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 하나님말씀 >
<11월 24일>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막4:1-34) 이정식 2013-11-27
  • 추천 0
  • 댓글 0
  • 조회 136

http://spbbc1.onmam.com/bbs/bbsView/43/118632

  하나님은 참 신이시고, 사람은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고, 하나님의 생각은 하늘보다 높으니 차원이 다릅니다.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가르치는 방법은 두 가지인데 그 첫째는 직접 행동으로 본을 보이는 것이요 그 둘째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세상에서 겪는 일을 빗대어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기적을 베푸심은 행동으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며,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 마음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유로 말씀하실 때 그 비유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일들이니까 사람의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는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또한 풀어주셔야 합니다. 이 땅에서의 일을 빗대어서 말씀하시는 것이지만 하고자 하시는 말씀은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원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과 비유로 가르치시는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4:9, 23)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다에 배를 띄워 그 위에 앉으셨고 바닷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때 씨 뿌리는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지 못하므로 결실치 못하였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가 되었느니라"(막4:3-8) 뭐 이해하고 말고가 없이 그저 그 말씀 그대로 다 이해됩니다. 밭에 씨를 뿌려본 사람이면 다 이해할 만한 내용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한 사람들 그리고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혼자 계실 때에 "그 비유가 무슨 뜻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여러분 씨 뿌리는 비유는 농사 잘 지으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씨 뿌리는 비유로 천국의 일, 하나님의 일을 말씀한 것입니다. 말은 이해가 되지만 하나님의 뜻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말씀하셨는데,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풀어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비유의 뜻을 풀기 전에 먼저 한 가지 특별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요한 대목에서는 한 번 뜸을 들이는 게 보통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막4:11)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 중에 하나가 어떤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하게 하고 어떤 사람들은 알아듣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공평하신 예수님께서 바닷가에 모여 있던 큰 무리를 다 한 가지로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갈라 세우셨습니다. '너희'와 '외인'이 그것입니다. '너희'는 열두 제자를 포함하여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었고, 외인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갈라 세운 후에 더욱 중한 말씀을 하셨는데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막4:12). 가르침은 깨달을 수도 있고 깨닫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깨달은 사람은 깨달은 대로 살면 될 것이고, 못 깨달은 사람은 잘 가르쳐서 깨닫게 하는 것이 선생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선생 중의 선생이신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가 '깨닫지 못하게 해서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주 당황스럽고 당혹스럽습니다. 이해하면 이해한 것이고 모르면 모르는 것인데 깨닫지 못하게 했다는 것은 무슨 말씀이며, 또한 죄사함을 받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는 것은 어인 까닭입니까? 예수님이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말씀하셨습니다.

  궁금하지만, 예수님도 더 말씀 안하시고 곧장 씨 뿌리는 비유를 풀어주는 말씀으로 넘어가셨으니까 우리도 넘어갑니다.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말씀이 길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간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리우는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막4:14-20). 이 말씀은 우리의 관심을 끄는데 이 네 가지 종류의 밭가운데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를 따져보는 재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말씀을 뿌리는 자는 예수님이고 나중에는 주의 종들입니다. 길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말씀을 듣고 있는데 새가 와서 씨를 먹어버리듯이 사단이 그 말씀을 다 빼앗아가니 마음 속에 남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 기쁨으로 받아서 말씀을 지키려고 하지만 환난과 핍박을 받을 때 포기하고 마는 사람입니다. 교회 다니다가 집안 불화 생긴다고 못 다니게 하면 그만두는 것입니다. 잘 되기를 바랐지만 몇 번 쓴 잔을 마시게 되면 예배를 그만두는 것입니다. 절하지 말라고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했는데 집안 어른이 나무라면 제사를 계속 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말씀이 심겨질 뿌리가 없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가시떨기에 뿌리운 자는 말씀을 듣고 자라기는 하는데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같이 들어와서 말씀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소화불량에 걸린 사람들과 같습니다. 걱정하고 염려하고 스트레스 받으면서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어도 체하든지 소화가 안 됩니다. 위로나 나오지 않고 아래로도 쏟지 못하는 답답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먹으면서 염려근심을 함께 먹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좋은 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 심어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제가 10여 년 전에 태어날 때부터 교회를 다니고 예배하고 있던 청년 자매와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 씨뿌리는 비유가 교재 내용이었습니다. 함께 공부하면서 자매에게 물어봤습니다. "자매는 여기 네 종류의 마음밭이 있는데 어디 쯤 와 있다고 생각해?" 뭐라고 대답했을 것같습니까?  좋은밭이라고 할 자신은 도무지 없고, 교회를 지금까지 다녔는데 사단이 다 빼앗아가버리는 첫 단계라고 말하는 것은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고 그래서 선택했습니다. "저는 세 번째 단계인 것같아요. 말씀을 듣고 자라긴 하는 것같은데 세상 염려, 재물 유혹, 욕심 때문에 결실만 잘 못하는 것같아요". 여러분, 이 말씀은 하나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유형일 수도 있습니다. 또 신앙의 단계일 수도 있습니다. 또 신앙이 성숙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마음이 어떠한가에 따라 지금 말씀을 듣고 있는 마음의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든 어디에 적용해도 좋습니다. 다 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 모두가 좋은 땅이 되는 것입니다.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는 마음에 심어 지키는 것입니다. 한 말씀에 한 순종, 한 예배에 한 적용을 하는 것입니다.

  이 열매 30배, 60배, 100배의 열매 결실이란 어떤 것일까요? 주님께서 바로 이어서 다른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막4:21). 하나님의 말씀은 등불입니다. 그리고 그 등불을 가진 사람은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됩니다. 이 등불을 말 아래 놓거나 평상 아래 두면 등불이 있지만 꺼질 것이고, 등불이 있지만 지면을 비추지 못하니 쓸모없는 등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정도가 아니라 '험한 세상 등불이 되어' 우리가 빛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등불은 등잔대 위에 있어야 합니다. 등불 없는 등잔대가 소용없고, 등잔대 없는 등불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 사람 속에 심겨질 때 세상을 밝힙니다.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막4:22). 숨긴 것은 드러내려고 숨긴 것이며, 감추인 것은 나타내려고 감추인 것이며, 심기운 것은 열매 맺기 위해 심기운 것입니다. '나는 등불이다'하고 말 아래 두면 꺼져버린 등불입니다. '나는 등불이다' 하고 평상 아래 두면 소용없는 등불입니다. 길가밭이나 돌밭이나 가시밭은 저가 무슨 말로 핑계하더라도 말씀이 열매맺지 못합니다. 이제 여러분, 주님께서 이 비유를 풀기 전 뜸을 들인 말씀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비유를 깨닫지 못하게 하심과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함께 한 사람들에게만 비유를 하시고, 또 그 비유를 풀어주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돌이켜 죄사함을 얻은 사람입니다. 거꾸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비유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이룰 수 없고, 말씀을 열매 맺을 수 없습니다. 말씀의 등불이 우리 자신을 비추어 어두운 것이나 연약한 것이나 죄악을 다 드러내며 고침을 받고 돌이키고 죄사함을 얻어 말씀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막4:24-25). 하나님의 말씀은 농담도 장난도 객기도 아니며, 취중진담은 더욱 아닙니다. 받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기게 하는 권능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권리와 의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신다는 헤아림으로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주 예수와 함께 하는 '너희'가 될 것인가 듣기는 하지만 다 빼앗기고 마는 '외인'으로 남을 것인가 결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혹시 나는 세 번째 단계다. 내가 말씀을 받은지 오래지만 살아갈 형편과 재물과 여러 욕심에 결실치 못하는 자다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게 어정쩡하게 서 있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죄사함 받지 못한 자라고 분명히 선언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죄를 떠나 하나님께로 돌이켜서 말씀을 듣고 받는 사람에게 어떤 축복이 있습니까? 특전이 있습니다. 좋은밭에 뿌려진 씨는 어떻게 자라는지도 모르게 자랍니다.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막4:27)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3:16)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막4:28)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심으면 그 말씀이 마음 속에서 스스로 열매를 맺습니다. '감자에 싹이 나서 잎이 나서 가위바위보 하나 빼기'를 할 게 아니라 많은 감자가 땅 속에서 주렁주렁 열리는 것입니다.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막4:20). 내 모든 소망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잔뜩 사짊어지고 온 기도의 제목들을 내려놓습니다. 다 아신다고 했으니까 그 말씀 의지하고 내려놓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고 했으니까 놔두고 옵니다.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했으니까 믿고, 내 마음에 빈자리를 만들고 옵니다. '하나님 말씀하시옵소서. 내 마음 속 내 인생 속 이 세상 속에 하나님의 공의롭고 자비로운 나라가 세워지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할지 말씀해주옵소서'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6:8)처럼, '주님 내가 무엇을 행하여야 하리이까' 하며 예배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축복이 있습니까? 특전이 하나 더 있습니다. 겨자씨 한 알과 같은 축복이 있습니다.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막4:31-32) 공중의 새들, 곧 정처없이 떠돌며 다니는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자라는 것입니다.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땅 위의 다른 모든 씨도 땅에 심겨서 자랍니다. 그것들이 모두 자기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자기 열매로 끝나지 않고 많은 사람이 깃들일 만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출근시간에 지하철을 간신히 타듯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교회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와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받아 본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교회는 누구든지 와서 쉼을 얻고, 누구든지 와서 봉사할 수 있으며, 누구든지 와서 내 집처럼 지내는 곳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비결은 우리 자신이 다른 이들이 깃들일 만한 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소용대로 내게 필요한 열매만 거두는 것이 아닙니다. 내 열매는 그대로 거두어질 것이지만, 다른 사람이 쉴만한 공간, 다른 사람을 위해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내게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말씀을 배우는 곳에 있기를 원하십시오. 2014년에 무슨 계획을 세우시렵니까. 말씀을 배우고 말씀대로 살며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헌신하십시오.

  가우디는 현대 건축의 아버지라고 부를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한다는 소명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인생의 말년에 가우디는 건축을 제외한 일체의 세상 것을 멀리하고 수도자처럼 살았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쇠약한 사람이며, 손상된 인간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건축가로서 명성과 열정이 대단했지만, 그것을 신앙적으로 승화시켜서 '사그라다 파밀리아'라는 교회를 건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수난과 영광을 나타내는 세 개의 출입문(파사드)가 있는데 이 가운데 탄생을 나타내는 파사드의 중앙 문은 사랑, 오른쪽은 믿음, 왼쪽은 소망의 문입니다. 이 교회는 그의 사후에 오늘날까지도 계속 지어지고 있습니다. 모든 재능과 명성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작품을 빚어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등불이 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평안을 얻고 하나님을 알도록 하는 깃들일만한 나무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30배, 60배, 100배로 하나님 나라의 결실을 맺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고 심는 일에 열심을 다할 수 있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자며 깨며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의 등불이 될 것입니다. 일단 마음을 새롭게 하며 돌이켜 하나님의 열매를 맺고자 하면 당시에는 겨자씨 만큼 작은 씨에 불과할 테지만, 그 나중은 많은 사람을 깨우치는 큰 나무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깃장 놓을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삶을 삼가하여 하나님께 헤아림을 받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원합니다.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12월 8일> 잠잠하라 고요하라(막4:35-41) 이정식 2013.12.10 0 97
다음글 <11월 17일> 주인을 만난 사람(막3:20-35) 이정식 2013.11.18 0 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