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5일> 해바라기처럼(행 6:1-7) | 이정식 | 2012-08-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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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는 북아메리카가 원산지인 꽃입니다. 중국 이름 향일규(向日葵)라고 하여 해를 따라 도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그를 본 따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주바라기라고 짓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해를 따라 도는 것은 아니며, 아무데서나 잘 자라는데 특히 양지 바른 곳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태양의 꽃이라고 부릅니다. 반 고흐가 해바라기를 그렸는데, 태양처럼 뜨겁고 격정적인 자신의 삶과 열정을 잘 드러낸 영혼의 꽃으로 그렸고, 그의 삶도 그렇게 격정적이었습니다. '아무데서나 잘 자라는데 특히 양지 바른 곳을 좋아한다'는 해바라기처럼 우리도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잘 살아가지만, 그러나 양지 바른 곳 하나님이 계신 곳을 특히 좋아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교회가 처음 세워졌을 때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예배하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같이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모든 사람을 화목되게 하셨기 때문에 그의 제자가 되기로 자청한 교회는 마땅히 서로 사귀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좀 더 있는 사람들이 자기 재산을 내놓아 교회가 위화감에 빠져 원망이나 불평이 나오지 않도록 조처를 취했습니다. 사도들 앞에 드린 재물로 공평하게 나누어주며 서로를 축복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신앙생활의 감격은 사도행전 2장 43절부터 47절까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를 감싸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온 성도들의 삶 속에 힘있게 역사하는 모습입니다. 모든 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외부에서 위협과 핍박의 문제는 있었지만, 안으로는 사랑이 넘쳤습니다. 외부의 위협과 핍박이 긴장과 두려움을 주기도 했지만 성령께서 도우시고 사람을 통해 도우셔서 이겨 나갔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교회 안에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원망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할 때는 모든 것이 원만하게 진행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나오고 서로 다른 그룹들이 섞이게 되면서 재물을 분배하는 일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 가운데 구제를 받아야 할 과부들이 구제 받지 못하는 일이 보였습니다. 헬라파 그리스도인과 히브리파 그리스도인은 한국사람과 일본사람의 갈등만큼이나 갈등이 있던 사람들입니다. 올림픽경기에서 오심판정만큼이나 흥분하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와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버려두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성도와 사도가 모두 이 일을 즐거이 행하였습니다. 기쁨으로 행하였습니다.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사람들은 더 많아지고, 하나님의 역사를 눈으로 보고, 공평하게 서로 나누어주고 함께 쓰는 기쁨은 무엇보다도 기쁜 일이었을 것입니다. 예전 추석 대목 시장이 북적댈 때 느껴지는 살아있다는 느낌, 생명력이 넘치는 모습이 교회의 모습이었으니까요. 사도들도 성도들도 그 일이 신이 났습니다. 전혀 새로운 세계에 온 것같은 생활이었습니다. 어제 장년부에서 계곡트래킹을 다녀왔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전혀 새로운 레저스포츠를 경험했습니다. 땀을 흘리며 산을 올라간 후에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서 옷과 신발, 베낭을 그대로 맨 채로 계곡을 건너고, 덥다 싶으면 베낭만 내려놓고 그대로 수영을 했습니다. 계곡 옆 길은 자연휴양림이요, 좀 깊은 데서는 다이빙도 즐겼습니다. 중간 중간에 배가 출출하면 둘러 앉아서 사 온 간식을 꺼내 먹었습니다. 계곡 트래킹을 끝내고 내려오니까 맛있는 토종닭 요리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거라면 빠질만하다' 사도와 성도들이 헬라파 과부만 의식적으로 제외시키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받던 그들이 그렇게 상식 이하의 일을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부지불식간에, 그런 일이 생겼고, 불평등한 일이 생겼고, 이것이 한 번 두 번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언제까지인가 하면 헬라파 유대인들이 원망하는 소리를 들을 때까지 자신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감사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니까 모든 것이 잘 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원망은 하나님이 죄악시 하는 원망이 아니라, 꼭 필요한 소리였습니다. 도리어 사도들의 영혼을 일깨우는 원망의 소리였습니다. 긴급 사무회의가 열렸습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들을 불러 이르되"(행 6:2a). 사도들이 제일 먼저 바라보아야 할 것을 다시 바라보기로, 원래의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말했습니다. 그 원래의 정신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행 6:2b) 구제하는 일과 대접하는 일은 하나님 말씀이 가르친 일입니다. 대접은 율법 말씀의 황금률이라고 하는, 핵심 중에 하나요 예수님도 강조한 말씀입니다. "남에게 대접받기를 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즐거워하기보다 그 일을 즐거워한 것입니다. 일에 빠지다 보니까 점점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는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성도들만이 아니라 사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러분 기억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생명입니다. 해바라기가 아무데서나 잘 자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네, 우리 그리스도인도 아무데서나 잘 자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양지 바른 곳을 제일 좋아합니다. 양지 바른 곳, 해가 잘 드는 곳에 있을 때 가장 건강하게 자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양심을 비추게 하십시오. 우리 어두운 곳을 비추면 그때 그말씀이 우리를 고치시고 생명의 삶을 살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사도들에게서 배울 수 있기를 원합니다. 사도들은 원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신 뜻을 잘 알았습니다. 잠깐 일에 빠졌지만 다시 처음 부르심으로 돌아가는 데 어떤 주저함도 망설임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행 6:3). 교회가 중점적으로 행해야 할 일이 바로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입니다. 말씀 사역이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헤아리는 것이요, 기도하는 일이란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힘쓰는 일입니다. 그리고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세상에 전파되는 것이 전도입니다. 그러니 전도의 행위도 말씀과 기도가 든든해야만 강건하게 되는 일입니다. 말씀과 기도는 신앙생활의 근간(fundamental)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시해야 할 신앙생활은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으로 공급받아야 신자는 살아있게 됩니다. 이 일을 제쳐놓으면 반드시 문제가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영적 기갈을 해갈함이 없이 영적 생활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는 해바라기가 되었습니다. 구제와 대접을 위해 재정을 지출하고 분배하는 것은 교회의 주요 업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연히 권한과 권세가 사도들에게 있게 마련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사와 재정을 담당하는 부서가 힘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습관이 되면 그 일을 놓기를 싫어합니다. 그렇지만 사도들은 무엇보다 말씀과 기도 없이는 교회가 세워질 수 없다는 사실을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이렇게 요청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행 6:3).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모든 형제와 자매를 생각하고 균형있게 분배할 줄 아는 사람을 뽑으면, 지금까지 우리가 행하던 이 일을 그 일곱 사람에게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제쳐놓고 교회 일을 했을 때는 문제가 생겼지만, 말씀을 우선으로 세우고 나니까 사람들이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행 1:5a)였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이 일곱 사람을 분명하게 집사라고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스데반과 빌립이 집사로 등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초대교회나 현대교회나 공히 이런 일을 전담해줄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성서침례교회는 이들을 집사라고 부릅니다. 교회 행정과 재정을 은혜롭게 모든 사람에게 원망과 불평이 없도록 다스리고 집행하는 것이 이분들의 직무입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일곱 사람의 이름이 대부분 헬라어 이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동안 교회 재정에 수혜받지 못하고 제외되었던 헬라파 유대인들을 대거 임명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그들에게 안수기도를 통해 위임을 했습니다(행 6:6). 그러고 나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더 왕성하여 제자들의 수가 더 심히 많아졌습니다(행 6:7). 일산 호수공원에서는 노래하는 분수가 있습니다. 거기 분수 중앙에는 계단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항상 가장 중앙에 있는 분수에서 물이 흘러 내려옵니다. 중앙에 가장 높이 있는 분수는 그 물이 바닥에 이르기까지 흘러 다음 계단 다음 계단을 타고 흘러갑니다.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의 뜻이 흘러야 교회의 여러 가지 일들도 원망과 시비가 없이 갖추어져 갑니다. 말씀을 제쳐놓고 다른 일을 일삼으면, 비록 그 일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행위라 하더라도 공동체를 해치게 됩니다. 원망이 나왔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고쳐야 할 것이면 우리는 기꺼이 순종해야 합니다. 그 원망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아무리 제사장의 업무를 하고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중보기도와 축복기도를 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를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하느냐가 더욱 중요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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