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9일> 바나바와 바울(행15:36-41) | 이정식 | 2012-12-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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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바와 바울이 서로 심하게 다툰 후에 서로 갈라섰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갈 길로 떠났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몰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은 신약시대에 이런 일은 성경에 안 나와도 좋을 뻔할 일인데, 성경은 이 사건을 보란듯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쩌다 말다툼 한 번 했다고 등질 수 있나 이보게 친구 웃어나 보게"하는 노래도 있는데, 한 번의 다툼 끝에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아이들 장난도 아니고, 자존심만 내세울 사람들도 아닌데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이루어진 사실임을 보게 됩니다. 바나바는 보통 인물이 아닙니다. 그가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초대교회 가난한 자들이 많아졌을 때 자기 밭을 팔아 그 값으로 사도들 앞에 둘 때였습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하니"(행 4:36)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바나바를 평가하실 때 "착한 사람"(행11:24)이라고 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었고 위로를 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바울을 알아본 사람이며 바울을 발탁한 사람입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했을 때 모두가 그의 과거를 알았기에 믿지 않고 도리어 두려워했습니다. 그때 바나바는 그를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바울이 주 예수를 어떻게 보았고 어떻게 말씀하셨고, 얼마나 담대히 복음을 전했는지를 전하며 설득했습니다. 바울은 바나바 덕분에 계속해서 복음의 도시 예루살렘에 출입하면서 제자들과 교제했고, 또 그 교제가 암묵적인 위임장 구실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나바는 바울의 길을 열어준 사람입니다. 소개만 해주고 나 몰라라 한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바울을 발탁했습니다. 이방인의 땅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주께 돌아왔을 때 예루살렘 교회에서 바나바를 그곳에 파송하여 믿음을 굳게 하도록 했습니다. 바나바의 사역 속에서 안디옥 교회는 더욱 성장해갔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바나바에 대해서 그가 착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행11:24)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바나바가 즉시 행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다소에 가서 사울을 찾은 것입니다. 다소는 사울의 고향인데, 거기서 사역하는 사울을 데려다가 둘이 교회에 일 년간 함께 사역해서 큰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이때 얻은 이름이 '그리스도인'이었을 정도로 사역이 왕성했습니다.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역을 '둘이'(행11:26) 이루었다고. 바울은 어떤 사람인가요? 바울은 한 마디로 충성된 사람입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1:2) 얼마나 충성된 사람인가 하면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1:13) 하나님께 충성된 자가 되기 위해 스데반 집사를 처형하는 데 앞장 섰고, 그 일 이후에도 주의 제자들을 잡아 넣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살기가 등등한 눈으로 살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부활하신 예수께서 직접 만나주셨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9:15-16) 하였습니다. 또한 바울은 심는 자였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나니"(고전3:6) 바울은 미지의 땅을 개척해 들어가는 개척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바나바의 마음 바탕은 착한 사람이었고, 그것이 사역 속에서 위로하는 사람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바울의 마음 바탕은 충성된 사람이었고, 그것이 사역 속에서 개척하는 사람으로 나타났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 두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의 동행은 아름다웠고 영광스러웠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이 두 사람을 얼마나 신뢰했는가 하면 천하에 흉년이 든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부조를 바나바와 사울의 손에 맡겼습니다. 돈은 아무나 맡길 수 없습니다. 그 두 사람이 동행하면서 얼마나 정겹게 이야기나누며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주고 받고 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두 사람을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주를 섬겨 안디옥 교회 지도자들이 금식할 때에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행13:2)하였으며, 이때부터 교회의 공식적인 세계 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두 사람을 특별히, 그리고 함께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행13:9)라고 부르시면서 이제 사울(큰 자)로서의 생애는 완전히 끝났다고 말해주십니다. 이제는 바울(작은 자)로서 하나님을 겸손히 높이는 자로 살게 되었고, 그 뒤로부터는 바울이라는 이름이 첫 머리에 등장합니다. 바나바는 제우스로 불리고 바울은 헤르메스(행14:12)로 불릴 만큼이나 이 두 사람의 신앙은 최고봉이었습니다. 복음에 관한 다툼이 벌어졌을 때 바울과 바나바는 한 팀이 되어 순전한 복음을 말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했습니다(행15:12). 그 둘이 처음 공식적인 세계 선교를 시작한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게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했습니다(행15:35). 두 사람의 합력은 영원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야만 옳다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이 이 두 사람을 보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요 우리가 사랑하는 바울과 바나바"(행15:25-26)라고 평가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간 일이 생긴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큰 문제였길래 이런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갔을까요? 선교여행 때 마가를 데리고 가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돌아왔습니다(행12:25).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행13:5) 마가는 신실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감옥에서 나왔을 때 제자들이 기도하고 있던 곳이 바로 마가의 집이었습니다.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있어 기도하고 있더라"(행 12:12) 그런데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행 13:13-14a)라고 쓰고 있습니다. 성경은 요한 마가에 대해서 잠깐씩, 지나가는 장면처럼, 복선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2차 선교여행을 시작하려고 할 때 문제가 생겼는데 바로 마가 때문이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행15:37-38). 그러니까 마가가 선교여행 도중에 떠나간 일이 아무 일이 아닌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굉장히 큰 실망과 낙담을 안겨주는 일이었습니다. 힘을 빼놓는 일이었습니다. 바울 마음에 마가와 함께 일할 수 없고 함께 일해서는 안되겠다는 작정이 될만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의 다툼과 갈라섬보다 이 두 사람이 얼마나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둘이 갈라져 각자의 길을 갈 때에도 복음의 길을 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함께 일할 때나 따로 떨어져 각자의 길을 갈 때에나, 계속해서 복음의 열매를 맺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이 두 사람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두 사람을 함께 일하도록 주선한 분은 성령 하나님이었습니다. 이제 갈라서는 일에 관해서 성령께서 "이제 갈리우라"고 말씀하신 적은 없지만, 성령께서는 두 사람의 헤어짐을 허락하셨습니다. 때가 찬 것입니다. 전도서 3장 1-8절에는 하나님께서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함께 사역할 때가 있고, 각자 따로 사역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심히 다투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날카로운 불일치'라고 했으니까 날선 다툼이 있었음을 말합니다. 바나바는 사람을 세우고 격려하고 계속해서 기회를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더디가도 사람을 세우면서 일을 이루어가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아무도 가지 않은 땅을 개척하고 심는 사람입니다. 어떤 일을 이루는 데 모든 힘을 쏟는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우유부단함과 사람을 과도히 배려하는 모습을 질책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그 사람에게 진리의 이름으로 사람에게 너무 단호하다며 질책할 수 있습니다. 바나바의 섬김과 격려를 통해서 바울이 자랄 수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자기 의견을 고집하며 끝까지 강하게 나오는 바울에 대해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바나바의 사람을 중시하는 태도는 한 때 두 사람을 서먹서먹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11절에13절에 걸쳐 바울은 베드로와 바나바를 모두 말씀으로 책망했습니다. 베드로가 외식하고 다른 유대인들도 덩달아 외식할 때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갈2:13). 사람을 중시하며 격려하는 바나바의 강점은 사람의 의식하며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약점을 동시에 안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보다 일의 성취를 중시하는 바울의 강점은 사람을 잃기 쉬운 약점을 동시에 안고 있어서 바울의 마지막 사역 속에서 그와 함께 하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떠나갔습니다. 흔히 말하기를 바울은 강한 사람이고 베드로는 부드러운 사람입니다. 바울은 일을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고 바나바는 사람을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깃발을 들고 앞으로 돌격하는 사람이요 바나바는 뒤에서 밀어주는 후견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마음 바탕이 다른 두 사람이 충분히 연합하여 아름다운 동행을 이룰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 마음 바탕이 다른 두 사람을 하나님이 강건케 하실 때는 따로 떨어져서 각기의 일에 집중할 수 있다고. 하나님께서는 이 두 사람을 갈라세우셨을 뿐, 두 사람 가운데 누구를 더욱 옳다고 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바울의 사명을 감당했고, 바나바는 바나바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서 복음의 일을 계속했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여러 곳을 다니며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단지 바울이 바울의 사명에 충성하고자 했을 그때에 마가가 적절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바나바는 바울과 마가를 알아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사람을 너무 의식하는 것은 삼가되 사람을 알아보는 영적 안목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달음질치는 열정과 도전정신이 있었습니다. 마가는 베드로전서 5장 13절에 보면 마가는 베드로의 수제자였습니다. 베드로와 사역하면서 마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역의 마지막 때에 이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부탁했습니다.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모든 제자들이 자기를 버려두고 떠나 고독하게 된 바울의 마지막 고백은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4:11) 바울의 이 고백을 보십시오.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나의 일은 복음의 일이요, 나의 일은 교회를 개척하는 일이며, 나의 일은 복음을 심는 일이었습니다. 주께 받은 그 일을 이루는 데에 마가가 유익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나바도 바울도, 그리고 둘 사이를 갈라놓는 빌미가 되었던 마가도 모두 복음을 위해 일한 사람들이며, 서로서로에게 유익한 사람이었습니다. 서로의 마음 바탕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따라 섬길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서로의 약점을 붙잡아 끌어내리려고 하지 말고, 서로의 강점과 은사를 따라 더욱 섬길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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