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6일> 천하를 어지럽게 할 사람들(행17:1-15) | 이정식 | 2013-01-0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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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는 것이 천하를 어지럽히는 것일까요? 장발장으로 알려진 레미제라블이 영화와 뮤지컬, 그리고 5권으로 번역된 책까지 나오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장발장은 보통 빵을 훔치다가 붙잡혀 감옥살이를 하다가 풀려나고, 신부님의 자비에도 불구하고 예배드릴 그릇을 훔치다 회개해서 새로운 삶을 사는 한 남자의 이야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번역을 할 때 의도적으로 권력에 대항하는 장면을 빼낸 결과이거나, 아이들이 이해하기에는 조금 복잡한 문제여서 빼버린 결과입니다. 레미제라블은 프랑스 혁명을 전후로 한 시대상황에서 고통받는 사람들과 장발장이라는 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물으면서 새로운 세상을 소망하는 작품입니다. 한 사람의 성장 이야기가 아니라 세기적인 전환의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사람들의 정열과 절망과 소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 아메리카 혁명 등으로 왕정이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를 꿈꾸던 시대였습니다. 그때 서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의 온 천하가 어지러웠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수많은 혁명과 봉기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단재 신채호가 조선 역사 1천년래의 일대 사건이라고 불렀던 묘청의 난이 있습니다. 성공했다면 묘청의 혁명이었겠지만, 실패했기 때문에 난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12세기 고려 정치는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개경 중심의 문벌귀족과 묘청을 중심으로 한 지방출신의 신흥세력이 경경쟁하고 있었습니다. 너무 사대적인 특권층이었던 문벌귀족에 대해 묘청은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은 지덕이 쇠했으므로 지덕이 왕성한 서경으로 천도해서 고려왕조를 중흥시키고자 했고, 국왕을 황제라 부르고 연호를 사용해 나라의 자긍심을 높이고 자주성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결국 군사행동까지 이어져서 1년 동안 전쟁을 치렀으나 묘청 등이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신채호는 '실상은 이 전쟁의 역사가 낭(郎) 불(佛) 양가 대 유가(儒家)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이 전쟁 역사에서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리하였으므로 조선의 역사가 사대적, 보수적, 속박적 사상, 즉 유교 사상에 정복되고 말았거니와, 만일 이와 반대로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승리하였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 진취적 방면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 전역을 어찌 '일천년래제일대사건(一千年來第一大事件)'이라 하지 아니하랴'고 하였습니다. 이때 조선의 온 천하가 어지러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이 누구인가 하면 총칼을 든 군대로 일어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으로 일어선 바울과 실라, 복음전도자들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1세기에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온 천하를 어지럽게 할 만한 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냥 개인적인 신앙이 아니라, 개인적인 축복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의 제국, 하나님의 제국을 세우려고 한다는 오해를 받을 만큼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무엇을 했길래 그런 일이 생겼을까요? 시작은 마케도니아 빌립보에서 교회를 개척한 이후, 두 번째로 데살로니가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늘 하던대로 안식일에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가 성경을 가지고 강론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굳이 번역하자면 교회에서 주일에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했습니다. 그가 전한 말은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했고, 이어서 이르기를 "내가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말씀을 듣고 있던 무리들 중에 경건한 헬라인, 곧 그리스인의 많은 사람들과 적지 않은 귀부인, 곧 상류층 부인들이 그 말씀을 순종하여 복음을 믿고 받아들였습니다. 유대인의 회당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 설교로 예수를 주라고 시인한 것입니다. 도대체 그 말이 무슨 말이었길래 그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을까요? 잠깐 놔두고 똑같은 설교를 듣던 유대인들을 보겠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시기'였습니다. 그러더니 회당을 나가서 저자거리의 불량배들을 끌어다가 성을 소동케 했습니다. 바울과 실라를 정중하게 모신 야손이라는 사람의 집에 침입해서 그들을 끌어내려고 했습니다. 바울과 실라를 그곳에서 찾지 못하자, 공범자 격으로 야손과 형제들을 끌고 갔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렀는데 야손과 그 형제들이 그들을 맞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한 마디를 더 붙였는데,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행17:7) 아! 이제 바울의 설교의 요점과 그리고 유대인들이 이해한 그리스도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모든 제국은 로마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도, 소아시아도, 마케도니아도, 북아프리카도 모두 로마 제국의 속국이었습니다. 그 나라들 가운데 왕은 있었지만 황제는 오직 로마제국의 황제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만일에 누군가 자기를 황제라 칭하면서 어떤 지역에서 일어난다면 그는 로마제국에 대항하는 사람이 되니 역적이 됩니다. 가이사는 로마 황제입니다. 그런데 가이사의 명, 곧 황제의 명을 거역하는 사람이 일어났는데, 그가 예수라는 임금, 곧 황제라는 말입니다. 역적 모의에 가담한 사람들을 신고도 하지 않고 고발도 하지 않는다면 역적 모의에 가담하는 것이 되니 대역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유대인 무리들과 읍장들이 소동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한다는 말은 바로 로마제국의 황제에 반역을 일으켰다는 말입니다. '바실레아 헤테론 레곤테스 에이나이 예순"(예수라 불리는 또다른 왕)이라고 사도들이 불렀을 때, 이 말은 정확히 로마 제국의 신하들이 황제를 부를 때 쓰던 칭호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이라고 할 때 '퀴리오스'도 죽은 후 신격화된 로마 황제에게 붙이던 칭호인데, 그것을 부활하신 예수님께 사용했습니다. 사실 초대교회 때 있었던 로마의 박해는 황제를 숭배하지 않고 다른 임금을 숭배한다는 사실에 있었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의 시기에서 비롯된 오해이기도 했지만, 정확한 이해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그 설교에서 '무장봉기합시다!' '로마에 대항합시다'라는 말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 나라는 땅에 속한 나라가 아닙니다. 하늘에 속한 나라입니다. 그러니 무슨 고려를 지키려는 사람들과 조선을 세우려는 사람들 사이에 있었던 무력충돌같은 이야기가 전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칼이 없고 창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유대인들은 오해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세우고자 하는 나라가 분명 하나님의 나라라는 점에서는 바른 이해였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세워지는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요 하나님의 제국입니다. 하나님의 제국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제국을 무엇으로 세웠는가 하면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행17:3a)신 예수로 세웠습니다. 하나님의 제국 백성은 어떤 사람들로 이루어집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사람들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제국은 거듭난 사람, 다시 태어난 사람들로 이루어집니다. 굳건한 반석이신 예수 십자가에서 굴복하고 부활하신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집니다. 육신의 정욕으로 이루어지는 세상이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아 죽고, 성령의 소욕으로 다시 부활한 사람들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일컬어 말하기를 생명의 법으로 인도받는 하나님의 사람이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제국에서 사용하는 힘있는 무기가 있다면 그것은 성령의 검 곧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어, 하나님보다 높아진 어떤 이론도 파하는 강력으로 역사하는 검입니다. 세상의 원리와 세상의 영을 물리칠 수 있는 강한 무기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제국의 군사는 세상의 영 곧 악한 영의 쏘아대는 불화살을 막기 위해 구원의 투구를 쓰고,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진리의 허리띠를 두르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은 군사들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제국의 통치 원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본을 보이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하면 좋고 안해도 어쩔 수 없는 사랑이 아니라, 오직 그 사랑의 법으로 세워지는 나라입니다. 연약하고 사랑이 없는 시대에 사랑의 바이러스를 사랑이 다스린다는 것을 실천하고 가르치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제국의 정부입니다. 하나님의 제국의 법은 생명과 성령의 법입니다. 생명과 성령의 법이 사랑을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청년 마리우스는 혁명의 지도자였습니다. 이제 얼마 후면 봉기의 날이 다가올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이루어야 할 혁명의 이념이 있습니다. 그런데 길을 가다가 코제트라는 예쁜 아가씨를 만났습니다. 먼 발치에서 두 사람의 눈길이 부딪쳤을 때,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강하게 끌렸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순간의 빛이 사람을 완전히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마리우스는 갈등합니다. 이제 함께 혁명을 꿈꾸며 봉기의 날을 기다렸던 수많은 동지들을 멀리하고 코제트와의 행복은 나날을 꿈꿀 것인가 아니면 다시금 친구들과 함께 조국에 하나님의 공의가 세워지는 혁명을 꿈꿀 것인가? 고민하다가 부르는 노랫소리 중에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higher calling' 더 높으신 분의 부르심,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르자고. 그렇습니다. 하나님 제국의 부르심은 사랑하는 아내보다도 사랑하는 남편보다도 사랑하는 자녀들보다도, 그들과 꿈꾸는 아름다운 가정보다도 더욱 높은 부르심입니다. 직장의 부르심보다도 세상의 부르심보다도 하나님의 부르심은 더욱 탁월한 것입니다. 세상에 속하였으나 세상에서 구별되어 세상에 하나님의 제국의 통치를 전할 사명을 가진 곳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권력과 권세에 대해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므로 존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만일 세상 권력과 권세가 하나님의 나라를 거스릴 때에는 그들을 따르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를테면 각종 공무원 시험이나 토익 시험을 주일에 보는 것에 대해서 반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히려 '놀토'인 토요일이나 평일에 보도록 하는 운동을 벌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려야 합니다. 비록 기독교 신앙에 대한 악의가 없이 사회적 편의에 의해 만들어진 제도라고 하더라도 공식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훼방하는 것이라면 반대 운동을 해야 합니다. 심지어는 정부 기관도 공공 기관도 아닌 사설 학원에서 주일에 보충 공부, 시험 기간에 하는 집중 공부하는 문화에 대해서 기독교는 책임을 가지고 싸워야 합니다. 회사에서도 주일에 일을 시키는 것을 당연시해 가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런 요구를 기독교의 집단이기주의라고 반박할 만큼 주일을 섬기지 못하도록 하는 문화가 곳곳에 침투했습니다. 이런 요구를 당당히 해내지 못하면 우리 스스로 '원래 그래'하며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것에 대해 무덤덤하게 여기거나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제국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굳게 섰습니다. 주일을 지킨다는 것은 단지 예배를 드린다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 제국의 신민으로서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천국시민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17:11) 내가 누구냐? 하나님 앞에 내가 누구냐?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부르셨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 무엇을 맡기셨는가? 무슨 힘과 능력으로 그 말씀을 지킬 것인가? 하는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욕구가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그런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 하나님의 제국을 믿음으로 보고 나니까 영접하지 않을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할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아닙니까? 세상 원리 위에 서 있는 천하를 어지럽게 해서 하나님의 제국을 만들어가는 것이 바로 교회요 그리스도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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