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9일> 전능자의 도우심(행 5:12-42) | 이정식 | 2012-07-3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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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때에 보통 사람은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내가 할 수 있어' 하고 말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처지가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에게도 가르칩니다. "혼자서도 잘 해요". 도움을 받기 보다는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보통 날에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도움이 절박할 때에는 누군가로부터 도움받기를 원할 뿐만 아니라 확실한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에게 확실한 도움은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확실한 도움이 아니면 함께 물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불이 난 곳에 확실한 도움은 불을 끄거나 생명을 건지는 일입니다. 확실한 도움이 아니면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 신의 뜻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더욱 확실한 도움이 필요합니다. 확실한 도움은 바로 전능자에게서만 나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께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행5:30)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하나님의 원수가 된 우리들을 오히려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행 5:31)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아 회개하여 예수를 우리의 왕이요 구주로 삼으면 죄사함을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십니다. 오직 이 사실, 이 간단한 말씀이 지극히 큰 능력으로 역사하여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들렸습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왜 그 이름을 부르기만 하여도 그에게 찾아가 그의 모든 허물과 죄악에서 건져내시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전능하신 사랑이 예수 안에, 그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안에 충만하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이 약속의 처음 지역인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도우시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병든 사람을 고치고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시는 일을 통해 말씀과 교회를 도우셨습니다. 누구를 통해서인가 하면 사도들의 손(행5:12)을 통해서입니다. 사도들의 손에 하나님의 권능을 입혀주셨습니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보이는 사도와 목사의 손을 통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사도는 하나님께서 복음을 위해 부르시고 택하신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대리자요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사람들입니다. '고칠 수 없는 병이 들면 무슨 소망이 있나 백약이 무효라' '더러운 귀신이 들리면 그 미친 사람을 다스릴 방법이 없다 그 불쌍함에 혀를 찰 밖에' 하며 삶에 눌리고 인생의 눌린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주시며 모든 만물을 새롭게 하실 수 있는 전능자이십니다.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행 5:15) 이와 같은 간절함과 이와 같은 절박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또한 간절하고 절박할 때 그것을 해결해 줄 아무것도 없다면 얼마나 낙담이 되겠습니까. 하지만 전능자의 그림자가 그들의 답답한 마음과 병을 덮어주셨습니다. 고쳐주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전능자의 도우심의 통로로 쓰임을 받은 것이며, 이 사실로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행 5:14)였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문제가 해결함 받습니다. 예배 속에 전능자의 도우심이 여러분과 저에게 임하십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교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것입니다. 병 나음과 귀신을 내어쫓는 사역을 통해서 베드로에게 이목이 집중될 것같지만, 믿고 '주께로' 나아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사람에게서 날 수 없는 것이요, 하나님께로부터만 나오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주의 천사를 보내셔서 위기에 처한 말씀과 교회를 도우셨습니다. 누구는 주께로 나아와 나음을 얻고 칭찬을 하는데, 누구는 도리어 그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였습니다.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사두개인의 당파"(행 5:17)였습니다. 베드로와 교회와 함께 있어야 하는데, 이 사람들은 예수를 모르는 사람과 함께 있었습니다. 사도와 교회와 상종하며 사귀어야 하는데 이 사람들은 교회와 상종하지 않았습니다(행 5:13). 교회 잘 되는 꼴을 못보는 그들은 결국 사도들을 잡아 옥에 가두었습니다(행 5:18). 말씀을 전하고 싶어도 감옥에 갇혔으니 들을 사람이 없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를 안수하고 싶어도 만날 수가 없습니다. 감옥에 갇히면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예루살렘 부근이 왁자지껄하다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지는 것입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감옥의 문은 든든하게 잠기어 있었습니다(행 5:23a). 든든하게 잠긴 문을 지키는 사람들이 문에 서 있었습니다(행 5:23b). 이중 삼중 보안장치가 있었습니다. 우리 중에 마음의 감옥에 갇힌 분들이 계십니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아무것도 없는 분들이 계십니까. 사도들은 새벽까지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었습니다(행 5:19). 감옥은 사람을 가두기 위한 장치가 철저한 곳입니다. 이중 삼중 장치로 삼엄한 경비를 서는 곳입니다. 아무도 그냥 빠져나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자를 가둘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가두어 놓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의 뜻은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행 5:20)는 것이었습니다. 병으로 칭칭 감아도 감기지 않는, 더러운 귀신들이 얽매어도 얽매이지 않는, 감옥에 가두어도 갇히지 않는 생명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라는 것입니다. 병에서 낫게 하시는, 더러운 귀신을 내어쫓으시는, 감옥 문이 잠겨있어도 끌어내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을 때 이와 같이 믿어야 합니다. "예수는 주다 예수는 그리스도다 예수는 구원자시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소망이 끊어졌을 때도 예수 안에 참된 소망이 있다" 사도들을 잡아 가둔 사람들이 오히려 놀라며 슬슬 두렵기까지 했습니다. 가둔 사람들은 새벽에 성전에서 다르치고 있고, 감옥은 든든히 잠겨있으니 "이 일이 어찌될까"(행 5:24) 하였습니다. 어찌되긴 어찌됩니까. 예수의 가르침이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행5:28). 예수 앞에서는 병이 떨며, 예수 이름 앞에서는 더러운 귀신도 떨며, 예수 이름 앞에서는 감옥도 떨며, 예수 앞에서는 인생의 모든 원수도 죽음조차도 떤다는 사실이 예루살렘에 가득했습니다. 그가 누구신가 하면,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요. 그가 누구십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예수"요, 그가 누구십니까. 그 이름으로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는 예수"요. 그가 누구신가요. 하나님께서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신 예수"인 것입니다. 사도들이 이 일에 증인이요, 또한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행 5:32)도 예수의 증인입니다. 전능자의 도우시는 손길이 하나님을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그분이 여러분과 저를 도우십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사람을 사용하셔서 말씀과 교회를 도우십니다. 이런 일이 계속되니까 대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은 저 사도들을 없애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공회를 열어 어떻게 하면 저들을 제거할 수 있을까 회의를 했습니다. 그때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는 바리새인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손을 들고 이야기했습니다. "드다란 사람도 자기가 진리를 가졌노라 하여 4백여명이 따랐지만 그가 죽은 후에 다 흩어졌고, 갈릴리의 유다란 사람도 자기가 진리를 가졌노라 하여 많은 사람이 따랐지만 그가 망하니 모든 사람이 흩어졌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을 내버려둡시다.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서 났으면 그들처럼 세를 얻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무너질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다면 무너지지 않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될까 두렵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연구 중일 뿐이었습니다. 이럴까 저럴까 고민 중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여 말씀과 교회를 도우셨습니다. 죽이려고 했지만 채찍질만 하고 예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다시금 주의를 주고는 놓아주었습니다. 사도들은 당당했습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났"습니다(행 5:41). 예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그만 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았(행 5:42)습니다. 예수께서 인생의 소망인데 어떻게 그 소망을 숨겨두겠는냐 하는 것입니다. 모든 절망을 꺾으실 유일한 참 하나님이 예수신데 어찌 그 이름을 감추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 없이 살았던 내 인생의 과거가 얼마나 거칠고 갑갑했으며 어두움이었는지, 예수 알고 난 지금 내 인생이 얼마나 소망스럽고 힘이 있는지, 이것을 알고 경험한 내가 그 이름을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컵의 물은 한 번 엎질러 지면 그뿐이지만 예수님만 우리 마음 속에 든든히 계시면 그만입니다. 쏘아놓은 살같이 날아가는 우리 인생은 다루기 어렵지만 예수님이 우리 마음을 탄탄하게 다루시면 됩니다. 한 번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담을 수 없을지라도 예수님만 우리 속에 항상 담겨있으면 그만입니다. 인생의 흥망이 새옹지마처럼 왔다 갔다 하여도 예수님이 우리를 붙잡고 계시면 됩니다. 예수는 우리의 그리스도, 전능하신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소중하여 우리 마음의 애를 끊는 일이 생겨도 예수께서 나의 주가 되시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박태환처럼 실격 처리로 농간을 부려도, 기다리며 고대하며 자기 마음을 지키면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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