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9일> 새 사람이 되고 싶다면(행 9:26-31) | 이정식 | 2012-09-13 | |||
|
|||||
아주 가끔씩 우리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 또는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내가 싫어질 때, 내가 미워질 때 그렇습니다. 시인 윤동주는 시 자화상에서 우연히 논가 외딴 우물 속에 한 사나이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라고 썼습니다. 또 김진이라는 시인은 자화상에서 '아유, 이것 손 좀 많이 봐야 되겠는데요' 했습니다. 좀 다르게 고치려고 하면 견적이 너무 많이 나오는 모양입니다. 우리는 지금 '삼성행전'을 듣고 놀라고 '현대행전'을 듣고 즐거워합니다.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과 김연아, 손연재, 양학선의 양1, 양2에 기염을 토합니다. 욱일승천기가 아니라 '욱한승천기'를 듣고 겪으면서 이보다 더 활력있는 나라가 있을까 생각합니다. 살기 팍팍한 시대이면서도 기적을 일구어 가는 모습을 보며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자부심이 꿈틀댑니다. 경제적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국가적 자부심은 우리를 고무시켜주고 더욱 당당하게 만들어줍니다. 우리 이야기의 단골메뉴가 되어 우리를 심심하지 않게 해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일들은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다른 사람이 되게도 못하며, 새롭게 해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사람은 이전과 같은 사람인데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줍니다. 오직 예수께서 우리를 그렇게 하십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을 전에 알고 있었던 모든 사람이 변화된 바울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사울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행 9:26)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은 온 세상의 구원자라고 말하다가 위협을 피해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사울이라는 청년이 얼마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잔혹하게 대했는지 온 유대 땅에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사울이 떴다 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숨을 죽이며 피해야만 했습니다. 그런 사울이 와서는 자기들과 사귀려고 하는 것입니다. 감옥에서 갓 출소한 재소자가 다짜고짜 친구하자고 찾아오는 것만큼 당혹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스데반은 순교 직전에 그 얼굴에 광채가 났지만, 바울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냥 그 얼굴 그대로 사울 그대로였습니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변화시키셨습니다. 살기가 등등했던 사울의 눈에 은혜가 있었겠지만 그런 것으로는 다 알 수 없습니다. 하는 말이 완전히 달랐지만 그런 것으로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바나바만이 유일하게 사울이 변화된 것,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것을 알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성도들을 안심시켜주었습니다. 바나바의 말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사울의 변화는 예수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로 마쳤는데, 바나바는 세 가지 요점을 통해서 사울이 변화된 사람이 된 것을 확증했습니다. 첫째로 "어떻게 주를 보았는가"를 말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주여, 뉘시오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행 9:4-5). 우리는 TV나 신문을 통해 수많은 사람을 봅니다. 얼굴을 보면서 그 사람이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지 대략 짐작하기도 하고, 그의 행실을 함께 견주어서 그가 누구인지를 헤아려 봅니다. 사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내신 빛을 직접 보았습니다. 우리 모친님들 중에는 환상 중에 하나님의 은혜를 만난 사람들이 계십니다. 사람으로는 도무지 해결 방법이 없는 큰 근심이 온 마음을 누르고 있었을 때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주는 영이시기 때문에 보이지 않으신데 이 분들은 하나님의 보여주시는 은혜를 입으셨습니다. 모든 근심은 사라지고 훨훨 가벼운 몸과 마음이 되어 찬양의 마음이 한결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분은 마냥마냥 주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봅니까? 예수 달리신 십자가를 보는 것입니다. 전에는 그냥 교회 본당에 지붕에 걸려있는 십자가였지만, 언젠가부터는 그것이 걸려 있는 십자가가 아니라, 내가 걸린 십자가임을 보게 된 것입니다. 세상 일은 다 보면서도 주의 일은 도무지 보지 못했던 우리가, 이제 세상을 다 주어도 바꾸지 않는 예수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나는 십자가에 달릴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 십자가 형벌을 주께서 대신 지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허락하시기 위해 다시 사셨다'. 전에는 성경 말씀을 읽으면 어디 내게 유용한 말씀, 필요한 말씀, 도움 되는 말씀이 없나 하고 보았지만, 지금은 말씀 안에서 예수님을 보는 것입니다. 모든 말씀이 다 주의 말씀이요 모든 말씀이 다 나를 위한 말씀이니, 축복도 저주도 모두 나를 위한 말씀임을 고백합니다. 이런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나는 네가 관심도 두지 않고 안중에도 두지 않은 너의 주 예수다. 너 살기 바빠서 너를 위해 나를 이용했지만 나는 너의 주다. 마당만 밟고 가고 돌아서 나가면서 등지면서 살지만 나는 너의 창조주요 구원의 주님이다.' 바나바가 본 사울이 변화된 증거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이었습니다.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행9:6) 여러분 하나님의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신 분이 계십니까? 내게서 나오지 않은 말, 그러나 분명히 들려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그런 분도 계십니다. 중국에서는 그런 일이 많습니다. 복음이 척박한 땅에서 그런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정착된 곳에서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우리들의 마음을 붙잡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찌릅니다.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은 내게 깊이 박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은 길을 걷다가도 문득 마음 속에서 다시 일어납니다. 전에는 내 삶의 스케쥴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하신 음성을 듣고 그대로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 주께서 가라고 하신 곳으로 내가 갑니다. 주께서 하라고 하신 것을 내가 행하는 것입니다. 중국에서 사역하시는 목사님이 한국에 왔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전에는 한국 기독교가 중국 기독교를 가르쳤지만 이제는 한국 기독교가 중국 기독교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을 향한 열정과 순수한 믿음을 중국은 가졌는데 한국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쓸려고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 인생 길을 평탄하게 걷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기 때문이며, 그 죄값을 하나님께서 대신 갚아주셔서 나를 하나님의 사람을 사셨기 때문이며, 그래서 내게 천국 기쁨과 천국 소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 속에 죄를 보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며, 내 속에 죄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속에 뼈아픈 죄, 숨길 수 없는 죄가 발견된 사람은 온몸과 마음으로 주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사울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된 세 번째 증거는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가'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백은 예수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물론 우리의 승진도 우리의 기쁨입니다. 우리 자녀의 대견함도 우리의 자랑입니다. 생활 속에 인도하신 하나님도 우리의 고백입니다. 삼성행전, 현대행전, 월드컵 행전도 모두 우리의 자랑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상에 나가 전할 내 말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왜냐하면 주 앞에서 우리가 모두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요, 같은 죄인이기 때문이요, 하나같이 불쌍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자는 그 부에 가려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사니까 불쌍한 것도 모르고 불쌍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그 가난에 가려 하나님을 보지 못하니까 불쌍한 것도 모르고 불쌍합니다. 명예와 지위가 있는 사람은 바로 그 명예와 지위에 가려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불쌍한 것도 모른 채 불쌍합니다. 그것이 없는 사람도 그것을 가지려고 눈이 가려서 불쌍합니다. 중요한 것을 잃어본 사람은 사람의 불쌍함을 알게 됩니다. 소설가 박완서는 1988년에 남편을 잃었습니다. 남편이 갓 환갑이 되기 전이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해 8월에는 서울대 의대를 다니던 아들마저 잃게 되었습니다. 그의 자전적 소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창환이를 잃고 나서 저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가 뭔 줄 아세요 그때까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하나도 안 중요해지고 안 중요하게 여겨 온 것이 중요해진 거예요...생떼같은 목숨도 하루아침에 간데없는 세상에 물건의 목숨은 왜 그렇게 질긴지..." "인물이나 출세나 건강이나 그런 것 말고 다만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생명의 실체가 그렇게 부럽더라구요" 보통사람들이 그 심정을 어떻게 다 헤아리겠습니까.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의 인물이나 출세나 건강, 행복조차도 중요하지 않은 때, 그런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실체 앞에서 그렇습니다. 생명의 실체가 꺼지고 나면 아무것도 붙어있는 것이 없습니다. 카멜레온과 같이 상황에 따라 변하는 죄의 모습은 돈으로, 명예로, 지위로, 성공으로 우리 눈을 가리고 끝까지 우리에게 붙어있을 것처럼 행세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할 말은 영원한 생명의 본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믿긴 믿었지만 담대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아직 담대함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전도책자를 만들었습니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존경하는 상사와 선생님에게, 나의 허물을 알고 있는 이웃에게 전하려고 하니까 손이 떨립니다.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도 그저 사람이요 내 성격적인 결함이나 허물이 여전한데 너무 부끄럽다' 이런 생각이 들어옵니다. '모든 처음'은 낯설고 쑥스럽고 민망하고 그래서 속상합니다. 사춘기의 자녀가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죽도록 싫은 것처럼, 아마도 그 속에서는 죽도록 나서고 싶은 욕망이 있을 터이지만 자신이 없어 기가 죽어서 숫기가 없어서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약점이나 허물이나 결함 정도가 아니라 내 속에 거하는 죄가 아주 뒤집어져 버렸습니다. 속에 감추어두었던 것이 하나님 말씀 앞에서 다 드러나버렸습니다. 잘 꾸몄던 외모가 안으로 들어가고, 손댈 수 없었고 도저히 꾸밀 수도 없는 속이 바깥으로 나와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를 주의 사랑으로 깨끗하게 해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자꾸 드러내고 기억하고 지적하지만 하나님은 깨끗케 씻으시고는 아주 덮어 주셨습니다. 고든(A.J. Gordon)은 마지막 설교에서 이런 일화를 들려주었습니다. "신뢰할만한 군의관이 있었습니다. 전투 중에 목에 총상을 입은 군인에게 총알이 목을 살짝 스치고 지나가 경동맥이 상처를 입었다고 말했습니다. 군의관은 이 군인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상처 부위를 소독할 때 상처난 경동맥의 혈관벽이 떨어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군인이 물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선생님" "당신은 이미 죽은 목숨과 다름이 없습니다."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을까요?" "내가 이 손을 당신 목의 경동맥에 대고 있는 동안뿐입니다." "그렇다면 제 아내와 아들에게 편지를 쓸 시간을 좀 주시겠습니까?" 그는 곧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에게 이별을 고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는 가족에 대한 사랑과 애정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편지를 다 쓴 후에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선생님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하고 말했고, 잠시 후에 그는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들입니다. 지금까지 생명을 보존시켜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를 믿고 다시 사는 삶을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예수를 영접하십시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