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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일> 순전한 복음(행15:1-29) 이정식 2012-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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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누구나 흠이 없고 티가 없는 것을 좋아합니다. '티 없이 맑은'이라는 말을 들으며 싫어할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음 흠이 많고 티가 섞여 있는데 도리어 그래서 그런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나 흠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은 좋습니다. '순전하다'는 말도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흠없이, 그리고 티없이 지키기를 원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 복음입니다. 그리고 예수 복음이 흠없고 티없이 지켜내질 때 우리 모든 사람에게 소망이 생깁니다. 만일 복음이 더러워진다면 사람은 희망이 없습니다. 세탁기에 녹물이 들어간다면 빨래가 되겠습니까. 그 녹물을 페브리즈로 쓕쓕 하면 없어지겠습니까. 옷은 더러워져 못쓰게 될 뿐입니다. 1급수 깨끗한 물에는 고기가 살 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1급수 깨끗한 물은 사람이 마실 수 있는 물입니다. 덜 깨끗한 물에는 각종 고기가 살지만, 깨끗한 물은 사람을 살리는 물입니다.

  동인이와 동신이는 형제간입니다. 큰 아들 동인은 기독교 학생 회장이었는데, 예수 믿는 친미파로 몰려 1948년 여수순천사건 때 좌익 학생들에게 끌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내가 죽고 난 후에라도 너희들은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라. 나는 천당으로 간다마는 너희는 무서운 지옥 형벌을 어떻게 면하겠느냐" 동생 동신은 형의 시신을 끌어안고 흐느끼다가 "왜 죄 없는 사람의 피를 흘리느냐 피흘린 죄를 어떻게 면하려고 하느냐 이제라도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라"고 하니 둘러선 학생들이 "이놈은 형보다 더 지독하다"하며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동인이 스물 네살 동신이 열 아홉 살이었을 때였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손양원 목사는 10가지 감사를 표시한 후에, "여러분, 다른 민족이라도 구원해야 할 터인데 동족끼리의 골육상잔은 민족의 비극이요 국가의 참사입니다. 보복행사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이 민족 이 동포가 이래 죽고 저래 죽으면 그 누가 남겠습니까 그런즉 내 곧 사람을 보내 두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토록 하고 그를 양아들로 삼겠습니다" 아들을 죽인 사람은 안재선. 계엄군에 의해 체포되었을 때 손양원 목사는 구명운동을 하여 그를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안재선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양자삼겠다고 했을 때 가장 힘들었던 사람 중에 하나는 그의 딸 동희였습니다. 오빠를 죽인 원수를 '오빠'라고 불러야 한다니 그것이 용납될 수 있었겠습니까. 먼훗날 그가 자기를 찾아와 진정으로 용서를 구하였을 때 부둥켜 안고 많은 눈물을 흘리며 용서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15일 후에 소천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남긴 말은 "동희야 미안하다... 나는 곧 천국에 간단다. 천국에 가면 아버지인 손양원 목사님과 네 오빠이며 내 친구인 동인, 동신이를 만날 수 있겠구나. 부디 나를 용서하려무나"였습니다.

  우리는 손양원 목사님의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한 데 있을까요? 그분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신사참배를 거절할 강직한 신앙에 있을까요? 그분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위험을 무릅쓰고 나병환자들과 끝까지 함께 한 데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순전한 복음을 향한 그의 갈망입니다. 오직 복음이 그를 그렇게 살게 한 것입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남는 신앙이 그를 순교하게도 한 것입니다. 그를 기리기 위해 동상을 세울 필요가 없는 것은 순전한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이후 교회 내에서 가장 큰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특히 이방인에게 예수 복음이 들어가 구원받는 사람이 많아졌을 때, 먼저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던 유대인들이 나중에 하나님께 들어오는 이방인들을 문제삼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행15:1) 5절에 보면 이 사람들은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행15:4).

  바리새파로 대표되는 유대인들이 말하는 것도 이런 것과 같습니다. "너네들이 예수를 믿어 구원받았다고 하지만, 할례와 모세 율법을 지키지 않고는 양자될 수 없고, 또 하나님의 자녀될 수 없다. 그러니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너희도 예수를 믿을 뿐 아니라 할례도 받고 모세 율법도 지켜야만 우리와 같이 될 수 있다. 그러기 전에는 어림없는 소리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믿음으로냐 행위로냐. 우리는 이 사람들이 왜 이런 주장을 하게 되었는지 그 심정을 먼저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그들에게도 진정성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말씀을 가지고 진정성있게 주장한 것입니다.

  한참을 다툼을 하는 가운데 베드로가 일어났습니다. 베드로는 구원을 얻는 것은 복음의 말씀을 듣고 성령을 주어 믿음으로 받는 것이라고 했습니다(행15:7-9).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행 15:10)라며 바리새파 그리스도인을 꾸지람을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이어서 1차 선교여행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간증하며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야고보가 일어나 아모스서의 말씀으로 복음만이 구원의 문인 것을 선포했습니다. "선지자의 말씀이 이와(시므온 베드로) 일치하도다"하면서 아모스 9장 11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바리새파 그리스도인과 사도들 사이에 심한 언쟁이 있었던 것과 아모스 서를 인용한 것을 보면 사람들은 아모스 서를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모스에서는 할례를 통해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의 죄악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백성에게 죄를 묻기를 혹독하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4:4-5) 이미 할례로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이스라엘의 행위의 죄를 하나님은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할례도 받았고 율법도 지켜 제사를 드리며 십일조를 드리며 감사예물도 드렸습니다. 신앙생활을 아주 잘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은 조소하시고 비아냥거리시고 혹독하게 비난하십니다. '너희의 그 모든 행실은 너희의 기뻐하는 바였으며 나는 아니니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희는 정의를 쓸개로 바꾸며 공의의 열매를 쓴 쑥으로 바꾸며 허무한 것을 기뻐하며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뿔들을 취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는도다"(암6:12b) 정의와 공의를 기쁘게 행해야 할 것인데, 그것을 몹쓸 것으로, 먹기에는 너무 쓴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행하지 않았습니다. '허무한 것을 기뻐한다'고 했는데, '허무한 것'은 히브리어로 '로 디바르'인데, 이는 '말씀이 아닌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지 않고 다른 것을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예수의 피로 할례를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를 믿노라 하고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를 싫어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분노하시지 않겠습니까. 이 사실을 바리새파 그리스도인들이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방인들이 구원받았다고 할 때 그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할례도 받아야 하고 모세의 율법대로 행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이스라엘의 형편으로 돌아가보면 하나님은 아모스의 입를 통해 이스라엘이 회개하도록 일하셨습니다. 첫 번째로 양식이 떨어지게 하면 돌아오리 했지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암4:6).  두 번째로 비를 내리지 않아 마실 물이 없게 하면 돌아오겠거니 했지만 그때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암4:7-8), 세 번째로 곡식에 재앙과 과실수에 흉년이 들게 하면 혹 돌아오리라 했지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암4:9). 네 번째로 전염병을 돌려 죽은 자의 악취가 코를 찌를 때는 돌아오리라 했지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암4:10). 다섯 번째로 소돔과 고모라처럼 성읍을 무너뜨려 불 붙는 가운데 빼낸 나무조각 같이 되면 돌아오리라 했지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암4:11).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암4:12b)며 두렵게 할 만한 눈을 부릅뜨고 어금니를 깨물어 앙다짐하듯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돌아와 네 행위를 계산하겠다"고 말씀하심과 같습니다. 그날 그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한 백성, 할례를 주고 모세 율법을 지키며 신실하게 제사하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시청각 교육을 시키십니다. "보라 곡식단을 가득히 실은 수레가 흙을 누름같이 내가 너희를 누르리니 빨리 달음박질하는 자도 도망할 수 없으며 강한 자도 자기 힘을 낼 수 없으며 용사도 자기 목숨을 구할 수 없으며 활을 가진 자도 설 수 없으며 발이 빠른 자도 피할 수 없고 말 타는 자도 자기 목숨을 구할 수 없고 용사 가운데 그 마음이 굳센 자도 그 날에는 벌거벗고 도망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2:13-16). 마치 꿈에 가위 눌린 사람같이, 그들이 실제로 도망할 수도 피할 수도 건질 수도 없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바리새파 그리스도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에 다른 것을 섞는 것입니다. 행위를 섞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정결한 보혈만으로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양자 되려면 몸의 할례도 받아야 하고 모세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에게 외면받는 이유도 선한 행실의 부족 때문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거기서 우리는 잘못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에서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더니...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갈2:1-4)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사도행전 15장의 이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갈2:5) 오직 복음의 진리 가운데 있게 해서 예수 안에 있는 자유를 지키고자 했습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함이라"(갈2:19) 우리가 들은 복음은 율법에 대하여 죽는 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죄는 사망을 가져옵니다. 그러니 말씀을 지키려고 애를 써본 사람이 도달하는 곳은 우리의 죽음입니다. 한 말씀 한 말씀을 지켜 순종하여 하나님께 인정받고자 애쓰는 사람은 그 어깨에 갈수록 무거운 짐이 자기를 누르는 것을 봅니다.

  영화 배우 엄앵란이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면서 한 말입니다. "영화배우로 데뷔하던 19살 무렵이 가장 행복했어요. 세상을 많이 아니까 욕심이 생겼고 그럴수록 불행해지더군요 인생이 풀잎의 이슬같아요 이를 실감 못하고 살았죠 즐기지도 못했고요 바위틈의 이끼도 찬찬히 보고 살았어야 했는데 바쁘게만 살아왔어요" 데뷔했을 때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아니까 욕심이 생겼습니다. 갑작스럽게 뚝 떨어진 것같은 인기와 명예를 지키기 위한 욕심이 생기자마자 마음의 불행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간당간당 부침을 겪는 속에서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이 영예를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그 마음의 불행을 막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내가 모든 히브리인 보다 더욱 히브리인이었고 모든 율법을 지키고자 했었다고. 그러나, 그 바울의 두 눈은 살기에 등등한 눈이 되고 말았고 하나님의 뜻을 도리어 거스리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로마서 7장에서 고백합니다. "내가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롬7:9-11) 율법으로 인한 죄와 사망의 법이 우리를 꽉 붙들고 놓아주지 않으니 우리는 율법의 포로요 죄의 포로요 사망의 포로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우리에게 나타나서 모든 죄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다시 살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행위가 아니라 순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로 말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19-20) 우리가 주께 나아가려 할 때에는 우리의 죽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향해 진노하신 하나님께서도 아모스 말씀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니라"(행15:16-18) 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행실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행실은 우리의 모든 의지와 노력과 수고가 죽었다는 것이 시인되고, 우리 안에 예수의 영, 곧 성령을 모시게 되며, 성령의 인도를 따라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수고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수고에 우리를 의탁하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복음이 순전하게 남는다는 것은 우리는 사라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인륜도, 천륜도 그 앞에서는 사라집니다. 아니 우리의 죽음을 봅니다. 나의 잘못만이 아니라 내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것을 확인합니다. 손양원 목사가 지켜낸 것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가 지켜낸 것은 예수 복음입니다.   "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 심으리니 그들이 내가 준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아니하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9:15) 사도 야고보가 요긴한 것을 추가로 권하였습니다.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행15:20)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장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행15:21) 하지만 이것은 교회의 관습 아래 있는 사람들을 서로 존중하기 위한 권면이지, 복음에 이런 행실을 더하여서 구원받으라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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