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6일> 예수 사건(행 8:26-40) | 이정식 | 2012-08-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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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늑대가 지빠귀를 노리고 숨죽이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기 먹거리를 위해서, 섭생을 위해서 다른 생물을 살생을 해야하는 순간입니다. 그때 이 늑대 이야기를 읽고 있던 한 아이는 이 대목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왜 이렇게 해야 하지? 왜 먹고 먹혀야 하는 거지? 곧 먹힐 지빠귀는 가엾고 잡아먹을 늑대는 나쁘다' 하지만 암늑대의 배가 주리고 혓바닥이 딱딱해진 것을 알고 난 후에, 암늑대에게도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야 비로소 아이는 늑대의 섭생을 이해하는 한 그루의 어른이 된다고 시인 김소연은 말했습니다. 사람이 어려서 바른생활을 배우고 도덕을 가르치지만, 철이 날 무렵에 우리가 보는 것은 그 모든 것이 자기 삶을 위해서라면 간단히 버려지기도 하고 쉽게 넘어버리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어른은 넉넉함과 연륜을 나타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삶에 더욱 독해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 누구를 환호하고 마음 속에 품고 하던 일이 자라서는 쓸데없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게 됩니다. 그렇게 존경했던 선생님도, 헤어지는 것이 서러워서 울며 떠나보내던 초등학교 교정도, 부모님도, 부모님을 떠나 사귄 친구들도 결국은 제 살기 바쁘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고는 자기 앞가림을 하는 것이 제일이라는 곳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의 눈은 멀리 바라볼 수 있지만, 그때부터는 바로 내 눈 앞에 있는 일들에 주목하고 집중합니다. 사방 1m를 넘지 않는 앞가림 이외에 신경쓸 일, 나를 바쳐 이루어야 할 일도 없게 됩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어떤 사람은 그때부터 궁금하기 시작합니다. 이게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는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을 알았다고 생각했지만,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다만 어디에서, 누구에게서 그것을 얻을 수 있는지를 모를 뿐입니다. 에티오피아 내시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재정을 맡은 관리였습니다. 에티오피아는 한국전쟁 때 우리나라를 도운 우방이었고 또 그때는 우리보다 훨씬 잘 사는 나라였고, 멀리는 기원전 900년대 솔로몬 왕 때 구스의 시바 여왕과 관련된 나라입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 역사가 200년 정도인데, 에티오피아는 1500년이 훨씬 넘는 기독교 국가입니다. '간다게'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여왕의 칭호인데 그의 재정을 맡은 관원이니 고위직 공무원입니다. 그도 자기 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도 젊은 시절에 일찍 철이 들어 자기 삶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높은 관직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런 그의 마음 속에 늘 궁금한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궁금증, 답답증을 해갈하기 위해서 그는 하나님을 찾았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에티오피아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우리나라 길이의 두 배 이상 되는 거리입니다. 그런 그가 되돌아오는 수레에서까지 성경을 읽고 있었던 것입니다. 해마다 그가 예배하고, 랍비들과 가르침을 주고받았겠지만, 그는 여전히 깨닫지 못했고, 궁금증을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이 사람의 그 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도자 빌립 집사를 내려보낸 것입니다. 가서 그를 도우라고. 전혀 낯을 모르는 빌립이라는 사람이 "읽는 것을 깨닫느뇨?"하고 찾아왔을 때, "당신이 무슨 상관이요, 당신 갈 길이나 가쇼" 하고 내몰지 않고,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하였습니다. 내시의 중심이 얼마나 간절했고 깊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사모하되 내시와 같은 마음으로 사모해야 할 줄 압니다. 그가 읽고 있던 성경은 이사야 53장이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사 53:7-8) 그 뜻을 아주 모르지는 않았지만, 이 내시가 궁금했던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가 도대체 누구냐? 이사야서를 쓴 선지자 이사야를 말하는 것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을 말하는 것이냐? 다른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질문은 "그가 나와 무슨 상관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 질문은 내시의 인생을 바꾸어놓는 질문이 되었습니다. 그의 답답증을 해결하는 질문이 되었습니다. 고아원에서 자란 아이는 아버지가 자신들을 버렸다고 생각하고 원망하며 자랐습니다. 성장하여 가족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얼굴은 일그러져 있고 남루한 한 어른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그의 "아버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아버지, 그 일그러진 아버지를 인정하기 싫었습니다. 다시 아버지는 아버지 집으로 갔습니다. 시간이 흘러 아버지의 부고 소식이 날아왔습니다. 날 때부터 생면부지의 아버지였으니 별다른 슬픔도 없었습니다. 외딴 집에 가니 마을 노인이 화장하지 말고 뒷산에 묻히기를 바랬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들은 "뒷산에 묻으면 명절 때마다 찾아와야하니 번거롭다"며 화장을 했습니다. 아버지의 모든 유품을 불에 태웠습니다. 그런데 그 유품 중에 "비망록"이고 씌어진 노트가 보였습니다. 뭔가 느낌이 있어서 불에 그슬려가는 그 책을 꺼내어 털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속에는 두 아이가 어렸을 때 집에 불이 나서 그 아이를 건지려고 뛰어든 아버지, 두 아이를 건지려다 아내를 건져내지 못한 아버지의 이야기가 있었고, 노트의 마지막에는 "평생 자면서도 불에 타는 꿈을 꾸었으니 화장은 하지 말아 다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일의 자초지종을 알았지만, 이미 아버지를 화장하고 난 후였으니, 비오는 그 날 아들은 사랑했던 아버지에게 매몰찼던 자기 자신을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를 얼마나 오랫동안 이렇게 대했는지 모릅니다. 그분의 사랑을 거절한 채 우리 인생의 뜻대로 살아갑니다. 전도서 9장 3절은 모든 인생, 곧 철이 난 모든 어른들의 삶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줍니다.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이니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의 뜻도 모르고, 이리 저리 옮겨다니며 여기 저기로 다녔지만, 일생 동안 지혜를 구하여 많은 지혜를 얻었지만, 솔로몬의 노년의 마지막 고백은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에티오피아 내시 "그가 곤욕을 당하여"라고 했을 때 '그'가 바로 선지자가 아니라 예수님이셨고,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세상에 살던 어떤 사람도 그를 공정하게 평가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를 십자가에 못박게 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동시에, 미친 마음을 품고 세상살이를 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을 못박았지만 그의 못박히심이 우리 죄악을 깨끗이 씻어주심이 되었고,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셔서 모든 죄악을 이기고 부활하신 사실을 들었습니다. 그때 에피오피아 내시의 눈이 뜨이고 귀가 열렸습니다. '내가 그토록 깨닫고자 했어도 깨닫지 못함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죄악이 가로막았기 때문이구나. 그 죄악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알지 못했구나. 이것이 우리 영혼의 근심이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예수로 오셨구나. 그분을 영접하고 나도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께는 다시 태어나게 되는구나' 내시는 기쁜 마음으로 빌립에게 말했습니다. "어찌 침례받기에 거리낌이 있느뇨" 주와 함께 내가 죽고, 주와 함께 다시 살았다는 것을 표시하는 침례는 내시에게는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요 15:22-24) 그것은 죄의 문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가는 곳,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 계신 영생의 곳으로 가느냐 하나님 계시지 않는 영벌의 곳으로 가느냐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기록된 말씀에 있는 예수가 아니라, 내 인생에 사건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저녁 상을 먹으면서 차량이 불타거나 사고나는 것을 뉴스로 보기만 하다가 내가 탄 바로 그 차가 사고를 당해 불에 타는 것을 경험하는 것과 똑같은 일입니다. 이것은 사건입니다. 이것은 누군가를 향한, 불특정 다수를 향한 뉴스나 신문이 아니라 바로 '나의 사건'입니다. 뉴스로 볼 때는 '아이구 저 일을 어째?' 하지만 마음은 울렁거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게 일어난 일은 심장박동이 크게 뛰고, 온 몸이 긴장으로 떨며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예수 사건이 일어나면 누구든지 내시와 같이 기뻐하며 침례에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사실로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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