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3일> 우리를 도우라(행16:6-15) | 이정식 | 2012-12-2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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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이 있다면 그걸 타고 언제 어느 시절로 돌아가고 싶으십니까? 30대입니까 20대입니까 10대입니까 갓 돌을 지난 때입니까? 아니면 스케일 크게 조선시대를 지나 고려시대를 지나 신라시대를 지나 고조선 시대를 지나 온 우주가 만들어질 무렵까지 가고 싶으십니까? 공룡도 보고 아프리카와 미대륙이 붙어있던 시절까지 가고 싶으십니까? 저에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타임머신이 있다면 저는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습니다. 보고 또 보고 또 보고 싶은 순간이 있습니다. 그날은 주님이 저에게 찾아오신 날입니다. 저의 숨겨둔 죄를 깨닫게 하시던 날입니다. 눈물로 주 앞에 굴복하던 날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이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4:5). 이어서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고 하셨습니다. 그날 저는 목사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집사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난 것이 아니라, 나의 주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내 평생에 섬길 주님을 만났습니다. 내 평생에 그분의 말씀을 듣고 따라갈 나의 주 나의 주 나의 예수를 만난 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복음을 알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을 위해 역사를 움직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지만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움직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아주 기뻐하십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세상에 억눌린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유를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하나님의 영이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고 계십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행16:6a)이라고 하였습니다. 돌에 맞아 가면서도 복음을 전하던 바울이었기 때문에 말씀을 전하지 말아야 할 곳은 아무데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령은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막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터키 동남쪽에서 서북쪽에 있는 무시아로 갔습니다. 지나가는 땅의 서쪽이 브루기아요 동쪽이 갈라디아 땅이었으니 그 사이를 지나 무시아로 갔습니다. 그런 후에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터키 북쪽 지방으로 가고 싶었는데 거기가 비두니아였습니다. 하지만 그때에도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겠다고 작정이 되어 있었지만 갈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일 때문인지 성경은 말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서북쪽 끝에 있는 무시아에서 가까이에 있는 드로아로 내려갔습니다. 바울은 복음 전하는 일에 헌신되어 있었지만 예수의 영이 다시 한 번 막았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바울의 계획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왜일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9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행16:9) 바울은 자기의 계획을 이루어달라고 계속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비두니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면 터키 북쪽까지 주의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 문을 열어주십시오. 거기에 주의 백성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은 이것이었습니다. "마게도냐로 건너가라. 거기서 네가 할 일이 있다. 터키 서쪽 아시아와 터키 북쪽에 대해서는 나도 알고 있다. 거기에 또 다른 전도자를 통해서 복음을 전할 것이다. 그러니 너는 마게도냐로 건너가라." 환상 중에 나타난 사람은 주의 천사가 아니라 마게도냐 사람이었습니다. 그 말은 마게도냐에 있는 사람 가운데 주의 구원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주의 복음을 믿고 기쁨으로 영접할 준비가 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저마다의 일로 바쁘고 각종 사고와 사건이 홍수같이 생겨나고 있는 때에도 하나님은 천하보다 귀한 한 사람이 예수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그 일에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 그 일 때문에 그 유명한 바울이 자기 계획이 있어도 막으시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자를 구원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기도하며 응답을 구하는 일이 있으십니까? 그 일이 구체적으로 마음에 작정된 일입니까? 오래된 제목입니까? 그런데 열리지 않고 응답이 더딘 일이 있으십니까? 그러면 눈을 들어 주변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문을 열어두고 계십니다. 우리가 만날 사람은 터키 사람이 아니라 마게도냐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터키 사람이 아니라 마게도냐 사람이 간절히 원하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더욱 구체적으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때로 어떤 일에 대해서는 금지하고 제지하시며, 어떤 일에 대해서는 허용하시고 강권하십니다. 선교사 리빙스턴은 중국으로 가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아프리카로 인도하셨습니다. 윌리엄 캐리는 남태평양에 있는 폴리네시아로 가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인도로 가게 하셨습니다. 저드슨은 인도로 갔지만, 나중에 버마로 가서 사역했습니다. 김선길 선교사님은 요르단에 가서 사역했지만 모로코로 건너가게 되었고, 김연규 선교사님은 호주에서 사역했지만 미얀마 곧 버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인도하심에는 복음을 위한 일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일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기가 계획한 일이 막히었다고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내어맡길 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일을 지으시는 분도 하나님이요, 그 일을 지어 성취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일 뿐만 아니라, 복음의 일에 관해서는 더욱 하나님께서 주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환상을 본 바울이 어떻게 하는지 보겠습니다.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행16:10). 다윗은 아들이 죽음에 처했을 때 식음을 전폐하고 울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하나님, 저를 긍휼히 여기시고 종에게 인자함을 베푸셔서 혹시라도 아들의 생명을 건져주시옵소서" 그러나 하나님은 아들을 데려가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아들을 잃은 그날부터 다윗은 음식을 먹고 왕의 업무를 계속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작정하신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마을 주민들, 함께 자란 친구들, 직장 동료들, 사회에서 새로 알게 된 사람들, 페북 친구들... 그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고 구원을 얻기를 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모두가 우리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심드렁하게 여길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담당할 우리의 사람들을 따로 두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그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겠지만 말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마음이 가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과 일행이 마케도냐의 첫 성 빌립보에 이르렀습니다. 거기서 몇 일을 있다가 안식일에 기도할 곳을 찾던 중에 강가에 모인 여자들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우리 나라 문화라면 강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저런 말을 하다가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들 중에 한 사람 루디아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색 옷감 장사이었는데,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지만, 자신의 주를 알지 못해 늘 궁금해 하던 여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 예수를 보내신 것과, 예수께서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이 말을 여자들 몇 사람이 다 함께 듣고 있었는데 주님께서는 루디아의 마음을 열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그저 그런 이야기로만 들었지만 루디아는 바울의 전한 복음을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바울은 계속했습니다. "회개하고 이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사람은 침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시인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주를 믿은 루디아는 침례에 순종하라는 말에 기쁘게 순종했습니다. 15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와 그 집이 다 침례를 받고" 하나님은 루디아와 그 온 집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계셨습니다. 루디아와 그 집 사람들은 빌립보 교회의 초창기 창립 멤버가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 한 모친께서 전도를 하시다가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분이 구원받고 침례받아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한 자매님께서 사회에서 만나 알게 된 분을 교회로 인도했습니다. 그분이 구원받고 주의 말씀 안에서 든든히 서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기쁨을 맛보고 있습니다. 서로 친한 사람들이 함께 강가에 모여서 바울을 만났고, 바울의 복음을 들었지만, 루디아 한 사람만 감동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지만,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믿음은 그 영혼이 '나를 도우라'는 원함이 있는 사람의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서서 따라다니며 그분이 하던 놀라운 일들을 보면서 놀라고 있을 때, 삭개오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갈급함으로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아무도 가까이 하고자 하지 않았던 삭개오였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삭개오는 오직 주만을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19:5) 그 한 마디 말로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19:9)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원래 예수님을 전하려고 했던 터키 서쪽 아시아와 터키 북쪽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바울이 3차 여행을 시작할 때 터키 서쪽 아시아에 에베소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7교회는 에베소 교회를 선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7교회 모두 터키 서쪽 아시아 지방의 교회들입니다. 그러니까 터키 서쪽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 의해 교회가 개척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에게 그 땅을 맡기지 않고, 그의 제자들의 손에 그 땅을 맡긴 것입니다. 말 안 듣는 자녀들, 깨닫지 못하는 친구들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영원히 버려두지 않으시니 그를 위한 사람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그를 위한 때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는 다만 우리에게 맡기실 사람, 먼저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사람을 주목할 따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통해 구원받고 침례에 순종하며 하나님께 기쁨으로 영광을 돌릴 사람을 정해두고 계십니다. 그들은 스스로 무엇을 찾는지 알지 못하지만, 우리의 입을 통해 그렇게도 만나기 원했던 주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아직 알려져 있지 않은 그들의 마음 속에는 이런 간절한 요청이 있습니다. "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교회만이 아니라 우리 각 사람에게도 하나님은 누군가를 맡기고 계십니다. 그가 누구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쓰실 곳이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구원으로 이끌 누군가가 있습니다. 나의 친구일 수도 있습니다. 나의 직장 동료일 수도, 직장 상사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 이 동네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와서, 나를 도와주세요!" 하나님은 여기 건물이 있는 교회로 끝이 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곳이 구원하는 캠프가 되기 원합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 아니 우리 속에 계신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을 찾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고, 다시 떠났다가 돌아오는 베이스캠프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한 이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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