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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낭독에 대하여 이정식 2015-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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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니 불현듯 오래된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초등학교를 다니면서부터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남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말 더듬기는 무척 답답했고 창피한 게 많았다. 
 
중학교를 다니던 무렵 수업시간에는 그 날짜와 같은 번호를 가진 학생은 어김없이 호출되어 책을 읽어야 했다. 내 번호가 겹치는 날은 아침부터 가슴이 답답했고 오금을 펴지 못하며 무사히 지나가길 바랐다.

그 바람이 깨진 건 어느 가을날 국사 시간이었다. 이십대 젊은 여선생님은 빼어난 미모는 아니었지만 한창 이성에 관심이 많은 까까머리 중학생들에게는 동작 하나하나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이윽고 내 번호가 망치로 못을 박듯 호명이 되었고 나는 책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을 읽으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꿈결처럼 들렸으며, 멍하니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책을 든 두 주먹에서 땀이 흠씬 배어 나왔다. 나는 결국 한 음절도 소리 내지 못했다. 

간혹 운전 중에 교육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장시간 연속해서 소설을 낭독하는 것을 들을 때가 있다. 낭독은 듣는 사람들에게 낭독되는 내용뿐 아니라 남의 말을 경청하는 태도까지 배우게 하는 효과가 있다. 옛 사람들은 공부를 눈으로만 하지 않았다. 눈으로 보고 입으로 소리 내어 읽으며 머리로 생각하는 공감각적이고 총체적인 방식을 활용했다. 거기다 글을 따라 쓰기까지 했으니. 

인간의 목소리에는 다른 사람을 공명하게 하는 울림이 있다. 책을 읽어 내려가는 사람의 호흡과 감정이 듣는 사람에게 전달되며 혼잣말을 하거나 혼자 읽을 때보다 느낌이 훨씬 깊어진다. 그 교감의 기억은 평생 갈 수도 있고 교감의 경험은 무엇보다 소중한 개인적 자산으로 남는다. 

서울 신촌역 부근에 가면 ‘문학다방 봄봄’이 있다. 이곳의 김보경 대표는 독서의 가치를 전파하며 소리 내어 읽어 나가는 낭독을 통해 인문학적 교양인에게 접근하는 방법을 설파하고 있다. “떠벌 떠벌 낭독하면서 사는 즐거운 인생, 이 험한 세상에 우리가 택할 가장 편리한 행복”이라며. 

나도 낭독 모임을 가지고 있다. 최근 이 모임에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을 읽었다. 소로는 보스턴 인근의 월든 호숫가에 통나무집을 짓고 밭을 일구고 호수와 주변을 에워싼 숲에 사는 벌레와 새와 짐승들과 함께 소박한 자급자족의 삶을 영위했다. ‘월든’을 소리 내어 읽고 경청하고 있자니 마치 소로가 된 듯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런 감정은 전엔 없었다. 

낭독을 하면 구성원의 개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다양한 직업을 가진 십여명의 낭독자들 중에는 세련되고 자신 있는 목소리도 있고 낭랑하고 진지한 목소리도 있다. 느리고 깊으며 설득력이 느껴지는 목소리, 느릿하고 매력적인 미성, 변론하듯 또박또박 논리적인 어조, 옆에서 이야기하는 듯 다정한 목소리 등 참 다채롭기도 하다. 거기서 삶과 존재의 다양성을 긍정하게 된다. 때로는 목이 메어 말문이 막힌 적이 있고, 틀린 문장을 고쳐 읽거나 그냥 지나치기도 한다. 한때는 밤을 새워 ‘월든’을 읽었으며 소로가 손수 지은 통나무집도 같이 지어 보자는 계획도 세웠다. 

지난 시절 책을 읽지 못하던 나는 책을 소리 내어 읽으며 남몰래 울컥거리기도 했다. 말더듬이 중학생처럼 간혹 더듬거리기도 하고 틀린 단어나 문장을 서둘러 고쳐 읽기도 했다. 누군가 말한 지난여름의 위대함을 알 길은 없지만, 나는 성수동의 한 카페에서 여름내 소리 내어 책을 읽었다. 

- 최석운 화가(국민일보 2015.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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