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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2일> 참된 헌신(행 4:32-5:11) 이정식 2012-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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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을 다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두려움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참된 헌신은 '내가 헌신하고 있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못합니다.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를 헌신케 한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이끌어가시기 때문에 '내가 좀 했다'는 생각이 올라오지 않고,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고 고백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자기 차의 기름값 아까운 줄도 모르고 차량운행을 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보는 시간이 즐겁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섬길 수 있다는 사실이 도리어 감사가 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모여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소망이 넘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그 누구보다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싶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원수가 사라지고 긍휼이 찾아옵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하나님께 최선의 것, 내 모든 것을 드리고 싶어집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하나님과 사랑을 하게 됩니다. 쉬운 말로 합시다. 성령이 충만하면 언제나 하나님이 한 끗 높습니다. 무엇을 결정할 때 언제나 한 끗 높으신 하나님 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그 선택이 어렵거나 힘들지 않고, 그게 가장 쉽고 그게 가장 기쁨이 됩니다. 바나바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4:31) 우리 속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마음, 세상 정욕의 마음이 진동하여 갈라지고,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였습니다. 그런 마음은 처음 세상을 창조하실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하나님을 주와 아버지로 모시고 그분의 다스림을 받는 '한 가정'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믿음의 권속이라고 하는 말이 바로 우리를 낳은 내 부모와 내 가정과 내 자녀가 다 다르지만,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교회는 하나님 안에서 한 가정이 된다는 말입니다. 한 가정이니 한 마음을 품고 한 뜻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어떨 때 그런가 하면 하나님이 진실하게 아버지가 되었을 때 그렇습니다. 각 가정에 침범하지 말아야 할 경계가 없어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생활이 없어졌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것이 다 그대로 있으면서도 서로를 돌아본다는 사실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그 자녀들에게 아름다운 동산과 그 안에 임의로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과실과 풍성한 열매들을 베푸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오늘날도 동일하여서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풍성한 꼴을 먹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사람은 한 마음을 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시인하는 사람은 한 뜻을 품습니다. 내가 가진 내 재산과 내 재물보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복이 너무도 크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 참된 섬김의 행실을 보고 계실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4:3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말씀이 강건했을 때 나타난 교회의 모습입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이요 나를 부르신 이도 하나님이요 십자가 보혈로 구원하신 분도 하나님이요 나를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확증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회의도 하고 기도도 하며 말씀을 배우고 생활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속에서 모든 열망과 소망이 싹트게 되었습니다. 없던 일도 만들게 되었습니다. 때로 다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더욱 서로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믿음과 섬김에 진보를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그런 모습이 청년에게 도전이 되었습니다. '아, 섬긴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그런 영적인 분위기에 한 주 한 주 함께 하면서 이 청년에게도 '나도 저렇게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이 되었습니다. 말씀과 가르침에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헌신은 우리에게 기쁨과 감격을 선물로 줍니다. 하나님의 일을 기쁨으로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복이시니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처음 생겼던 2000년 전, 그러니까 초대교회라고 말하는데, 초대교회 시절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행4:33-34) 한두 사람이 눈에 띄도록 헌신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헌신하니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헌신'이라기보다는 '당연한 일'을 한 것처럼 되었습니다. '집 팔고 밭 팔아 교회 갖다 바쳤다'고 하면 그게 이단이지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기쁨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생애에 푼돈을 벌어 모은 후에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사람을 보면 대단하다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믿지 않은 사람들 중에도 교회의 이런 모습을 칭찬했습니다.

  이 사람들 중에서 성경은 바나바를 대표적으로 주목하고 있습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행 4:36-37) 하나님의 위로는 신기한 은혜로도 오지만, 사람을 통해서 옵니다. 바나바는 온 교회를 위로한 사람입니다. 사도들을 위로한 사람입니다. 사도들을 먹여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것으로 교회 안에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교회를 찾는 어떤 사람도 위화감 때문에 시험들지 않도록, 평균보다 너무 넘치거나 너무 부족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도 전에 떨어지는 사람이 없도록 사용해달라는 것입니다. 무슨 슬픈 일을 당한 사람을 위로하는 위로가 아닙니다. 바나바를 통해서 행하신 하나님의 위로는 세상의 위협과 조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계속해서 나아가라는 위로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권위, 곧 권면과 위로가 함께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그 일을 계속해주십시오'라는 위로인 것입니다.

  이때는 바나바가 교회를 위로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잠깐 바나바가 시험에 들 때가 있었습니다. 베드로도 시험에 들고 바나바도 시험에 들었습니다. 복음의 권세가 세상 권세에 굴복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함께 있었던 사도 바울이 이 두 사람을 바로잡았습니다. '복음을 위해 일하라'고 권면했습니다. 한 사람이 넘어질 때는 다른 사람이 붙들어 일으켜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서로를 위로함으로 하나님을 위해 계속해서 일하며 그 안에서 나오는 축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분담해야 합니다. 누군가 외계에서 올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분담하며 협력해야 합니다. 일시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시험을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밥이라도 한 끼 사면서 이렇게 권면하며 세워야 합니다. "형제 자매, 우리가 연약할 때에 형제 자매의 헌신과 수고가 있어 고마웠어요. 그 자리를 지켜주었기 때문에 오늘의 우리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자꾸만 일을 떠맡게 되니 부담스럽지요? 때가 되면 다른 사람들이 그 일을 맡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아주시니까 다시 힘을 내요."

  그러나 성령이 충만하지 않았을 때는 하나님 편을 택하는 것이 고민이 되고, 그렇게 어렵고 그렇게 힘들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 마음이 두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악을 동시에 한 마음에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하나님을 좀 안다 할 때, 알아간다고 할 때 힘든 것입니다. 두 힘이 우리 마음을 서로 반대편으로 끌어당기기 때문입니다. 한 말 머리는 서쪽으로 또 다른 한 말머리는 동쪽으로 끌어당깁니다. 능지처참하는 일이 우리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의 대표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가정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런 사람, 이런 가정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교회가 자기 재산을 팔아 사도들에게 주어서 다른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에 쓰는 분위기를 알았습니다. 함께 예배하며 함께 행하였기 때문에 교회 사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니까 마음에 부담이 왔습니다. "여보, 우리도 좀 해야 하지 않겠어?" "맞아요, 우리도 신자니까 해야지요" 말은 이렇게 주고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성령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이 아니라, 체면을 위해서 한 것입니다. 체면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가상승률에 맞춰 결혼축의금이 3만원에서 5만원으로, 가까운 가족이면 10만원에서 수십 만원으로 올라갑니다. 내 형편과 사정이 어떠해도 눈에 띠게 낮은 액수로 내는 것은 참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체면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과의 친분관계와 나의 위치 등에 따라 고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동함이 없이 체면으로 행하는 일이 기쁨이 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처럼 밭을 일단 팔았습니다. 체면으로 시작했으니 그 힘이 거기까지입니다. 얼마를 감추었습니다. '내 땅 내 밭을 팔아 내가 쓰는 것이니까 인사치레는 하고 나머지는 내가 쓸꺼야' 정상적인 생각입니다. 다만 은혜받지 못한 생각입니다. 예수께서 나의 주님이 되지 못한 생각입니다. 억지로 내게 된 것입니다. 인색함으로 내게 된 것입니다. 그 밭이 얼마쯤인 것은 대략 주위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너무 드러나게 박하면 안 되니까 상당한 액수를 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속지 않았고, 하나님의 영은 속지 않았습니다.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4)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도(약1:8)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약 3:10-11)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또 지붕에서 하늘의 뭇별에게 경배하는 자들과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과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습1:5-6) "그때에 내가 예루살렘에서 찌꺼기 같이 가라앉아서 마음 속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등불로 두루 찾아 벌하리니"(습1:12) 

  하나님께서는 그날 그시에 두 사람을 데려갔습니다. 그 혼을 그 몸에서 떠나게 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왜 그랬을까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행5:11)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 얼마나 권위와 위엄과 영광이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다스림과 가르침을 받아서 사는 사람입니다. 성령이 충만했던 바나바도 유대인들의 권위가 갑자기 자기 마음을 위협했을 때 외식했습니다. 그는 목사였습니다. 동료이자 후배였던 사도 바울에게 책망을 듣고 권면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좋으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의 다스림과 가르침을 받아 사는 것이 모든 신자의 삶이요, 또 그것이 우리의 행복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동을 입은 성도들의 마땅한 헌신을 기뻐 받으십니다. 예배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려면 우리가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헌신하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행하는 우리의 순종과 헌신이 곧 하나님의 받으시는 예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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