향이 우리 속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 현자의 말이 더욱 새롭게 들리는 것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반역의 역사는 바로 나의 반역의 역사입니다. 단 한 사람도 여기에서 예외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하나님께서 계시기를 원하시는 곳은 어디일까요?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시면 그분이 가장 기뻐하시는데 그곳이 어디일까요? 하늘입니까? 교회 건물입니까? 어디입니까? 그곳은 바로 내 마음이며 당신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 속에 좌정하시기를 무엇보다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십일조 헌금봉투 속에 계시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교회 강대상 근처에 계시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름있는 교회나 기도원에 계시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도 있을꺼야.' 우리는 생각합니다. '오리가 도시를 가로질러 갈 수 있는 수로를 만드는 정도의 정성을 가진 사람은 배려도 있을꺼야' 우리는 생각합니다. '평생 술 담배를 멀리하며 건강을 위해 채식을 즐겨 먹으며 자기 관리를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지 않을꺼야' 우리는 생각합니다. '성적으로도 금욕적이어서 평생 한 여자만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인격적으로 된 사람일꺼야' 우리는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미술이나 음악, 건축도 보고 들을 줄 아는 예술적인 감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정말 괜찮은 사람일꺼야.' 우리는 생각합니다. '게다가 실의와 낙담에 빠진 민족에게 할 수 있다는 정신을 불어넣어 짧은 기간 안에 경제를 회복한 사람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아, 그 정도면 됐어 모자람이 없어' '혹시 이런 사람이 실존인물이라면 그는 아마도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그러나, 여러분! 이 사람이 바로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죄가 영혼을 다스리고 있는 한, 아무리 아름다운 행실과 흠모할 만한 삶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죄의 권세를 이길 수 없고,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계시지 않습니다.

  내 마음아 보아라! 당신 마음아 보아라!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17:3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그분의 죽으심과 함께 죽었음을 시인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소생이지 하나님의 자녀는 아닙니다. 나는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내 마음 속에 계셔서 내 삶을 다스리신다는 확신이 없으면 그는 하나님의 소생이지 하나님의 자녀는 아닙니다. 왜 믿을 만한 증거라고 했습니까?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여도 그 몸에 죄를 얹으시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왜 믿을 만한 증거라고 했습니까? 죄 없다 함을 받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죽음이 붙들어놓을 수 없고 하나님의 영생이 그를 살리심과 같이, 보혈을 흘리셔서 우리 죄를 씻으신 사실을 믿고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도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예수와 부활을 믿는 사람은 가는 곳이 달라지며, 만나는 사람이 달라지며, 기뻐하는 것이 달라지며, 슬퍼하는 것이 달라지며, 바울과 같이 격분하는 것이 달라지며, 내 마음 속에 양심과 죄악의 전쟁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평강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아테네에는 교회가 제대로 개척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행17:32) 바울은 그들에게서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주 몇 사람만 믿었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이 몇 사람이 되겠습니까? 우리 중에 누가 '아레오바고 관리 디우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에 속하시겠습니까? 누가 하나님의 소생의 삶을 끝내고 하나님의 자녀로 온전히 돌이키시겠습니까?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1월 20일> 성도의 더욱 중한 관심사(행18:1-11) 이정식 2013.01.25 0 106
다음글 <1월 6일> 천하를 어지럽게 할 사람들(행17:1-15) 이정식 2013.01.08 0 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