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31일> 느긋하신 하나님(에 1장) | 이정식 | 2016-08-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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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7-39). 하나님이 항상 승리하시는데, 항상 승리하시는 하나니은 느긋하십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당장에라도 나를 돕지 않으시면 안 된다고 할 때라도 우리 하나님은 느긋하십니다. 달라스 윌라드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이분이 빌 골티어라는 심리학 박사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님을 한 단어로 표현해보세요.” 십자가, 거룩함, 사랑, 치유, 부활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런 답을 듣고 있던 윌라드가 미소 지으며 말하기를 ‘느긋하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성경에서 그 번역한 말 중에 느긋하다는 단어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윌라드는 예수님을 ‘느긋하다’고 표현했습니다. ‘오래 참는다’는 말이 있지만 이 말은 ‘참다 참다 결국 폭발할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느긋하다’는 말에는 그런 뉘앙스가 없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의 일을 통해서 예수님의 느긋함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라비 나사로가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 일을 보면서 마리아와 마르다는 발을 종종 구르며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주님께서 계시면 이 병에서 나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졌기 때문이고, 만일 예수님이 손을 쓰지 않으시면 죽을 거라는 절박함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다급히 찾는 소식을 먼 데 계셨던 예수님이 들으셨습니다. 하던 일을 멈추고 달음질쳐 가셔야 할 것 같은 상황인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고 하시고는 사역하시던 곳에서 하루를 더 머무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집에 오셨는데 그때는 이미 나사로가 죽어서 나흘째가 되던 날이었습니다. 시신에는 썩은 냄새가 진동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믿고 그렇게 느긋하셨을까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었고, 하나님의 보살피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에서 나오는 느긋함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성격이 급합니다. 제가 말을 정말로 빨리합니다. 저희 아버지도 성미가 불같고 급하신 분이었습니다. 저도 아버지를 닮았을 것입니다. 지난 주에 두 번씩이나 갑자기 허기가 찾아왔습니다. 여유롭게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먹이를 찾아 헤매는 짐승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아들이 있을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 약속을 받기까지 25년이 걸렸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지쳐서 여종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고 말았습니다. 제가 아브라함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아마 저도 여종 하갈을 취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25년을 꽉 채워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그 시간은 길었지만 어김없이 약속대로 주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구약성경 말라기가 끝나고 신약의 복음서가 나타나기까지 약 4백 년 동안 하나님께서 침묵하셨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약속했는데, 그 약속을 이루기까지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4백 년 동안 해야 했습니다. 4백 년이면 고조할아버지, 왕고조 할아버지보다 더 위의 할아버지 대로부터 내려오기까지 아무런 나타나심이 없이 계셨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백 년 동안 이집트에서 고생할 때 하나님께서 아무 말씀도 안 하시면서도 하나님의 일을 계속하셨습니다. 그분은 열심이 특심이신 분이시면서 느긋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항상 성실하시며 그 성실하심이 무궁하시면서도 느긋하신 하나님입니다. 헤겔이라는 철학자가 그의 법철학 서문에 유명한 구절을 남겼습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녘에야 날아오른다.” 미네르바는 지혜의 여신입니다. 이 지혜의 여신 어깨 위에 부엉이가 앉아 있습니다. 부엉이는 낮에는 활동하지 않고 밤에야 그 큰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활동을 시작합니다. 이 말은 한낮에 모든 복잡하고 부딪치고 깨어지며 성공과 실패의 삶을 살 때에는 지혜를 분간하기 어렵지만, 모두가 잠든 밤에 세상이 조용해진 후에라야 자기를 성찰하며 사건의 이면을 살필 수 있는 지혜가 있다는 뜻입니다. 인생의 경험을 많이 하고는 뒤를 돌아보면서 ‘아, 그때 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알겠다’ 하고 깨닫게 됩니다. 요셉이 감옥에 갇혔을 때 하나님을 더욱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얻는 것과 같습니다. 나에게 실패가 왔을 때, 나를 찾던 모든 친구들이 떠나갈 때, 나 혼자 있게 될 때, 그때 하나님을 더욱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데서 옵니다. “지식 없는 소원은 선하지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잘못 가느니라”(잠19:2) 소원을 주님 앞에 말합니다. 집사님들 기도할 때 소원을 들어달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지식 없는 소원은 선하지 못합니다. 여기 지식이란 하나님의 생각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구하는 소원은 선하지 못합니다. 보통 구하는 먹는 것이나 입는 것이나 하는 소원은 다 너희에게 더하여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하나님을 더 알고 그분의 뜻을 더 알아갈 때 구원이 우리에게 이루어집니다. 사울 왕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을 때 블레셋 군대와 싸우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2천 명 혹은 천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고 블레셋은 3만 명 이상의 군대로 나아왔습니다. 블레셋 군대는 사기가 충천했습니다. 그때에 사울은 사무엘 선지자를 기다렸습니다. 왜냐하면 사무엘이 7일째 되는 날에 사울을 만나러 와서 제사를 드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7일 째 되던 날 사무엘에 오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마음이 녹아서 하나 둘 탈영하기 시작했습니다. 블레셋 군대는 금방이라도 쳐들어올 것 같았습니다. 그런 긴박한 상황에서 사울은 자기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일로 사울의 왕위에 폐위 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정말로 잘못했을까요? 여러분과 저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저라면 영락없이 사울처럼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너무 급하니까요. ‘하나님, 내 백성들은 떠나가고, 사무엘 선지자는 안 와서 전쟁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블레셋은 곧 쳐들어와 우리를 멸망시키겠습니다. 우리를 도와 주십시오’ 했을 것입니다. 사울은 느긋하신 하나님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을 믿었지만, 진실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버림받았습니다. 에스더 1장은 특별합니다. 에스더 1장만이 아니라 에스더서 전체가 특이합니다. 이 책에는 ‘하나님’이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 이태훈 집사님이 항상 다음 주 말씀 본문을 묵상하시고 그 말씀에 맞게 찬양을 선곡하십니다. 그런데 이번 주에는 에스더 1장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난감해하셨습니다. 저도 묵상해보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왕의 교만과 권세, 왕후 에스더의 교만 등등을 생각해 보지만, 신통치 않습니다. 그런 중에 주신 말입니다. ‘하나님은 느긋하시다.’ 아하수에로는 세속 역사에서 크세르크세스 왕입니다. 영화 300에 나오는 그 페르시아 왕입니다. “이 일은 아하수에로 왕 때에 있었던 일이니 아하수에로는 인도로부터 구스까지 백이십칠 지방을 다스리는 왕이라”(에1:1). 하나님은 참 인자하십니다. 하나님 이름 한 번도 나오지 않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왕의 권세를 온 천하에 드러내는 잔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에스더서를 성경책에서 빼버리자고 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잔치를 베풀기를 180일 동안, 그러니까 6개월 동안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의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과 위엄의 혁혁함을 나타내는지라”(에1:4b). 아하수에로 왕의 용모가 준수했고 키도 훤칠했습니다. 그런데 이 왕은 사실 포악했습니다.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가 300명의 전사를 이끌고 데모빌레 협곡에서 결사항전하고 죽었습니다. 그 전투에서 아하수에로 왕의 두 형제도 죽었는데, 그 화를 참지 못하고 이미 죽은 레오니다스의 시신을 찾아내어 참수를 했습니다. 그런 아하수에로 왕이 각종 금잔, 은잔에 보석으로 장식된 궁전에서, 부족하지 않는 술과 안주로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큰 잔치를 통해서 그 위엄을 나타낼 때 자유롭게 술을 마시도록 했습니다. 억지로 하지 않고 각 사람이 마음대로 하게 했습니다. 어질고 여유로움을 가진 왕, 왕 중에 큰 사람임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그 놀라운 잔치 후에 7일 동안의 또 다른 잔치가 열리던 마지막 날, 그 절정에 이르러는 와스디 왕후를 그 잔치에 나오라고 했습니다. 왕후 와스디는 용모가 보기에 좋았습니다. 이 일 또한 왕의 권세를 그 잔치에 참여한 모든 왕들과 지도자들에게 보여줄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왕후 와스디가 왕의 부름을 거절했습니다. 교만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모두 교만하다는 사실, 우리가 은혜 안에 있어도 교만의 순간을 완전히 물리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단지 교만에 탓을 돌릴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할 만큼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절박한데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하고 하나님을 정면으로 따져들 만큼 교만한 사람이 우리들입니다. 아하수에로가 지금 온 세계에 자기 권세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 절정의 순간에 와스디가 왕의 얼굴에 수치를 주었습니다. 왕은 와스디를 처리할 방법을 페르시아의 법과 규례를 따져 찾았고 7명의 신하들이 해법을 발견했습니다. 궁전과 각 지방과 가정에 남자가 자기 아내를 다스릴 것을 어명으로 명하고 왕후 와스디를 폐하였습니다. 우리는 생각하고 싶습니다. 이 세상 왕이 이렇게 활개를 치고, 자기 마음대로 다스리는 내용을 거룩한 성경책에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에 대해 관여하지 않으시고 느긋하게 써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느긋한 한 분 성도님이 있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조중휘 성도입니다. 참 느긋하신 분입니다. 지난 토요일에 모친 생신잔치에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성도님이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 친구 중에 판사도 있고, 교수도 있고, 의사도 있지만 상관하지 않습니다. 내 몸 건강해서 나는 나 하고 싶은 대로 살고 걔들은 자기 길대로 삽니다. 하지만 자기 생활에 바빠서 부모님 몰라보고 산다면 그게 뭐 대단할까요. 나는 항상 감사하며 삽니다.” 교회를 섬긴다고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분주하게 산다고 할지라도 감사할 줄 모르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기본적인 도리도 지키지 못하고 산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성도님께 이런 말로 권면하기 원합니다. 성경 말씀을 더 배우기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지식 없는 소원은 선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세상과 우리를 위해서 열심을 내시는지, 그러면서도 얼마나 느긋하신지 알기 원합니다. 말씀 속에서 알기 원합니다. 내가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때 우리는 급히 가서 잘못된 길로 나가기 쉽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밖에만 배울 수 없는 지식이 있습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인생 지혜로도 얻을 수 있지만, 느긋한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일을 만나면 우리는 당황하기 마련입니다. 우리 마음은 상황에 떠밀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배우면, 우리가 실망하든, 실패하든, 낙담하든, 성공하든 때를 따라 도우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느긋함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야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네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했습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이끌려 제사를 드리러 올라갔습니다. 이삭이 둘러보니까 제사를 드리러가는 아버지에게 제물이 없었습니다. “아버지,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 아브라함의 마음은 얼마나 무너져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무슨 말로 이삭에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말한다고 한들 이삭이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묵묵히 하나님께서 부탁하신 일을 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제 제단 위에 이삭을 누이고 칼을 빼들고 이삭을 내리치려 할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급히 부르시고 독자라도 아끼지 않는 그의 믿음을 보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둘러보니까 거기에 제물될 양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제물을 보고 말하기를 “여호와 이레”라고 했습니다. 준비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내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일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일들 속에 하나님은 느긋하게 준비하고 계십니다. 지난 주에 박미선 사모가 두 번 울었습니다. 우리의 매일의 삶은 살아 있습니다. 울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고 즐겁기도 합니다. 이 세상은 점점 악해져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여러 사람이 범죄하고 있으니 우리 믿음을 흔들어놓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모든 일을 보고도 눈깜짝하시지 않습니다. 25년도 400년도 하나님께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아침에 기쁜 마음으로 마당에 마련해둔 수영장 물을 퍼냈습니다. 말씀 묵상이 끝나고 느긋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니까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에서만 우리가 전적으로 주님을 믿는 믿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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