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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30일> 점점 힘을 얻는 사랑(행11:1-18) 이정식 2012-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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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즈음 도토리 줍는 재미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습니다. 어제 비가 오는 날에도 도토리를 주웠습니다. 그제는 앞집 아주머니가 담장 너머 채진밭에서 우리 도토리를 줍고 있었습니다. 저를 보고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그래도 조금은 미안한 듯 계속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자 제 마음 속에 이런 목표가 생겼습니다. '더 열심히 주워야겠다!' 그래서 새벽기도 마치고도 나무를 한 바퀴 돌아 교회마당, 교육관, 배수로, 풀속을 샅샅이 살핍니다. 어쩌다 바람이 불면 후두둑툭 하고 여러 개가 떨어지는데 그 떨어지는 소리가 옹골찹니다. '꼭 주워야겠다!' 도토리가 무슨 금도 아니고 은도 아닌데도 눈에 띄는 도토리 알맹이는 황금빛이 돕니다. 하나씩 찾아 쥘 때마다 만족감이 손에 들어옵니다. 

  우리가 지난 겨울과 봄 여름 가을을 보내면서 나름대로 바빴습니다. 도토리도 나름 바빴습니다. 토실토실한 도토리를 보면서 우리 삶에 위안을 받습니다. '너도 1년 동안 그렇게 영글었지, 내 믿음도 내가 확인할 수는 없지만 너만큼 영글었을꺼야'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모든 만물을 다 지으시고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자라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것들보다 더욱 귀한 우리를 하나님이 놓치실 리가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자라고 있는데 안 자라는 것처럼, 제자리 맴돌기만 계속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한 해 동안 우리 믿음을 자라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를 위해 자축의 박수를 보냅시다.

  사랑은 모든 것을 흔들어 깨웁니다. 하나님은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이 편만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지도록 뜻하셨습니다. 하지만 처음 믿은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터부시하는 오랜 신앙의 전통에 갇혀 있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그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시작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행 11:1-3). 구원받은 유대인들의 심정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하면서 당신이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당신이 그러고도 하나님의 사람입니까'하는 것입니다. 저들의 믿음 속에, 저들의 마음 속에 난리가 난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베드로는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대로 설명했습니다(행 11:4). 베드로는 흥분하지 않았습니다. 자존심 상해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렇게 나오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자신도 도무지 받기 어려웠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 비난합니다. 상식밖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비난합니다. 이방인 고넬료와 그의 온 집과 음식을 나누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성경을 읽고 하나님을 배웠던 유대인들의 신앙상식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들이 부정한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은 부정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당신들만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나도 똑같이 이해할 수 없었다" 하며 자기가 겪은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은 "주님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라는 말입니다. 기도할 때 환상 중에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에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어 베드로 앞에 드리워졌는데, 보니까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였습니다. 들으시 소리가 있어 이르기를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했습니다. 베드로가 온 힘을 다해 말하기를 "주님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결코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하니 두 번째 소리 있어 이르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했습니다(행 11:5-9). 이런 실갱이를 총 세 번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거절했고 성령 하나님은 명령했습니다. 베드로는 거절했고 성령 하나님은 또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다시 거절했고 성령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그릇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고.

  "마침 세 사람이 내가 머문 집 앞에 서 있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꼐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행 11:12). 베드로는 자기 자신의 확신도 소중했지만, 성령의 말씀을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의 신앙양심도 중요하지만 성령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중한 것입니다. 내 마음이 뭐라고 말하는가 보다 성령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는가를 들을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순종했을 때 알게 된 것은 성령께서 일을 착착 진행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성령께서는 먼저 구원받을 고넬료에게 말씀하셔서 베드로를 청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베드로에게 환상으로 나타나셔서 마음의 빗장을 열게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머문 집 앞에 사람이 찾아와서 고넬료가 보낸 자초지종을 다 말했습니다. "(베드로) 그가 너와 네 온 집에 구원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행 11:14-15). 오순절 유대인들에게 성령께서 강림하신 것처럼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도 성령께서 강림하신 것입니다. 그제서야 베드로의 생각속에서 아귀가 맞고, 말씀퍼즐이 맞춰졌습니다.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신 주 예수의 말씀이 생각난 것입니다. "아하! 그 말이 이 말이었구나"

  모든 간증을 마친 후에 베드로는 비난하며 책망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는 성도들에게 결정적인 한 마디를 던졌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행 1"17b). 그 말은 나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막아서는 안 될 뿐 아니라  너희도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막아서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누가 있어 하나님의 사랑을 막아서겠느냐. 누가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위엄있게 흘러가는 강물을 동네도랑물로 치부할 수 있겠느냐. '그 사람도 하나님의 사람이냐 그 사람도 변화될 수 있겠느냐 그 사람도 하나님이 사랑하실까' 우리가 아무리 견고한 확신을 가지고 있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막아설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의 선포를 다시 듣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행 10:38-43).

  주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의 대장이십니다. 그분이 '떴다' 하면 모든 부대원들이 자기 내무반에서, 야외 작업에서, 보급창고에서 '헤쳐모여서' 그분의 사열앞에 다시 열을 맞추어 서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악착같이 붙드는 습관에 예수님께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사랑의 권능 앞에 우리 생각을 흔들어 다시 맞추고, 우리 마음을 찢어 다시 사랑이 통하도록 사랑의 흘러가도록 해야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의 대로는 우리 마음이 붙잡혀 있는 모든 작은 산과 강을 뚫고 골목길을 뚫고 당산나무를 뚫고 열리는 신작로입니다. 집사님 한 분이 제게 알려주었습니다.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곳곳마다 있던 당집들을 부수고 길을 낼 때 '미신보다 나랏님이 더 세다'는 구호가 있었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길을 내고 다리를 놓는 데는 나랏님 명령보다 높은 것이 없습니다. 성황당 신이라고 나랏님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우리 마음 속에 사랑의 대로가 열리려면 누구의 명령이 필요합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입니다. 죄에 잡힌 우리 마음이 나랏님의 명령에 순종하겠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죄사함의 피와 다시 사신 부활과 보내주신 성령의 역사만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모든 말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은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했습니다(행 11:18). 자기들의 신앙상식을 포기할 줄 알았습니다. 자기들의 생각의 습관을 깨뜨릴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 앞에 겸손할 줄 알았습니다. 이제 베드로와 구원받은 유대인들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이방인들에 대하여, 내놓은 사람들에 대하여 사랑의 옹알이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옹알이(babbling)는 아기가 목, 혀, 입술을 움직여서 내는 근육활동의 결과입니다. 목을 울리는 것과 처음으로 말을 하는 것 사이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생후 3-4개월에 시작해서 9-12개월에 절정을 이룹니다. 옹알이는 아이가 손가락, 발가락을 가지고 놀듯이 입술, 혀, 성대를 가지고 노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생후 5-6개월이 되면 관심을 끌고 싶을 때, 원하는 것이 있을 때, 거절의 의사를 표현할 때 옹알이로 자기 뜻을 나타냅니다. 아기가 옹알이를 할 때 돌보는 사람이 같이 대꾸해 주면 재미있어 하며 옹알이를 많이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선물은 무엇인가 하면 "너와 네 온 집이 구원받을 말씀"(행 11:14)이요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 것"(행 11:16)이며, "생명 얻는 회개"(행 11:18)입니다. 다시 한 번 가수이자 기획사 대표인 박진영을 통해서 어두움에 갇혀 있는 사람의 특징을 살펴볼까요? "돈을 벌어야 되겠다 20억을" 알지 못하는 그분의 도우심으로 청년 시절에 20억을 벌었습니다. 그러면 원하는 것을 다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젠 뭘 해야지?' 생각할 때 '명예가 있어야겠구나' 그래서 미국으로 진출해서 그분의 도우심으로 명예를 얻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그분께 감사했습니다. 이 모든 일이 나의 능력만으로 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시 마음을 허공에 떨어지게 만들었는데 '이젠 뭘 해야지? 아, 기부나 자선처럼 다른 사람을 도와야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돕기 시작했습니다. 고넬료도 구제를 많이 했던 경건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사니까 어떤 만족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결국 다시 마음은 허공에 떨어졌습니다. '무엇이 내게 있어야 할까? 아 그분이 누군지 알아야겠다' 박진영은 성경, 불경, 코란, 과학서적 등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돈과 명예와 자선 사업을 차례차례 정복했던 것처럼, 그분을 정복하듯이 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그분께  복종코자 하는 순종이 없이는 될 수 없는 구원을, 영생을, 가장 강력한 인생의 목적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에게는 탐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구원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필요합니다. 베드로와 같은 전도자가 필요합니다. 자기 죄를 깨닫게 하는 죄찔림 곧, 성령의 은혜가 계셔야 합니다.

  사람의 모든 행동은 '무언가를 해서 사랑을 얻으려고' 하는 데 있습니다. 귀한 사랑과 관심을 얻으려면 그 행동의 결과가 평균 이상이 되어야 하고, 좋고, 아름답고, 우월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모든 인생의 함정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목표하는 바를 언젠가는 얻을 수 있습니다. 얼마나 고생하는가가 다를 뿐 얻을 수 있습니다. 저는 확신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가가 다를 뿐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 마음이 영혼이 원하는 바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모든 인생의 허망함입니다.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영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복종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내가 무릎으로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분 하나님이 살과 피로 오셔서 나를 완전히, 에누리없이 사랑하셨다는 이 현재완료, 이 과거완료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지 못했던 나의 슬픈 시간들을 안타깝게 여기며 한 방울의 눈물로 이전의 어두움을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오늘은 추석입니다. 신라시대부터 이미 정착된 추석에는 주신 곡식을 춤과 노래로 감사하며 사람들끼리 편을 갈라서 경기를 하는 날이었습니다. 추석에 상 차리고 설거지하고 성묘 다녀오고 밀린 회비 내는 날이 아니라, 이름을 알지 못하는 신과 함께 어울리는 큰 날이었습니다. 이 추석 연휴 복된 연휴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분주한 오늘 아침에 벌써 사랑에 실패해 버리셨습니까? 낙심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순간을 영원히' 새롭게 하실 수 있는 왕의 왕이며 주의 주이십니다. 오늘 예배 후에 추석 연휴 기간에는 도토리 줍는 맛을 누가 가져가겠습니까? 사랑의 도토리 한 알 한 알을 손에 쥐어보는 맛을 누가 취하겠습니까?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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