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8일> 가둘 수 없는 권능(행 4:1-12) | 이정식 | 2012-07-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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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때때로 우리를 속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속절없이 그 일에 붙잡히고 얽매이게 됩니다. 어떤 일은 잠깐 우리 마음을 빼앗을 뿐이지만, 어떤 일은 오랫동안 우리를 가두어 놓습니다. 해결되지 않은 채 오랜 시간이 흐르게 되면 사람들은 자기가 갇혀있는지 아닌지도 모릅니다. '이런 게 삶인가' 하며 살게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삶과 인생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풍성하고 은혜롭고 위대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무엇으로도, 어떤 인생의 문제로도 가둘 수 없는 권능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능력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일어나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병이 우리를 가둘 수 없습니다. 지난 주에 보았던 것처럼 날 때부터 걷지 못했던 사람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걷게 되었습니다. 이 일이 얼마나 믿기지 않은 일이었던지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도 스스로 놀라고 있습니다.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행4:22) 왜냐하면 누가는 의사였기 때문입니다. 의사인 자기가 생각해도 의학적으로 불가능한 일, 불치의 병, 원인도 없는 병, 따라서 치료법도 없는 병이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했고, 이후 40년이 넘도록 단 한 번도 걷는 것을 경험해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이나 그 사람을 아는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생각하기를 '그는 걷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는 앉은뱅이다'. 그가 만약 걸어다닌다면 태양이 서쪽에서 뜨는 일이 될 것이며, 물이 아래서 위로 흐르는 일이 될 것이며, 내 손에 장을 지지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는 이 일을 행하셨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 주 예수의 이름을 선포할 때, 주 예수의 이름을 믿을 때 이런 은혜를 주셨습니다. 평생 성전 문에 엎드려 구걸만 하면서 살던 사람이 그 즉시 발목에 힘이 들어가 걷고 뛰며 능력의 주를 찬양하였습니다. 주께서 뜻하시면 언제든지 그렇습니다.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행4:14). 그것이 몸의 병이든지 마음의 병이든지 주 예수 안에서는 놓임을 받습니다. 가둘 수 없는 능력이 주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세상 지혜와 권세가 우리를 가둘 수 없습니다. 주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둘 수 없습니다. 사도들을 가둘 수 없습니다. "백성들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행4:2-3). 하지만 그들이 나타낸 하나님의 능력과 주 예수의 지혜를 들을 때 가두어둘 수 없었습니다. 이전의 삶이나 준비된 스펙으로도 가둘 수 없는 변화가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정규 교육과정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의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의 어떠함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베드로와 요한의 친구는 어부들이었습니다. 또한 가장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일은 고기 잡는 일이었습니다.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예배하지만, 예배를 인도하는 제사장들이나 성전 맡은 사람이나 사두개인들이나 관리들이나 서기관들이나 대제사장들에게 한 마디 말을 붙일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산헤드린 국회의원들과 지도급 인사들이 자기 활동을 알리기 위해서 현장을 방문하여 악수를 청하고 사진을 찍을 때 악수만 하고 지나갈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라 정치 잘 좀 부탁하고 우리 잘 살 수 있도록 해주세요"하고 부탁하는 외에 대면하여 이야기할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보기를 "본래 학문없는 범인으로 알았다"(행4:13)고 했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냥 보통사람들, 어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위압적인 태도로 묻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행4:7) 그러나, 예수 믿고 성령충만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고, 도리어 산헤드린 지도자들이 감당할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말을 받아 넘기는 모습을 보십시오.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행4:9) 국회의원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온 나라 사람들을 상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가르치고 있습니다. '알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담대함, 이런 지식, 이런 구변이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요? 사회 지도자들은 어쩔 수 없이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행4:15)고 쫓아내는 것이 저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행4:18)며 경고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성령충만을 받은 사도들은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사도들의 말을 듣던 그들은 더 이상 비난할 말이 없었습니다. 고침받은 사람이 눈 앞에 보이니 부인할 수도 없었습니다. 필리핀 성서침례교회 목사님이신 아반떼 목사님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3천명 가량 되는 성도들을 목회하였습니다. 그가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겸직을 허용치 않는 법 때문에 목사직을 물려주고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국정을 돌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사역 중에 중요한 것은 국회의원들에게 성경을 나누어주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나랏일을 돌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아는 일은 더욱 소중합니다. 셋째, 구원받을 사람을 가둘 수 없습니다. "말씀을 들을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행4:4) 예수님의 약속하신 성령께서 임하신 후에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수만 명이 모인 성전에서 3천명이 구원받았습니다. 그 며칠 후 날 때부터 40여 년 동안 걷지 못하던 사람이 걷게 된 것을 보고, 그것을 증거로 하여 예수를 전하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5천 명의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더 많은 사람이 말씀을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이 똑같이 병 나은 사람을 보았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똑같이 그가 사도 베드로 옆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똑같이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구원받을 사람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비록 이날에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아 "믿는 자가 많으니"(행4:4)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모든 사람이 믿었다고 말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씀을 받는 사람은 구원받습니다. 믿음으로 말씀을 받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믿을 때 믿음이 생깁니다. 여러분, 날 때부터 병이 있던 사람은 그 병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그를 바라보고 있던 이 많은 사람들은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을까요? 그들의 병은 무슨 병이었습니까? 그들의 병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병이었습니다. 환경에 끌려 살고 운명에 끌려 사는 병이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나에게 왜 이런 일이? 내가 뭘 잘못했다고'라고만 생각합니다. 심는대로 거둔다는 것만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심어서 거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주시는 것입니다. 받기만 하면 내 것이 되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구원을 선물로 받으면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에게 왜 이런 은혜를, 내가 뭘 잘했다고'.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 이제 다시 베드로의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병에서 해방받고 세상 권세와 지식에서 자유케 되고 구원을 얻는 이 모든 일이 어디서 비롯되는 것입니까? 병으로도 가두어지지 않고, 세상 지혜와 권세로도 가두어지지 않고 구원받을 사람이면 누구나 구원을 얻게 되는 이 모든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죽음조차 가둘 수 없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설교는 무엇이었는가 하면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행4:2)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행4:8) 말한 지혜는 무엇이었는가 하면,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행4:10)이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예수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세상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셈입니다. 세상은 정반대의 선택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아들 예수를 그리스도 구원자로 세우셨습니다. 하지만 세상 지혜는 예수를 죄인 취급하였습니다. 세상 권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 가두고 경고하고 내쫓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권세는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더욱 담대하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4:31). 그러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경고를 들었을 때 베드로와 요한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을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19-20).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을 하나님은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다. 병원에서는 의사말을 듣는 것이 옳다. 국회에서는 국회의원의 말을 듣는 것이 옳다. 성전에서는 제사장의 말을 듣는 것이 옳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더욱 옳지 않느냐. 다시 시계를 거꾸로 돌리라는 말이냐. 40세 된 이 걷지 못하는 사람이 영원히 걷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그런 세상을 바란다는 말이냐. 그저 운명이겠거니 하고 사는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란 말이냐 '하나님은 없다'하는 어리석은 시절로 돌아가란 말이냐. 삶이 결박하는 대로 인생이 이끌어가는 대로 허덕이며 살다가 생을 마치라는 말이냐. 늘 벗어나려 하지만 날마다 사로잡히게 되는 그런 세상이 좋단 말이냐. 세상 만물의 원리는 궁구하여 알면서 그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도무지 알아보지 못하는 그런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란 말이냐. 싫다! 나는 싫다! 그러니 듣고 믿으라.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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