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31일> 온 가족을 위한 기도(요12:1-11) | 이정식 | 2015-06-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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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생활을 하는 가족에게 가족으로서 바라는 것은 '잘 풀리는 것'입니다. 공부가 잘 풀리기를 바랍니다. 공부가 좀 덜 풀려도 대학이 잘 풀리기를 바랍니다. 대학이 좀 덜 풀려도 직장이 잘 풀리기를 바랍니다. 직장이 좀 덜 풀려도 결혼이 잘 풀리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회에 나가 살 때 인간관계가 잘 풀려서 내가 노력한 것 이상으로 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은 '잘 되야 될텐데' 하는 마음입니다. 잘 풀리고 잘 되면 만사가 형통합니다. 우리는 늘 기대합니다. 우리 모두가 잘 풀리고 잘 될 것을 하나님도 바라고 계십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7). 개역한글에서는 '맡겨버리라'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께 맡기고는 털어버리는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합시다. 할일을 하되 그 결국은 주님께 맡겨 버립시다. 그런 후에 우리가 진정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에 주목하기를 원합니다. 베다니에 가난한 오누이가 살고 있었는데 오라버니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였습니다. 성경에 이들의 부모님이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고아처럼 자란 세 남매일 것입니다. 나사로는 가정의 실질적인 가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사로가 죽을 병을 얻었습니다.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요11:1). 소망스럽지 않습니다. 꿋꿋이 견뎌왔는데 더 심한 고난이 닥쳤으니 삶을 비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 사람은 이런 환경 이런 시험 앞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요11:3).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우울한 인생 노래를 부르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병든 일을 해결해주실 것을 고했습니다. 우리 가족을 위한 첫 번째 기도는 예수님을 의지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시험이 닥쳐오지만 그 시험이 도리어 그 사람을 강하게 하는 재료가 됩니다. 급하면 '엄마'를 부르지만, 이들은 급하면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참 사랑스러운 식구들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도 늘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요11:5).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도 야무지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왠지 대견스럽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다가 끝끝내 생의 의지를 잃어버리는 사람들을 볼 때 우리는 비통해집니다. 안 됩니다. 그런 길로 걸어가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바램을 이루어주는 그렇고 그런 신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 우리의 능력 우리의 소망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한 항상 소망이 있습니다. 마르다를 보십시오. 그는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모든 잔치 음식을 혼자 준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집안 환경이 어려웠지만 그만큼 그의 손이 커졌습니다. 그렇다고 마르다가 단지 억척스러운 사람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항상 일을 할 줄 알았지만 예수님을 의지하는 딸이었습니다.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눅10:38). 눈 앞에 땅만 보고 사는 딸이 아니었습니다. 손을 재게 놀려 일하면서도 예수님을 항상 섬길 줄 아는 딸이었습니다. 꿋꿋이 견디어 내는 삶은 박수쳐줄 만하지만, 소망을 품고 있지 않다면 사랑할만한 것은 못됩니다.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은 우리가연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족을 위한 두 번째 기도는 예수님을 가장 귀한 분으로 섬기는 마음을 달라는 기도입니다. 마음을 내려놓지 마십시오. 현실에 맞게 소망을 조정하지 마십시오. 여러 사건사고를 보면서 '그저 우리 자녀들이 건강하게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위대한 하나님, 광대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주시기 원하시는지 확인해보십시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위대함을 간직할 줄 압니다. 방탕에 빠져 대학시절에 사생아를 낳기도 했던 어거스틴을 위해 어머니는 30년을 기도했습니다. 어거스틴이 기독교 신학을 정립한 하나님의 종이 된 후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은 어머니의 기도 때문입니다. 나는 이 사실을 주저없이 인정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진리 발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마음, 그밖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밖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밖에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마음을 주신 것은 어머니의 기도 덕분입니다. 그렇게 큰 유익을 보게 한 것이 어머니의 기도였음을 나는 의심치 않습니다." 눈물로 기도하면 기다린 30년을 하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정성을 다하라는 말이 아니라, 자식이 어떤 형편에 있어도 기도의 소망을 낮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12:3). 가난한 집에서 어떻게 이런 향유를 모을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출처보다 더 귀한 것은 어떻게 그 비싼 향유를 단지 몇 분 사이에 예수님 발에 다 부을 수 있었을까요. 옆에 섰던 가룟 유다가 보기에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그 향유를 팔아서 차라리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편이 좋을 것이었습니다. "지극히 비싼 향유"라고 했습니다. 발에 붓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다소곳이 무릎꿇고 앉은 채로 그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요12:7). 그것을 아까워한 가룟 유다에 대해 성경은 말하기를 "그는 도둑이라"(요12:6).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행하실 십자가의 일이 이토록 경외할 만한 일이었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뭘 좀 했다고 뭘 좀 드렸다고 주관하려고 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는 달랐습니다. 가장 귀한 분을 가장 귀하게 섬기면서도, 주님을 경외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진실한 모습입니다. 겸손한 모습입니다.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향유 냄새가 온 집안에 가득한 모습입니다. 가족을 위한 세 번째 기도는 예수님의 간증이 되기를 원하는 기도입니다. 잔치할 때 마르다는 일을 했고, 마리아는 예수님을 향유로 섬겼습니다. 나사로는 어디에 있었는가 하면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요12:2). 다 자기 일에 집중하고 있는데 나사로만 앉아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일하면서 마리아를 책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일이 많았습니다. 나사로는 아예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사로는 양반이었기 때문일까요? 남자는 바깥 일만 하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나사로는 예수님의 간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간증이었습니다. 나사로는 죽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도 이틀이나 더 다른 곳에 계시다가 죽은 나사로를 찾아오셨습니다. 마르다는 제일 부지런해서 동구밖까지 쫓아 와서 맞이했습니다. 나중에 만나러 온 마리아도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요11"23)고 말씀하셨지만, 마르다와 마리아 모두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 내가 아나이다"(요11:24)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여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머물러 있는 믿음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고 하시며 믿음을 바로잡으시기 원하셨습니다. 오늘 잔치집에 가만히 앉아 있는 나사로는 다시 산 나사로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요11:43-44). 나사로의 부활 사건부터 사람들이 예수님을 더욱 질투했습니다. "이 날로부터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요11:53). 그렇지만 질투하면서도 동시에 궁금해 했습니다.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요12:9). 만약 그런 일이 정말로 있을 수 있다면 이건 우리가 믿고 살던 모든 것이 헛된 것이 되니 어떤 사람은 분해 했고, 만약 그런 일이 정말로 있을 수 있다면 이건 진실로 믿을 것은 예수뿐이니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요12:10-11). 모든 아름다운 것, 모든 위대한 사상, 모든 위대한 성공, 모든 위대한 예술을 다 무용한 것으로 만들어 놓는 부활, 나사로는 부활의 증인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실패하고 멸망하고 죽은 자처럼 되었어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살리십니다. 나사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간증이었습니다. 나사로는 잔치 집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을 드러냈습니다. 예수님을 의지하는 가족이 되기를 기도합시다. 가장 귀한 것으로 예수님을 섬기는 가족이 되기를 기도합시다. 그리고 예수님의 간증이 되는 가족이 되기를 기도합시다. 베다니는 '베트 아니이야'로, '가난한 자의 집' 또는 '푸른 과일의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난했어도, 실패했어도 나사로의 집은 예수님께 대해 항상 푸른 과일의 집이 되었습니다. 온 집안에 향유 향기가 가득했고, 온 식구가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두고 사랑하시는 가족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 대하여 잘 풀리는 가족입니다. 사랑할 만하지 않습니까. 가슴 깊이 소망할 만한 가족이 아닙니까. 우리 삶이 끝날 때까지 물러나지 않을 만한 기도가 아닙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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