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6일> 나의 치료자 예수(행9:32-43) | 이정식 | 2012-09-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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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사전에는 건강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아무 탈이 없고 튼튼함, 또는 그런 상태'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 헌장에는 "질병이 없거나 허약하지 않은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히 안녕한 상태에 놓여있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건강을 잃은 사람은 병원을 찾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원이 쓸데없지만, 건강을 잃은 사람에게는 의원만이 유익을 주는 사람입니다.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이 계시고 그분을 통해서 잃어버린 건강을 치료받습니다. 치료를 받는 이유는 다시 건강을 되찾은 후에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건강해야 부모 역할을 할 수 있고, 직장인으로 살 수 있고, 학생으로 살 수 있고, 여가 생활을 즐길 수 있습니다. 건강은 모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바탕이 됩니다. 베드로는 사방으로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애니아라는 이름의 성도를 만났는데 그는 8년 동안 중풍병을 앓아왔습니다. 베드로는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에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마9:6b; 막2:11).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의 주인이십니다. 그의 말씀은 생명입니다. 죽음도 이기는 생명입니다.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요한과 함께 성전에 올라가다가 날때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하고 명했을 때,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고침을 받았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체없이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그 명한 말을 듣자마자 "곧" 일어났습니다. 스탠리 존스 선교사(E. Stanley Jones 1884-1973)는 인도에서 평생을 바쳐 일하다가 89세에 뇌일혈로 반신불수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강제로 보스톤에 있는 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그런데 그는 치료를 받으면서 자기 병실에 들어오는 모든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의사 선생님, 나에게 이렇게 명령해 주시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스탠리야, 일어나 걸어라'고 말입니다." 의사들은 마치 부흥사 노릇을 하는 것처럼 머쓱했지만 하도 많이 부탁을 하는 바람에 치료하러 들어올 때마다 스탠리에게 말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 그러면 스탠리 선교사는 힘차게 대답했습니다. "아멘!" 간호사도 치료하는 도중에 말했습니다. "스탠리,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 "아멘!" 놀랍게도 스탠리는 6개월만에 병상을 박차고 일어나 90세의 나이에 또 다시 인도로 선교를 떠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애니아의 과거를 묻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애니아에게 있었을 허물과 죄에 관해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습니다.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있었다 해도 십자가 앞에서 모두 씻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살리는 영입니다. 성품과 행동과 과거에 책잡혀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던 사람들이 예수 안에서 자유케 되었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건강한 사람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가 넘치니까 죄짐을 불태워버리고 몸을 가두고 있던 병마도 불태워버렸습니다. 몸의 건강만이 아니라 정신의 건강, 사회적인 건강, 신앙적인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사회 속에 어떤 만족스러운 지위를 얻기 위하여, 또한 얻은 지위를 지켜내기 위해 오랜 씨름을 합니다. 나의 얻은 지위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발목 잡힐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하나님께 가면 문제없습니다. 나의 선한 행위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자꾸만 뒤가 켕깁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나아가면 문제없습니다. 애니아의 간증으로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에게 들렸고,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룻다와 사론에 가까운 지역이 욥바였는데, 욥바 사람들이 애니아의 일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급히 와 달라고 전갈을 했습니다. 그 전갈의 내용은 "우리에게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습니다. 도르가라고도 하는데 착한 일과 구제하는 일을 아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병이 들어 어제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장례를 위해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여놓았습니다. 그러니 속히 오셔서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 다락방에 올라가니까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비다가 살아있을 때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꺼내보였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축복한 자매입니다.' 여러분, 지금부터 하는 말은 제정신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부터 하는 베드로의 행동은 전혀 정상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그러나, 들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믿으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성령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사람을 다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주여, 다비다의 행한 일을 주님 아십니다. 그가 있어 수많은 과부들이 위로를 받았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주님, 다비다를 다시 살게 하옵소서. 부활의 주님, 다비다를 다시 살게 하옵소서" 그는 부흥사들이 하는 것처럼 큰 소리로 외치며 기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조용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외치지 않아도 들으신다는 것을 아는, 믿음의 기도였습니다.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다비다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았습니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습니다. 깨끗하게 씻어 염을 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베드로는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밖으로 나가있던 성도들을 불러 다비다가 살아난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전의 관계를 현장에서 다시 맺어주었습니다. 주위의 과부들에게 했던 착한 일과 구제의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중풍병자가 낫고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사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 이 말씀은 어떤 말씀으로 나타나야 하겠습니까?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중병이 치료를 받는 것보다 더욱 아름답고 힘있는 치료가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 사람을 영접한다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할 만한 사람이 여러분 주위에 있습니까? '그 사람이 아무리 변화되어봐야 거기서 거기라. 다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천지가 뒤바뀐다 하더라고 어렵지' 하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 있습니까?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인내하고 또 인내해도 안되겠다'고 여길 만한 감정이 우리 속에 있습니까? '그런 사람도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 있을까'하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처신이 이토록 부끄러운데도 찬송할 이유가 있을까' 하는 분이 계십니까? 아니, 다른 사람은 차치하고라도 '나의 모습이 여전하고 못된 성품이 오늘도 뚝뚝 불거져 나오는데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새로워질 수 있을까 하는 분이 계십니까. 차라리 그런 것을 꿈꾸는 것보다 포기하고 체념하는 길이 더 빠를 것이라고 다짐한 사람이 있습니까? 이렇게 제정신으로 하는 생각을 이 시간에 거두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일은 실상 제정신으로 연결할 수 없는 것이며, 이어질 수 없는 것이며, 앞뒤를 붙일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는 그리스도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는 부활하신 주님이다'라고 외쳤던 사도 바울을 '제정신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미쳤다'고 했습니다. 다비다를 살리는 베드로의 선포와 그 살아난 이야기를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이성과 생각의 시계를 멈추십시다. 우리의 모든 경험과 이력과 지혜의 시계도 멈추어야 하겠습니다. 판단중지를 선언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하신 일을 기쁨으로 맞이합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성품의 짐, 나의 과거의 짐, 나의 실력의 짐을 모두 벗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 짐들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쁨과 자유로 살지 못했던 우리를 다시 살리셔서 하나님 주신 기쁨으로 살게 하십니다. 예배를 잘 드리지 않았습니까? 괜찮습니다. 이제부터 드리시면 됩니다. 신실하지 못했습니까? 괜찮습니다. 이제부터 신실하면 됩니다. 말씀을 잘 알지 못합니까? 괜찮습니다. 이제부터 말씀을 알아가면 됩니다. 다른 성도들에게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습니까? 괜찮습니다. 이제부터 깃털같이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하면 됩니다. 예수께서 여러분과 저를 전혀 새롭게 살리십니다. 손경문 목사님께서 하나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병원에서 손경문 목사님과 교제했던 강동교회 사모님의 기록입니다. "모든 기억은 시입니다. 기억은 정말로 아름다운 시입니다. 많은 것들을 보고, 쓰고 싶은데 눈도 잘 안 보이고 기운도 없어서 녹음이라도 해야 할 것같습니다. 나는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얼마나 적은 사람들을 만났는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요즘에는 복음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나에게 가장 큰 힘을 줍니다. 내가 이제 다시 목회를 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을 포용하며, 더 지혜롭고 더 은혜롭게 할 수 있을텐데요. 아쉬운 마음뿐입니다. 먼저 간 내 친구는 은혜롭게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나에게 가르쳐주고 갔는데..." 아이스바를 먹고 싶다는 목사님의 말에 지하 1층 매점에 가 사서 함께 해가 져 가는 모습을 내다보면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핸드폰의 녹음버튼을 누르고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아아~~ 이렇게 아름다운 시간은 너무도 빨리 흐르는군요." 가좌동에 상이 났습니다. 평소에 지관이라고 하시던 어르신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잠깐 우리 부친들과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떤 죽음이 복된가 하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찬송하면서 예배하다가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했더니 한 분이 응대하시기를 "그 말이 사실이지요. 폐병이 가장 고통스럽게 간다고 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은 일그러져야 할 때에 웃으면서 가더라니까." 이해하기 힘든 간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이런 믿음의 간증까지 듣고 알고 있는데 아직 하나님께 나아오지는 않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풀이 죽어 넋을 놓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언제냐'는 상관이 없습니다. '언제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한두 시간, 한두 달, 일이 년, 삼십년 사십년, 평생을 연기하고 연기하고 미루고 미루고 할지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결국 믿지 않으면 그 시간은 죄를 더 보태게 되겠지만, 믿기만 하면 그날부터 그동안 차곡차곡 보태진 죄짐까지 모두 사라지고 하나님 주신 기쁨으로 영생을 얻게 되니까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축복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바로 치료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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