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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일> 시력 2.1(행9:1-22) 이정식 2012-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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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분이 "저 사람 왜 저렇게 인상을 쓰고 사람을 째려보나" 생각했습니다. 인생이 얼마나 불만이 많길래 저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동료 한 사람이 자기를 보고 "왜 그렇게 인상을 쓰세요?"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노안이 온 것입니다. 잘 안 보이니까 눈에 힘을 주고 찡그리게 된 것입니다. 노안이 온다고 헛웃음을 웃으시는 집사님, 성도님들이 계십니다. 세월이 지나고 눈에 힘이 약해지면 돋보기나 도수있는 안경을 쓸 때가 된 것입니다. 우리 청년 몇 사람은 시력을 위해서 또 좀더 나은 생활을 위해서 라식/라섹 수술을 했습니다. 얼마간의 아픔을 참으면 렌즈를 안 껴도 안경을 안 써도 잘 보인다고 하니까 좋습니다.   

  시력이 2.1인 사람을 보셨습니까? 시력측정표에는 0.1부터 2.0까지밖에는 없습니다. 숫가락으로 한쪽 눈 가리고 시력측정표를 봅니다. C자처럼 생긴 게 어느 쪽으로 터졌는지 보려고 애를 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눈이 아무리 좋아도 2.0입니다. 독수리 눈은 멀리서도 먹잇감을 보기 때문에 3.5라고 하는 말이 있지만, 실제로 측정해본 값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 어떻습니까? 비가 내리고 온통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에서도 구름 위에 있는 태양을 보는 사람, 칠흑같이 깜깜한 그믐날 밤에도 별이 여전히 떠있다는 것을 보는 사람, 이기적이고 사랑없는 세상에서도 사랑으로 가득한 것을 보는 사람, 가난한 중에도 자기의 부요를 보는 사람, 아무 좋은 일도 없는데 하나님 사랑을 보며 감격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시력 2.1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시력입니다.

  바울의 이야기는 8장 1절에서 3절까지에 맛보기로 나와 있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의 죽임당함을 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가 핍박당할 때 핍박하는 앞잡이가 되어 교회를 파괴하고, 집집마다 들어가서 남녀 불문하고 끌어내어 옥에 넘겼습니다. 다른 사람은 교회를 비난하고는 그만 생업으로 돌아가는데, 사울은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색출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사울은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성도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습니다. 사울의 눈은 살기등등한 눈빛이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등졌을 때 그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눈이 밝아져서 세상 물정을 알고 나니까 자기의 부끄러움과 벗은 모습이 보였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할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하나님을 등지고 나니까 뚜렷하게 보였습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에게는 컴플렉스가 있습니다. 사춘기에는 특히 자기 부족한 점이 얼마나 크게 보이는지 모릅니다. 그것때문에 울고, 그것때문에 속상하고 그것때문에 한숨쉽니다. 자기를 지으신 참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마음에 들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 때부터 그에게 충성하는 마음이 들어갔고, 열성적인 마음이 들어갔고, 맹렬한 마음이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나사렛 사람 예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자기가 한낱 사람이면서 하나님이라고 하다니' 미친 사람이다. '자기가 한낱 사람이면서 예수 믿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다니 신성모독이다' 하지만, 그 소문이 점점 더 크게 번졌고, 그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만에 다시 살았다는 이야기까지 들려왔습니다. '이 사람, 그리고 이 사람을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 처벌해야 한다. 감히 우리 하나님을 모독하다니!'

   그런 후에 그가 얻은 눈빛이 바로 살기등등한 눈빛이었습니다. 자기는 충성이라고 여겼고,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실은 살기였을 뿐입니다. 자신을 불사르듯이 하나님께 맹렬히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위해 얼마나 큰 사랑으로 맹렬하게 달려오셨는지를 보지 못했습니다. 까맣게 몰랐습니다.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죄를 보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첫 연애가 실패하는 이유는 그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성공적인 결혼은 잘 보이려고 하지 않아도 이미 좋게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 사울이 가진 죄였습니다. 자기의 제물로 하나님의 사랑을 얻으려고 했던 가인을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 것과 같습니다. 온 우주에 이미 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하기만 하면 되는 것을, 예수 안에 충만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면 되는 것을,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임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사울에게 하나님은 직접 자신을 나타내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6장 13절에 보면 사도 바울에 다메섹으로 올라가던 때는 대낮이었고, 홀연히 하늘에서 빛이 비춘 때는 정오입니다. 해가 하늘의 한가운데서 가장 밝고 뜨겁게 빛날 때입니다. 그러면 밝고 붉은 태양이 이글거리고 있는데 또 다른 빛, 아니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비추었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해도 달도 별도 다 그 빛을 잃고 또 소용없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는 하나님과 보좌 우편에 계신 어린양이 의로운 빛으로 계신다고 했습니다. 정오의 태양조차 부끄러워하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빛이 비취었습니다. 그것도 전 세계를 비춘 것이 아니라, 오직 사울과 사울의 동행들을 둘러 비추었습니다. 빛나는 해도 볼 수 없는데 그보다 더 밝은 빛을 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 자리에서 땅에 엎드러져 무슨 일인가 하고 온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 나를 박해하느냐" "주여 뉘시오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같이 가던 동행들은 소리는 들었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사울은 벌써 그 영이 예수께 굴복되었습니다. 눈은 떴지만 보지는 못했습니다. 예수 만나기 전에는 그렇게도 잘 보였던 세상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영과 혼과 몸이 모두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아무 기능도 발휘할 수 없을 만큼 압도되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하나님을 위해 행한 것이 도리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대적한 일이었단 말인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사랑이 임하고 나니까 사울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입으로 먹지 못하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눈에 영양분을 충분히 공급해주지 않고 눈을 혹사시키면 망막박리라는 증상이 생깁니다.  갑자기 눈 앞이 깜깜해지고, 제 빛깔로 보이지 않고, 검은 점들이 눈 앞에 보이게 됩니다. 스스로 잘 보고 더 주목해서 보려고 하다가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이 무엇보다 예수, 누구보다 예수를 볼 수 있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주께서 주의 다른 제자 아나니아에게 사명을 주어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며 바울에게 안수하며 기도했습니다. 기도와 함께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향해 눈떴던 사울의 눈이 하나님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얻으려고 예수 믿는 사람을 색출하던 눈이 예수 사랑을 보는 눈으로 다시 열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하던 죄악된 비늘같은 것이 벗겨지자 하나님을 바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게 된 사울은 이제 바울이 되어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된 것입니다. 영이 다시 태어나고 마음이 새로워지니 몸도 새롭게 일하기 시작합니다.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행 9:19). 그때로부터 바울이 하는 말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행9:20)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행9:22)였습니다.

  온 가족이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리고 교회 생활에도 열성이었습니다. 예배면 예배, 성경공부면 성경공부, 청소면 청소, 가만 보면 목회자감입니다. 그런데 성서침례교회라는 이상한 교회에서 전도집회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집회에서 만난 목사님이 던진 첫 번째 질문은 "형제, 구원받았습니까?" "예, 제가 얼마나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데요" "형제 거듭났습니까?""..." 그때부터 고민하기 시작해서 그가 먼저 구원받고 차례로 아버지도, 어머니도 구원받았스니다. 온 가족이 예수를 다시 알았지만, 자기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다른 가족은 다 천국갈 확신이 있는데, 자기만 큰일 났습니다.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한 단어 한 단어가 전혀 새롭게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다른 어떤 무엇으로가 아니라 예수께서 나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바로 보게 되었습니다. 두 형제가 모두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루 중에 눈 뜨고 보는 것이, 귀로 듣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다시 보게 된 바울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I see you 난 당신을 바라봅니다. 난 당신과 통했습니다. 바울의 시력이 2.1이 된 순간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를 보는 것입니다. 누구보다 예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보다 예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끊임없이 솟아나는 생명생수이기 때문입니다. 온통 썩고 온통 더러워졌다고 하지만 예수 안에서는 자비와 긍휼이 무궁합니다. 똑똑했던 장남이 초등학교 3학년 때 홍역을 앓았지만 돈이 없어 손 써보지도 못하고 잃어버렸습니다. 그 가슴에 무엇이 남았을까요. 그렇지만 그는 지금 예수 믿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예수로 나누면 몫은 보따리에 싸입니다.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입니다. 나중에 하나님께 가서 따져 물어 보십시오. 그러나, 예수로 나누면 나머지 곧 마음에 남는 것은 찌꺼기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남습니다. 모든 찌꺼기는 예수 십자가 위에서 다 소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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