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선교(2): 아도니람 저드슨 | 이정식 | 2014-02-2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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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한 국가는 미국이다. 이러한 미국의 선교역사 속에서 의미있는 날이 있었으니, 이는 1812년 2월 5일, 미국 최초의 해외 선교사 파송식이 있던 날이었다. 이 날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던 8명의 남녀 중 아도니람 저드슨와 그의 아내 낸시는 인도로의 4개월 항해를 신혼여행으로 여기며 미국 최초의 선교사로서의 여정을 시작하였다. 아도니람 저드슨은 1788년 미국 동부 메사츄세츠에서 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6세에 명문 브라운대학교*를 입학해 4년의 과정을 3년만에 수석으로 졸업하고, 정통신학을 고수하는 앤도버 신학교를 졸업한 후 한 저명한 교회로부터 목회자로 청빙을 받기도 했었다(*브라운대학교 재학시절 아도니람은 이신론의 영향으로 기독교 신앙을 버렸으나,자신에게 이신론을 가르친 친구가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고통스럽게 죽은 일을 목격하면서 믿음을 다시 갖게 되었다.) 1810년 저드슨과 동료 신학생들은 회중교회 목회자회의에 그들 자신을 선교사업에 헌신하겠다는 내용과 조언, 방향 제시, 기도 요청을 담아 청원서를 냈다. 이 젊은이들의 열정이 자극제가 되어 미국 선교역사에 큰 역할을 하게 될 해외선교회가 구성되었다. 이후, 저드슨은 세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자신을 파송하였던 회중교회와 달리하게 되어 침례를 받고 회중교회를 사임하며 미국 침례교회를 위해서 봉사하게 되었고, 이것이 미국 침례교 해외선교부가 탄생되는 계기가 되었다. 인도에 도착한 후, 동인도회사로부터 인도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고는 이곳저곳을 알아보다 여유치 않아 결국 추방을 피하기 위해 남은 배를 타게 되었는데, 이 배는 미얀마 랭군으로 떠나는 배였다. 저드슨을 처음 파송했던 선교회와 저드슨이 처음 원했던 선교지가 미얀마(당시 버어마)였으나, 외국인에 대한 박해의 소문으로 인해 선교지를 바꿔던 나라로 1813년 저드슨이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미얀마에서의 저드슨의 생활은, 정부의 박해, 열대성 열병, 투옥생활, 아내와 자녀들의 사망 등과 같은 고난와 고뇌로 점철되어 있었다. 저드슨은 정부의 통제의 고삐가 조여올 때는 집에 틀어박혀 성경번역에 힘을 다하고, 조금 자유스러운 때가 되면 미얀마 사람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하는 전도활동에 힘을 다하였다. 저드슨이 미얀마에 발을 딛은 후, 6년이라는 긴 세월 후에 최초의 개종자를 얻게 되었고 7년째였던 1820년에는 10명의 미얀마인들이 침례를 받게 되었다. 1820년대 초반, 미얀마와 영국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미얀마 정부는 모든 외국인들을 영국의 첩자로 생각하였고, 이로 인해 저드슨도 1년 반 동안 족쇄와 어둠이 내리깔린 벌레와 병균이 들끓는 감옥에 지내고 되었고 영국군의 북상으로 인한 북으로의 행군에 죄수로서 끌려가면서 말로 다하지 못할 고초를 당하였다. 저드슨의 투옥생활이 끝난지 얼마지 않아 저드슨의 아내 낸시는 병약해진 몸으로 인해 소천하였고, 몇 달 후 저드슨 자신이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동냥젖을 먹였던 어린 딸도 열병으로 미얀마 정착 초기에 죽은 첫째 아기와 아내 낸시의 길을 따라 죽음을 맞았다. 무거운 죄책감과 슬픔으로 저드슨은 2년 이상 사람들과의 만남을 끊고 홀로 떨어져 살았으며, 하나님을 믿지만 그분을 발견할 수 없다는 좌절감에 빠져 있기도 했다. 치유될 수 없을 것 같았던 상처의 아픔은 아물어져갔고, 신앙과 사역에 영성이 더해지기 시작했다. 미얀마 여러 지방을 순회하면서 미얀마 땅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깊이 맛보아 감격하기도 하였다. 1834년, 저드슨은 선교사 미망인이면서 미얀마에 계속 남아 선교사역을 감당하던 사라 보어드맨과 재혼하여 11년의 결혼생활을 통해 여덟 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 자녀 중 장성할 때까지 살아남은 자녀들은 다섯 명이었다. 1845년 저드슨과 아내 사라, 세 자녀가 미국 방문길에 올랐고, 여정 중에 아내 사라는 병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33년만에 조국인 미국땅을 밟은 저드슨은 명사가 되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저드슨의 설교를 듣고자 몰려들었다. 저드슨은 순회설교를 승낙하고는 낯선 땅의 이상한 풍습과 복장 등의 이야기를 듣고자 모였던 사람들에게 복음에 대해 설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순회 설교 중, 저드슨은 생동감 넘치는 젊은 작가 에밀리 첩보크를 만나게 되었고 에밀리는 저드슨의 세번째 부인이 되었다. 에밀리는 저드슨의 아내로 아이들의 엄마로의 생활에 적극적으로 임하였고, 언어와 선교사역에도 열심을 내었으며,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여 선교지에서 많은 기록을 남겼다. 저드슨과 에밀리가 미얀마에서 함께 사역한 기간은 3년이었다. 1859년 저드슨은 병들어 치료를 위해 배에 올랐고, 여정 중 62세의 나이로 주님 품에 안기어 바다에 수장되었다. 다음해 미국으로 돌아온 에밀리도 병들어 3년후 남편 저드슨의 뒤를 따라 하늘나라로 향하였다. 미얀마에서 37년을 보낸 아도니람 저드슨은 성경을 미얀마어로 번역하였고 그의 기념비적인 미얀마 영어사전을 완성하였다. 그의 말년에 미얀마 교회는 7,000명의 교인들이 있었고 163명의 선교사들을 감독하였다. 아도니람 저드슨은 사역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사에 나타나는 질병과 사망으로도 평범하지만은 않은 선교사이다. 미국 최초의 선교사였고, 미얀마 선교의 기초를 닦은 선교사였다. 저드슨의 세 아내는 고생끝에 모두 병들어 한창 일할 나이에 모두 사망하였으며, 열세 명의 자녀 중 두 명은 출산 중 사산되고, 다섯 명은 열병 등과 같은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미얀마 선교를 위해 지불한 아도니람 저드슨 가족의 희생은 하나님께서 받아 그 나라가 미얀마에 임하게 하는데 사용하셨다. 약 150년 전에 미얀마를 위해 자신의 일생과 가족을 불태웠던 아도니람 저드슨의 길을 따라 미얀마 선교를 위해 오늘도 수고와 눈물을 아끼지 않고 계시는 분들을 기억하며, 미얀마에 복음이 편만케 되는 날을 기대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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