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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5일> 하나님께로 돌아오라(행14:8-28) 이정식 2012-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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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친히 지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천지의 사정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바다의 근원과 형편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모든 만물이 태어나고 자라는 것을 경영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를 따라 행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따라 행하십니다. 불가능이란 처음부터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과 떨어져 있을 때 생겨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첫 번째는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루스드라에 나면서 발을 쓰지 못하여 걷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은 모든 다른 말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유독 '걷는다'는 말만은 이해되지 않는 말이었습니다.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내 것이 아닌 유일한 단어가 '걷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눈으로 볼 수 있었고, 코로 냄새맡을 수 있었고, 손으로 일할 수 있었고, 귀로 들을 수 있었고,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고, 머리로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모든 일은 기본으로 할 수 있었지만 걷는 것만은 할 수 없었습니다. 

  가만히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 우리들도 모두 이 사람과 같습니다. 다 할 수 있는데, 다 자신있는데, 어떤 하나는 도무지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천지가 개벽해도 안된다고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우리 발목을 잡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날 때부터 죄인으로, 하나님과 떨어진 채로 태어났다면 루스드라의 이 걷지 못하는 사람처럼 걸을 수 없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이 사람을 주목해서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에게 무엇보다 귀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나을 수 있다(sotenai)는 믿음이었습니다. 날 때부터 걷지 못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할 수 있는 목록에서 빼버렸을텐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마음 속에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이 들어간 것입니다. 

  바울이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믿음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일하시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걸었습니다. 그러니 날 때부터 생긴 것이 아니라 나중에 들어온 것은 더 쉽지 않겠습니까. 태어날 때 담배피우고 술병들고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담배와 술 같은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도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커피 없으면 못살아' 노래를 불러도 커피 끊고도 잘만 삽니다. 습관의 힘은 무섭고 그 습관 때문에 사회가 유지되기도 하지만, 좋지 못한 습관을 고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와 마음으로 원하기만 한다면 그렇습니다.

  태어날 때 뇌성마비로 태어난 빌 포터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몸이 틀려 있고 말이 어눌한 그가 도전한 직업은 영업이었습니다. 하지만 환영을 받을 리 없었습니다. 불쌍하다고 동정을 하는가 하면 아이는 그를 보고 놀라 도망갔습니다. 어머니만 그의 든든한 후원자였습니다. 하루는 어머니가 싸 주는 도시락 속에 예쁘게 '인내와 끈기'(patience and perseverance)가 새겨진 식빵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마저 기억력이 상실되어서는 더 이상 아들 빌포터를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이제 혼자서 일어서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치지 않고 계속되는 방문과 그의 성실성이 조금씩 인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쓸 수 없는 오른손은 뒤로 감추고 왼손으로 무거운 가방을 들고 영업을 한 지 24년만에 그는 왓친스 회사의 한 해 영업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성품에 관해서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날 때부터 주신 성품은 어떻게 합니까. 좋은 것이야 상관없지만, 바로 나쁜 성품, 덕이 안 되는 성품에 관해서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하나님은 이것을 고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신의 성품에 참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날 때부터의 자기 성품이 어떻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에 덕을 가지기 원하셨습니다. 덕에 지식을 갖추기를 원하셨습니다. 지식에 절제를 더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절제에 인내를 덧붙이기를 원하셨습니다. 인내에 경건을 결합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경건에 형제 우애를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형제 우애에 사랑을 감싸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이것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것을 내 못된 성품에 더하실 수 있다고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못된 성품이 신의 성품을 덧입어서 선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을 원하십니다. 이런 일에 신경쓰기에 시간이 없으십니까. 이런 일을 이루기 위해 확실히 시간을 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새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그런 일에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두 번째는 다시 한 번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걷지 못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걷게 된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행14:11) 그리고는 바나바를 제우스로, 바울은 말하는 사람이므로 헤르메스라 한 후에 시외 제우스 신당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제사를 하려고 했습니다.

   제우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최고의 신입니다. 천지의 모든 현상을 주관하고 인간 사회의 정치, 법률, 도덕을 지키는 존재입니다. 헤르메스는 제우스가 보낸 사신과 같은 신인데, 언변이 뛰어난 신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하고 있던 시대에 제우스 신전이 많이 있었고, 제우스 신을 섬기는 제사장도 있었고, 제우스 신을 섬기는 신도도 있었던 것입니다. 하늘을 섬기듯이, 일월성신을 섬기듯이, 제우스 신을 섬겼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공교히 만들어낸 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하나님께서 걷지 못하는 사람의 '나을 수 있다'는 믿음에 역사하셨는데, 엉뚱한 신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내려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계셨습니다. 하늘에서 비를 내리시고 추수 때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셨습니다. 음식과 기쁨으로 우리 마음을 만족하게 하셨습니다(행14:17).

  고양시 애련산이라는 곳에 해마다 드리던 산신제가 올해로 마지막을 고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이전부터 애련산을 신령한 산이라고 여겼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산 중앙으로 건너가는 법이 없었고 산을 돌아갔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때 어떤 내시의 장례행렬이 그 산으로 넘어가고자 하니까 마을 사람들이 낫과 곡괭이로 그 행렬을 막아버렸습니다. 얼마나 법도가 있는가 하면 제사 지낼 때 잡담을 하거나 하면 제사 후에 벌을 주었습니다. 그렇게 오래 내려오던 산신제를 그만두게 된 것은 삼성생명에서 연수원을 지으려고 그 땅을 샀기 때문입니다. 기업이 산신보다 더 큰 모양입니다. 맞습니다. 여러분, 제사는 민족문화로서는 보존되어야 하지만, 우리는 제사의 정체를 알아야 합니다. 제사는 누구를 위하여 지내는 것이냐 하면 제사 지내는 우리를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기업이 들어와서 동네를 잘 되게 한다면 산신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사는 처음부터 '잘 되기' 위해서 지내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잘 되면 그만입니다. "하나님께서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행14:16)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로는 이 모든 일을 죄로 정하셨습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행14:15)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은 우리를 잘 되게 하는 일로가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은 우리가 날때부터 하나님을 떠나 살아서 죄 되고 욕된 삶을 살다가 이제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 안에 살기로 작정하는 것입니다. 어두움의 일들은 버리고 빛의 자녀로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다면 예배는 헛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온 표시가 무엇인가 하면 예배 봉사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온 증거가 무엇인가 하면 십일조를 잘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다면 십일조도 헛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참 재미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나바와 바울을 향해서 제사를 드리려고 할 때 이 두 사람의 행동입니다. '아이구, 저는 신이 아니라 목사입니다'라고 하면 이미 감동한 무리들이 '목사든 신이든 이런 대접을 받아 마땅합니다'하고 여전히 제사를 드릴테고, 그냥 뒤로 물러서서 받으면 될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말을 듣자마다 옷을 찢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속에 뛰어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소리를 질러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아마 뛰어가다가 신발도 벗겨졌을 것입니다. 당신들이 이러시면 내 옷이 찢기우듯이 내가 하나님 앞에 찢기울 것입니다. 우상을 만들고 아바타를 세워서 그에게 제사할 것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서서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장로교가 잘 한 것, 잘하고 있는 것이 많지만 목사를 귀하게 여기는 것 이상으로 목사를 높이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실상은 장로교가 아니라 그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어갑니다. 하나님 앞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는 것보다 자기들의 대리자를 세워놓고 그 아래서 '잘 되기'를 바라는 어리석은 마음이 옷을 찢을 일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재주는 곰이 넘고 실속은 여우가 챙기는 일이 많으나 그렇게 놓아두면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세 번째는 끝까지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원하는 것을 주는 것대신에 감추고 싶은 것을 드러내고 다니는 바울을 시기한 사람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추격하여 와서는 바울을 돌로 쳐 거의 죽기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 직장 생활을 충성되이 하느라고 우리 믿음이 칠랄레 팔랄레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진 사람이 있습니까. 거의 믿음의 태도와 습관이 종적을 감추어가는 분이 계십니까. 우리 형편과 처지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있기에 너무도 긴급하여서 안절부절할 처지에 있는 분이 계십니까.

  돌에 맞아 죽은 것처럼 피흘리며 꼼짝없이 쓰러져 있는 바울을 두고 제자들이 둘러섰습니다. '죽었을까 아마 죽었을꺼야 그렇게 돌매를 맞고 살아날 사람은 없어 어떡하지 이제 우리는 어떡하지'하며, 죽은 바울을 염려하는 것 반, 자기들의 앞날을 걱정하는 것 반, 걱정과 염려가 이만저만이 아닌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루스드라의 걷지 못한 사람이 일어나 걸어갔듯이, 죽은 것처럼 보이던 바울도 일어나 다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바울도 일으키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바울에게 돌을 던지려고 먼 길을 추격해온 사람들이 있던 동네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루스드라에서 이고니온으로 이고니온에서 안디옥으로 돌아갔습니다. 거기에서 전에 세운 교회들을 다시 방문하였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14:22) 떠났던 마음, 상심된 마음, 산란한 마음을 향해서 '마음을 굳게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온 그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새로운 말씀을 전했습니다. 고난에 관한 말이었는데,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직 피고름이 마르지 않은 채로 바울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만하면 되었다'고 말해야 할 처지에 도리어 아직도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어떤 것입니까. 직장 상사들에게 잘 보이듯이, 하나님께 잘 보이는 것입니까. 그들에게 잘 보여서 내 일신의 장래를 꾀하듯이, 하나님께 잘 보여서 우리 일신의 장래를 꾀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헛된 삶에서 돌이켜 떠나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은 세상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만듭니다. 세상에 기대는 것은 세상신을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산신제를 드리는 마음과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불러 놓고는 자기 우상을 섬기는 일입니다. 이제 우리 곤란한 형편과 딱한 처지가 있습니까. 하나님께로 돌아와 고치시고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응답받은 일이 있습니까. 다른 것 다른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지 말고 다시 한 번 하나님께로 돌아와 살아계신 하나님을 높이시기 바랍니다. 복음의 일로 환난을 당하는 분이 계십니까. 끝까지 하나님께로 돌아와 믿음에 견고히 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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