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6일> 나의 디모데(행16:1-5) | 이정식 | 2012-12-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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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하면 걸걸한 목소리로 창을 하는 명창이 생각납니다. 그런데 일고수이명창이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명창이 창을 하는데 그 노래가 잘 될 수 있도록 북으로 장단을 맞추며 추임새를 넣는 사람이 고수입니다. 신식으로 하면 보컬은 명창, 반주는 고수가 되니 노래하는 사람을 먼저 쳐줄텐데, 장단을 맞추는 고수가 첫째라는 말입니다. 고수가 장단에 맞춰 북을 치면서 판소리 대목마다 감정을 실어서 '좋~다' '얼씨구' '얼~쑤' '허'라는 추임새를 때에 맞게 하지 않으면 소리꾼이 힘이 듭니다. 장단에 맞춰서 북을 잘 쳐도 추임새가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 소리가 안 됩니다. 그래서 고수를 귀명창이라고도 합니다. 청중들 가운데서도 귀명창이 있어서 추임새를 넣을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고수가 판소리 흐름을 알고 있으니까 북도 치고 추임새도 넣게 되기 때문입니다. 목이 터져라 하고 노래는 소리꾼이 하는데, 북치는 고수가 첫째라는 말은 거기에서 나옵니다. 신영희 명창을 알고 계신가요? 여자는 시집 가서 평범하게 일부종사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하던 시절에 소리꾼이 되었습니다. 11살 때부터 입문한 그가 60년 소리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동생이 신규식 씨인데 아주 어려서부터 북을 잘 쳤다고 합니다. 하지만 공부를 하다가는 사업으로 나아갔는데, 운명이었던지 오래 전에 고수로 돌아와 30여 년간 호흡을 맞추고 있습니다. 명창은 명창대로 득음의 경지에 나아가기 위해서 피나는 훈련을 합니다. 새타령을 부르면 새가 와서 똥을 쌀 정도로 소리를 가다듬는 것입니다. 양동이 세 통 가득 피를 쏟아낸다고도 하고, 천지연 폭포 앞에서 그 폭포를 뚫을 때까지 연습을 한다고도 합니다. 그래서 '득음'이란 본래 제 소리가 아닌 것을 새로이 얻어내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고수 역시 판소리의 흐름을 꿰뚫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 역시 득음의 경지를 찾아 가는 명창이며, 소리를 되게 하는 고수의 추임새가 있어서 서로를 이루어가는 일입니다. 바울에게는 디모데가 있었습니다. 모든 성도가 각기 자기의 디모데를 얻는다면 정말 좋을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맞추며 뜻을 맞추고 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를 애쓰는 사람이 있다면 행복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이렇게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세간에 떠도는 교회에 관한 못된 이야기들은 한참 수준 낮은 이야기입니다. 바울과 함께 호흡을 맞추었던 디모데를 살펴보면서 '나의 디모데'를 꿈꿀 수 있기 원합니다. 사도들이 이고니온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 이방인과 유대인들과 그 관리들이 돌로 치려고 달려들었습니다. 그것을 알고 도망하여 간 곳이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였습니다(행14:6). 사도들은 거기서도 계속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때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디모데입니다. 그래서 오늘 16장 1절에서 2차 선교여행을 하며 선교지를 다시 한 번 돌아볼 때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라를 택한 바울은 디모데와 함께 2차 선교여행을 하고자 했습니다. 디모데는 누구보다도 바울의 사역에 중요한 사람입니다. 디모데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디모데는 나이가 바울보다 어렸습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딤전4:12-13) 그리고 내성적이고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1:7-8) 자주 아픈 것은 그 성격으로 인한 신경성 병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딤후5:23) 또한 의지력이 강한 사람이기보다는 동역자로부터 격려와 동기부여가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딤후1:6) 보통 사역자라고 하면 듬직한 체구에 위엄있는 목소리, 그리도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는 추진력을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런 기준에 비추어 볼 때 디모데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성적이고 소심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전혀 할 수 없겠습니까? 아닙니다.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런 성격적인 부분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질그릇 안에 예수 보배를 모신 사람이면 누구나 사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디모데가 바로 그런 실례입니다. 이런 성격의 소유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었는가 하면 그의 믿음입니다. 그의 믿음은 '거짓이 없는 믿음'이었습니다. 혹시라도 '나는 이래서 안돼'라고 생각하는 사람, 아니 오래전에 이미 생각을 끝낸 사람이 있습니까? 다시 생각하실 수 있기 바랍니다. 날 때부터 귀하게 태어난 사람 천하게 태어난 사람이 없듯이, 날 때부터 하나님의 일을 하기로 작정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생각의 대부분은 거짓된 속임입니다. 한편 디모데의 믿음은 먼저 믿은 부모에게서부터 받은 것입니다. 디모데가 전수받은 믿음은 '거짓이 없는 믿음'이었습니다.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부터 조상적부터 섬겨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네 속에 있는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1:3-5) 아버지는 헬라인이었는데 아버지의 믿음에 대해서는 성경에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찌됐건 바로 그런 믿음 때문에 디모데는 자기가 살고 있던 지역사회에서 칭찬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자니"(행16:2) 중요한 한 가지 기준은 자기가 생활하고 있는 교회와 생활터전에서 믿음으로 칭찬받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칭찬받는 것은 기본적으로 행할 도리를 다 행하는 것이 첫째입니다. 목사의 지도력에 순종하며 예배의 본이 되는 것과 각 부서의 활동에 성실하게 임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보이는 교회의 지도력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순종한다는 사람만큼 교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알아가고자 개인적으로 시간과 수고를 들이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고자 하며, 전체의 유익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보여지고 느껴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적당한 신앙생활'이란 없습니다. 마리아와 같이 예수님의 발치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런 디모데를 발탁해서 함께 주의 일을 하고자 했습니다.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 새"(행16:3a) 바울은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디모데를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골1:1)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몬1:1)"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고후1:1) 그 다음에는 '동역자'로 불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빌1:1)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디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롬16:2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살전1:1, 살후1:1). 또한 '조력자'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있으니라"(행19:22) 그리고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7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행20:4). 안수를 받아 사역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4:14-15) 그 후로 바울은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딤전1:2a)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딤전1:14)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딤후1:2) 빌립보서에서는 바울이 디모데를 얼마나 신뢰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빌2:19-22) 바울과 디모데가 서로를 도울 수 있었던 것은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복음에 붙잡혔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때로는 사역을 위해서 떨어져 있었고, 때로는 함께 하기도 했는데 떨어져 있는 시간에도 복음을 위한 열심에는 한 가지였습니다. 명창도 고수도 판소리 대본과 그 이야기 흐름을 꿰고 있어야 하듯이, 바울과 바나바도 복음의 일을 꿰뚫고 있었습니다. 각 사람을 예수 복음 안에서 사랑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자기의 일을 구하여 믿음생활을 할 때, 디모데만은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였습니다. 헌신했습니다. 함께 사역하는 과정에서 디모데는 구원받고 칭찬받는 한 형제로 불리다가, 나중에는 동역자로 일컬어졌고 그리고 더욱 나중에는 아들로 불리었습니다. 그 관계가 얼마나 깊어졌습니까. 그 둘 사이가 얼마나 끈끈하게 이어졌으며 신뢰로 똘똘 뭉쳐 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복음을 위해 함께 수고하며 함께 즐거워하며 함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서로를 격려하며 위로했을지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무렵에는 터키의 끝 쪽에 있는 에베소 교회를 지도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겼습니다. 그리고 목회서신을 통해서 디모데를 끊임없이 격려하고 세워주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정말로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그가 로마 감옥에서 마지막 생애를 다해갈 무렵에 쓴 디모데후서에는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딤후4:9)고 썼습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딤후 4:16a)을 때 간절한 사랑을 담아 쓴 말입니다. "디모데야!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우리 스스로가 먼저 디모데가 되기를 바라십시오. 그리고 나의 디모데를 만나기를 소망하십시오. 욥은 고백했습니다. "나의 마음이 나의 생애를 비웃지 아니하리라"(욥27:6)고 했습니다. 올해부터 50주년이 되는 5년 동안 우리가 들고 나갈 표어는 "그리스도인을 낳는 그리스도인, 교회를 낳는 교회"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그리스도인으로 낳았고, 함께 사역하며 가르침을 주어 강건케 하였고, 새로운 교회를 개척해서는 그 교회의 목자로 세웠습니다. 이 간결한 교회사역의 그림을 그릴 수 있겠습니까. 앞으로의 우리 비전을 마음에 품을 수 있겠습니까. 득음의 경지를 위해 호흡을 맞추었던 바울과 디모데는 참으로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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