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4일> 주의 바른 길(행13:1-12) | 이정식 | 2012-11-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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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좀 추워졌습니다. 올해 초 겨울이 한창이던 때에 저는 진리가 있는 곳을 발견했습니다. 진리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목도리에 있더군요. 제 딸아이가 말하길 "목도리는 빨간 목도리가 진리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알게 되었지요. '아, 목도리에도 진리가 있구나!' 기억하세요 빨간 목도리가 진리입니다. 우스개로 말씀을 열어보았습니다. 고인 물은 썩고 구르지 않은 돌에는 이끼가 낍니다. 바퀴가 한 자리에 서 있기만 하면 그 바퀴 자국은 해마다 깊어간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열심히 일한 후에 여행을 다니면서 여생을 보내고 싶어합니다. 바람이 불면 배를 항구에 정박시켜 놓고 쉬고 싶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배를 출항시켜서 거센 파도가 있는 넓은 바다로 가라고 명하십니다. 실제로 겪게 되는 일도 그렇습니다. 고통을 당하기 싫지만 고통은 찾아옵니다. 쉬고 싶지만 일은 계속됩니다. 우리가 정말 쉴 수 있고 여유를 얻기 위해서는 닥쳐오는 일들을 넉넉히 이길 만한 힘이 생겼을 때입니다. 어떤 어려움에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견고한 집을 세웠을 때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은 세상 일에 끌려다니지만, 하나님의 진리를 가진 사람은 세상 일을 타고 다닙니다. 신자라고 하여도 불행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어떤 사람인가 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얻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세상에 끌려다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바른 길을 이해하는 사람은 수영하는 사람처럼, 파도타기하는 사람처럼, 주의 인도하심을 따라 세상을 타게 되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 시작된 핍박때문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흩어진 사람들이 세운 교회입니다.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다가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은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게 주께 돌아오더라"(행 11:19-20). 그때 세워진 교회가 안디옥교회입니다. 그리고 안디옥에도 주를 믿는 자가 생긴 사실을 듣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목회자를 파견했는데 그가 바나바였고, 바나바는 사울을 찾아 둘이 1년 동안 무리를 가르쳤고 더 큰 무리가 교회에 더해졌습니다. 그때 비로소 세상에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설교자로, 목회자로 1년 동안 열심히 섬겼습니다. 안디옥에는 이 두 사람 말고도 3명의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5명의 지도자 중에 담임목사에 해당하는 사람이 바나바였고, 부목사에 해당하는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교회가 세력을 점점 더 얻어가고 있을 때였으니까 사역도 활발하였고, 성도들도 믿음에 굳게 서가니 그 신앙생활의 맛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진리는 흘러넘칩니다. 진리는 세상 끝까지 흘러가기를 원합니다. 진리는 그 성격상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진리가 머문 자리에는 생명이 소생합니다. 생명을 소생시킨 진리는 또다시 흘러 모든 사람 모든 지역에 진리를 가르칩니다. 진리를 휘몰아칩니다. 진리는 거대한 바위를 침식시키고 부서진 돌을 깎으며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던 교회에 성령께서 그 다음 행할 일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행 13:2) 그렇게 성령께서 교회와 지도자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을 때, 당사자인 바울과 바나바의 행동을 보십시오. 아무런 대꾸가 없습니다. '주님,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에 그냥 머물면서 주님 일을 감당하겠습니다'하지 않았습니다. '세우라' 하시니 교회에서는 세웠고, '보내라'하시니 교회에서는 보내었고, 두 사람은 갔습니다. 다른 곳에도 진리를 전파하기 위해서입니다. 진리를 흘려 보내기 위해서입니다. 실루기아로 가서 배타고 구브로라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전하라 했으니 전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섬들을 지나서 바보 섬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 이름이 바예수로, '구원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가졌는데, 그의 실상은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였습니다. 그런데 더욱 관심이 가는 것은 이 거짓선지자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었습니다. 총독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지혜있는 사람'(행 13:7a)이어서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불러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행 13:7b)했습니다. 총독은 듣고자 하는데 그와 함께 있던 바예수는 두 목사를 대적하여 자기 친구가 복음을 듣지 못하도록 방해를 놓고 있습니다(행 13:8).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교훈을 받습니다. 진리가 나아가는 곳에는 반드시 그 대적자와 진리를 사모하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진리를 방해하는 자와 진리를 사모하는 작 서로 섞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더욱 분명히 알 것은 진리를 훼방하는 자와 진리를 사모하는 자가 서로 친구처럼 지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이 이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것을 가만히 보고 계시지 않는 것입니다. 가장 유력하고 복음에 정통한 두 목사를 보내었습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야겠기에, 땅끝까지 진리는 흘러넘쳐야 하겠기에 말입니다. 우선 우리는 다른 사람, 믿지 않는 사람을 생각하기 전에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우리 자신 안에 두 성품이 서로 싸운다고 했습니다. 한 몸 안에 에서와 야곱이 복중에서부터 먼저 나오려고 싸웠던 것처럼, 그래서 세상에 태어난 이후에도 끊임없이 반목하며 서로 다투었던 것처럼, 우리 안에 두 성품도 그렇습니다. 진리를 알기 전에는 그 둘이 다 '나'인 줄로만 알고 삽니다. 서로 친구인 줄로 알고 지냅니다. 내 안의 두 목소리가 다 내 목소리인양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우리 속에 계시면, 다릅니다. 우리 안에서 다투는 것이 내가 아니라 내 안에 두 목소리, 두 성품이 서로 이기려고 싸운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세상 목소리, 마귀 목소리도 집요합니다.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진리를 믿지 못하게 하려고 방해합니다. 교회 목사를 넘어뜨려서 방해합니다. 1000년 중세 시기동안 기독교의 역사적 과오를 물고 들어집니다. 세상은 너무 바쁘고 언제 도태될지 모른다는 위협이 각 사람에게, 각 회사에게, 각 국가에게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진리를 방해하는 적이 되기도 합니다. 시인 안도현은 이렇게 썼습니다.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들길 여태 걸어왔다니/ 나여/ 지금부터 나는 너하고 절교다."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진리의 목소리와 세상의 목소리를 구별하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해온 우리 자신들에게 선포해야 합니다. "이 둘을 구별하지 못한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절교다!" 그래야만 진리에 선 사람으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단호하게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소리들과 섞여 있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배웠어야 할 세상과 여러 가지 세계의 일들 속에서 자라왔습니다. 걸어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온 이후에는 구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단호하게 구별되어야 할 이유는 마술사 엘루마가 지혜를 사랑하는 총독 서기오 바울을 방해하듯이, 구별되려고 할 때 이전의 지혜와 세상의 영이 우리를 끈질기게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 속에서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주의 바른 길은 굽어진 세상에 선포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만나는 세상은 주의 바른 길을 대적하는 사람들과 주의 바른 길을 사모하는 사람으로 되어 있습니다. 엘루마와 서기오 바울이 친구처럼 지내듯이, 사람들은 진리가 오기전에는 그 본성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리 앞에 서게 되면 이 사람이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사람인지, 어두움에 사는 사람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도 바울은 진리를 막아서려는 그에게 선포했습니다.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행 13:10) 조금 전까지만 해도 총독의 절친이었고, 서로의 이해를 돌보아주던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거짓의 아비요, 마귀의 자식이요 의의 원수'라는 꼬리표가 붙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과 집 앞에서 "발에 먼지를 떨며 돌아서라"는 전도의 원리를 생각해 봅니다. 이렇게 전도하는 바울에 대하여 성경은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행 13:9)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알지 못했을 때의 사울은 '큰 자'였습니다. 그가 큰 자였을 때에는 예수님을 대적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대적했습니다. 마술사 엘루마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은 사울은 '바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알고 나니까 그는 '작은 자'가 되었습니다. 겸손한 주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후로 사도행전에서는 끝까지 바울로 나타납니다. 세상은 자신이 '큰 자'가 되기를 바랐지만, 하나님의 복음은 주는 그리스도가 되고 자신은 작은 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충만한 성령이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될 것을 원하시므로 복음을 훼방하는 세력을 치고 나아갑니다.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구하는지라"(행13:11). 기드온이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 자기를 쓰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이 진정으로 자기를 부르시는지 확인하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양털에만 이슬이 젖고 나머지 모든 땅은 마르도록 구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렇게 응답해주셨습니다. 다시 기도했습니다. 이번에는 양털만 마르고 나머지 온 땅은 이슬에 젖도록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그렇게 응답해주셨습니다(삿 6:36-40). 기드온의 기도와 같이, 마술사 엘루마 주위에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유독 엘루마의 눈만 어두워졌습니다. 앞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종에게서 나온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주위 사람들에게 특히, 총독 서기오 바울에게 보여서 그로 하여금 믿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고자 했던 마술사 엘루마는 바나바와 바울의 가진 복음을 낙담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를 대적하는 엘루마를 오히려 낙담시키셨습니다. 엘루마의 꾀는 무너졌고 바울의 선포는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어떤 신앙을 살든지 주의 바른 길은 정면돌파를 계속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끌려가든 세상을 승리하든 주의 길은 계속 됩니다. 만일 우리가 진리 말씀에 구별된 삶을 살면 우리를 쓰실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다른 이를 쓰셔서라도 주의 바른 길을 세상 끝까지 내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서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린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 쉬운 길이며 가벼운 길입니까? 주의 바른 길로 세상을 승리하는 삶이 바로 쉬운 길이요 가벼운 길이며, 안식의 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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