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4일> 큰 이득을 얻는 삶(딤전 6장) | 이정식 | 2016-08-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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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득을 얻는 쪽으로 선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트에 가더라도 내 주머니에 있는 돈으로 어떻게 하면 최고의 이득을 얻을 수 있을까 합니다. 모든 사람은 이득을 얻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최소의 자본으로 최대의 만족을 얻는 삶입니다. 며칠 전에 한 목사님 가정하고 영화관에 갔습니다. 들어갔는데 그 목사님 부부와 저희 부부 딱 네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야, 이 영화관 우리가 전세 냈네요.” 괜히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꽉 막힌 도로에서 6명 이상 탄 승합차를 타고 뻥 뚫린 버스전용차로를 달릴 때가 있습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대학시절 4월 18일만 되면 종암동에서 수유리까지 마라톤을 합니다. 자동차들이 다니던 도로를 막아놓고 대학생들이 도로를 점령을 하면서 뛰어다닙니다. 내 것이 아닌데 마치 내 것인 양 자유롭게 달리는 것이 아주 통쾌한 기억이었습니다.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라”(딤전6:1-2a). 사도 바울이 살던 시대에 주인과 종이 있던 시대였습니다. 지금도 다른 형태로 남아있기는 합니다. 주인과 종은 다릅니다. 계급적으로 다르고, 하는 일이 다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복음 안에서 보니까 한 아버지를 모신 같은 형제자매인 것입니다. 그 기쁨과 자유를 가지고 집에서는 주인과 상전으로 있으면서, 교회에 가면 김 형제, 이 형제 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 동등함으로 여겨지는 기쁨을 누리는 것은 좋지만, 그 이득을 가지고 섬길 일을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손해입니다. 먼저 주인에게 손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귀한 복음을 듣고 변화된 자기 종이 주인을 만만히 생각한다면 주인에게 손해입니다. 그런 종이라면 집안일을 잘 돌보도록 지시하는 것이 불편할 것입니다. 예수님께 손해입니다. 주님의 귀한 복음은 도리어 자유케 된 후에 다른 사람을 더 잘 섬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것인데, 그렇지 못하니 주님께 손해입니다. 무엇보다 그 자신에게 손해입니다.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복음을 받아 겸손한 종이 되어 주인을 잘 섬기면, 주인에게서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주인이라고 할지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이 존중할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그런데 방종으로 행하면 존중받을 수 있는 기회를 걷어차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잘 섬기라”고 했고, 이것이 더 큰 이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딤전6:3-4a).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한 말씀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합니다. 그런데 신천지와 같은 이단, 구원파 같은 이단들은 하나같이 구원을 말하지만 경건에 관한 교훈에 대해 주목하지 않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들에게 14400에 속하는 표를 받으면 구원받는다고 미혹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을 받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복음 안에서 살되 경건이 가장 큰 이득이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6:11-12a). 이 세상에 내 가족밖에 없는 것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내 부모님만 부모님인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내 자식만 자식인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입니다. 단지 세상살이 같으면 보기 싫으면 안 보면 되고 가고 싶지 않은 곳에는 안 가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교회 서로 맞지 않는 사람들이 어울려 있는 곳입니다. 그 속에 생활할 때 우리에게 경건의 연습이 필요한 것입니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라.’ 내 마음 아프게 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 사람을 견디고 견디고 합니다. 어떨 때는 치가 떨립니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일 수가 있는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 우리 성도들 가운데 우리를 그렇게 몸서리치게 만드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다른 데 가지 않고 오히려 오래토록 우리와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새롭게 하시기 위해서 그런 사람을 교회 안에 두십니다. 내 인내의 한계를, 내 믿음의 약함을, 내 온유의 별것 아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속 좁은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게 얼마나 힘듭니까. 그게 힘들어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구별되고 차별이 있는 섬김을 받으면서 자신의 만족을 얻으려 합니다. 며칠 전 페이스북에서 초호화 대형 여객선 이스케이프호에 대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이스케이프’는 떠남입니다. 어딘가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많은 돈을 주어야 탈 수 있는 호화여객선. 그런데 그 안에는 200명만이 들어갈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 따로 구별되어 있습니다. 그 공간의 이름은 ‘더 헤븐’입니다. 천국이라는 이름입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줄을 길게 서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 텅 빈 엘리베이터가 있습니다. 거기는 더 많은 돈을 낸 사람만 탑승할 수 있습니다. 일반 부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수영장에는 항상 사람이 붐비지만, 더 헤븐에는 항상 쾌적하고 조용한 가족 수영장이 따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수족관에도 보통은 먼 거리에서 사육사와 연기하는 돌고래를 보지만, 구별된 수족관에는 돌고래와 함께 가까이에서 놀 수 있습니다. 요즈음은 심지어 롯데월드에서도 일반 자유이용권 외에 더 많은 돈을 내면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티켓이 있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더 특별한 섬김과 더 특별한 대접을 받고 싶은 우리의 소망을 말해줍니다. 좀 더 좋은 차, 좀 더 쾌적하고 넓은 집, 3천 만원짜리 어린 양의 털로 만든 실크 양복, 이런 것이 우리에게 좀 더 우월감을 줄 것입니다. 허름한 옷을 입고 교회의 재활용품을 가지고 갔더니 그 주인이 저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7-8). 돈과 명예와 권력이 길어야 10년을 넘길 수 없다는 것은 세상도 아는 것입니다. 돈을 가지고 무덤까지 가지고 갈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도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돈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돈과 명예와 권력을 가지고 자기 취향에 만족을 줄 수 있는 곳에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여행하며 최상의 서비스를 받으며 나는 구별된 사람이라는 그 느낌을 받는 데에 돈을 쓰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최고의 대접을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교회에 와서도 나만이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 할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 우리 마음은 60평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은 10평도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둘러 보아도 우리 마음은 누추하고 옹졸하고 쉽게 시험에 빠져들고 쉽게 무너집니다.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특별한 대접을 받는 것은 쉽지만,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닌 우리 마음을 주목하는 삶은 오리무중인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니 우리 마음의 경건의 훈련이라는 것이 소용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금생과 내생에도 약속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경건에 힘쓰는 사람의 마음은 아무것도 없어 보이면서도 만만히 대할 수 없는, 학생들 말로 아우라가 있습니다. 잘 입은 자켓 속에는 없는 것이 경건의 연습을 하며 힘써 믿음을 지키는 사람의 삶 속에는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큰 이득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딤전6:13-16). 지금 우리를 바라보시는 분이 누구신가 하면, 영원히 죽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만이 만유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수고하는 그것을 가장 귀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보이지 않게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카루스는 태양에 이르기 위해 밀납 날개를 달고 올라가다가 밀납이 녹아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 못할 바로 그 빛에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영생을 취하라”(딤전6:12a). 영생을 취하는 삶이 무엇인가 바로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는 삶입니다. 유일한 주권자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여러분과 저에게 본을 보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사53:10-11).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자기 영혼의 수고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시골 나사렛 촌에서 자랐습니다. 그의 평생의 오가던 길이 경상도 땅 보다도 작은 길을 오가셨습니다. 그의 평생의 제자들이 작게는 12명, 아무리 많이 잡아도 5백명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치던 제자들 가운데 단 한 명도 깨닫지 못했을 때 당신의 전부를 주셨습니다. 만물을 살게 하신 창조주의 권능으로 천만천사를 동원하여 불벼락을 내리실 수 있는데도, 침묵으로 경건함을 이루셨습니다. “그가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5:7-9) 주님은 마지막 순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했습니다. 당신의 마음의 수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 마음의 갈등을 가진 채로 경건함을 이루셨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셨습니다. 영생을 취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미 하나님의 증거이셨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심한 싸움과 눈물을 흘려야 하셨을까요? 주님께서 의와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붙들었고, 바로 그 경건한 삶을 살아서 하나님 앞에 들으심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딤전6:12a). 주님도, 여러분과 저도 경건의 삶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보통 선수는 선수를 알아봅니다.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 힘쓰는 사람은 역시 경건한 삶을 이루기 위해 애쓰는 사람을 알아봅니다. 그냥 무슨 부처님처럼 후광으로 보여주면 더 쉽겠지요? 빛이 머리 위에 비춰주면 훨씬 더 잘 알아보겠죠? 하지만 죄 있는 사람은 어떤 것으로 보여줘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대표적으로 우리 주 예수님은 가장 경건하셨는데, 그래서 충분히 알아볼 만했는데도 아무도 못 알아봤습니다. 아무도 그가 왜 그렇게 사는지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가 왜 고난의 길을 걸으셔야 했는지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그때 우리 주님은 무엇을 보셨을까요? 무슨 낙이 있으셔서 십자가를 오르셨겠습니까. 주님이 보신 것은 오직 한 분 하나님입니다. 나를 보고 계시는 분은 한 분 하나님이시다. 그 한 분 하나님만이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방패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의 구원이시다. 바로 이 확신으로 주님께서 그 수고를 기쁨으로 감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얼마나 존귀한 자로 보시는 지 아십니까?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는 한 분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귀하게 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소망하며 사는 삶이야말로 가장 큰 이득을 얻는 삶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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