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일어나 걸으라(행 3장) | 이정식 | 2012-07-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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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기적입니다. 창조하신 모든 만물을 운영하시는 것도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모든 일은 기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에게 기적은 하나님의 일상이라고. 기적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입니다. 100년만에 찾아온 가뭄으로 한반도가 몸살을 앓았습니다. 산정호수가 말라 호수바닥이 쩍쩍 갈라진 모습이 보도되었습니다. 강 상류가 메말라 강바닥을 드러낸 모습이 추상화처럼 찍혔습니다. 나뭇잎도 힘없이 시들시들해지는 바람에 가로수에 긴급 물주머니를 달아야 했습니다. 심어놓은 작물마다 군데군데 말라 죽은 것들이 생겼습니다. 비가 올 것같은 바람이 불고 금방이라도 쏟아부을 것같은 소나기 구름이 몰려왔어도 속절없이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는 맑은 하늘을 보면서 '왜 맑아야 하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평소에는 기다리지 않던 비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제부터 비가 쏟아졌습니다.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오지 않을 것같던 비가 휘몰아칩니다. 마른 하늘에 타들어가던 마음이 시원하게 쏟아지는 비에 흠뻑 적져지는 감사가 있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이 날마다 미문(아름다운 문)에 앉아서 구걸하였습니다. 스스로는 다리를 움직일 수 없으니까 돕는 사람들이 그를 메고 와서 그 자리에 앉혀 놓았습니다. 매일 성전 문에 앉혀놓으면 거기서 종일 앉았다가 구걸하고 돈을 받아 다시 돌아가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받은 돈으로 먹고사는 것입니다. 걷지 못할 뿐 다른 건 다 보통 사람과 같습니다.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자비가 있어 자기를 돕는 사람들도 보고 그냥 지나가는 사람도 봅니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니까 언젠가는 '나도 한 번 걸어봤으면' 하고 생각했던 적도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떠올릴수록 그는 더욱 괴로웠을 것입니다. 안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앉은뱅이같은 자기의 다리가 너무도 분명하게 쏘아붙였을 것입니다. 잠언 13장 12절 말씀에 "소망이 더디 이루게 되면 마음을 상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더디'만이 아니라 '본래'(행3:10) 그랬습니다.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날때부터 그랬습니다. 한의원 원장님이 말했습니다.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진단을 하다보면 환자들이 불쑥불쑥 하는 말이 '원래 감기를 달고 살아요, 원래 머리가 아파요, 원래 배가 아파요'하고 말한답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원장님이 생각하는 것이 뭔가 하면 '원래 그런 건 없어요' 하는 것입니다. 병에는 원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픈 데에는 다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이유와 원인을 치료하고 처방하면 나을 수 있는 것입니다. 대개의 병은 생긴 시간만큼 지나야 낫고 오래된 병은 그만큼 치료가 오래 걸리기 마련입니다. 우리들도 나름대로 의사여서 '내 병은 내가 알아' 하기도 하고 '평생 끌어안고 갈 병'이야 합니다. 그런데 '날 때부터' 그랬다면 도저히 치료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기적이 없이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기적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도전 골든벨>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는 이런 도전을 합니다. "문제가 남느냐 내가 남느냐" 마음이 상한 자의 소망은 날개를 꺾이운 소망입니다. 그가 앉아서 바라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뭐 좀 얻을까"하는 소망입니다(행3:5) 그 사람이 뭘 바랬겠습니까? 돈입니다. 하지만 그가 태어나서 처음부터 이런 소망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그가 어떤 상태인지를 자각하기 전에 아이였을 적에 그의 소망은 모든 사람의 소망과 같습니다. 영원한 것을 사모하였습니다. 기쁨을 소망하였습니다. 자유를 꿈꾸었습니다. 행복을 쫓았습니다. 풍성한 삶을 갈급했습니다. 이런 것이 있을 때 우리는 춤을 출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받을 때 우리는 기뻐 뛰놀게 됩니다. 이런 은혜 속에 있을 때 우리는 감사하게 됩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는데, '나는 걷지 못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생각이 습관이 되어 '나는 구걸하며 살아야 한다'가 되었습니다. 날마다 그 자리에 올라가고 내려오고를 반복했습니다. 사람들도 그가 구걸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내 인생은 이럴 뿐이다' 하며 한 푼 두 푼 떨어지는 동전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의 도움은 그가 구걸하며 살도록 도운 것입니다. 긍휼히 여긴 사람들이 도울 수 있는 것은 구걸하며 살도록 도운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단번에 그 사람의 생각과 습관과 주변 사람들의 생각을 꺾어 놓았습니다. "우리를 보라" 다른 사람들을 보지 말고 우리를 보라. 너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우리를 보라. 예수 없는 사람들의 말을 듣지 말고 예수 믿는 우리 말을 들으라. 제풀에 꺾인 너를 보지 말고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사는 우리를 주목하라. 살아온 내력과 이력에 눌려 살지 말고 하나님께 모든 염려와 근심을 맡겨버리는 우리를 보라. 그랬더니 이 사람이 바라본 것은 여전히 '얼마 줄까' 였습니다. 동전을 줄까 은전을 줄까 금전을 줄까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동전을 주면 그냥 그랬겠죠, 은전을 주면 한 번 쳐다 봤겠지요, 금전을 주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두 번 세 번 머리를 조아렸겠죠, 걷지 못하는 다리를 끌어안은 채, 나는 원래 이래 라는 생각에 눌린 채 말입니다. 그때 베드로는 선포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3:6) 베드로는 그 사람의 참된 소망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은과 금은 내게 없다. 그런 것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그러나 당신에게 참으로 있어야 할 것이 있는데 예수 믿고 일어나 걷는 것이다. 어떻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쓰지 않은 다리라면 우선 한 참 저리고 덜덜 떨리고 했을텐데도,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었습니다. 예수 믿은 믿음의 기적입니다. "뛰어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행3:8) 이 사람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허락하신 삶입니다. 신이 나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찬송도 합니다. 문제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는데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 사람은 믿을 시간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믿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예수 믿을 소망도 없었습니다. 언제 믿음이 들어갔는가 하면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라고 선포할 때 그때 들어갔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언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까? 이 말씀을 믿고 마음을 받는 순간에 됩니다. 그 이름에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그 이름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신앙생활하면서 우리의 인격이나 일처리나 믿음으로 하는 행위는 시간을 두고 성장하는 것이지만, 믿음은 처음 받을 때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처음부터 예수 믿는 믿음입니다. 단번에 일어나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을 일컫기를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행3:16)이라고 한 것입니다. 내가 믿은 믿음이 아닙니다. 세월을 따라 내게 쌓이고 축적된 믿음이 아니라, 예수께로부터 내게 부어주신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죽음을 이기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사렛에서 태어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위해 이 땅 나사렛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질고를 지기 위해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시고 일상생활을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고단하셔서 주무시기도 했고, 애통하며 울기도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사 죄의 모든 저주를 담당하시고 피흘리셔서 깨끗케 하시고, 산 너머 산같이 몰려오는 문제 풀다가 끝날 인생들을 위해 모든 문제의 근원되는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그는 온전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완전히 낫게"(행3:16b)하십니다. 그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만물을 회복하"(행3:21)십니다. 모세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았고 사무엘 선지자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켰으며 아브라함도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했습니다(행3:22, 행3:24, 행3:35). 하나님이신 그 예수, 친히 이땅에 오신 예수 그가 우리를 온전케 하십니다. 믿을 준비가 전혀 안 된 우리에게 선포할 때 믿음을 주십니다. 입으로 고백할 때 우리 안에 계십니다. 마음으로 원할 때 예수께서 단번에 믿음을 주십니다. 들을 때 믿음을 주십니다. 지금 들을 때 믿음이 들어갑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은 언제부터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생겼는가 하면 그가 꿈을 꾸었을 때부터입니다. 요셉도 그 꿈을 붙잡았고, 요셉의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 야곱도 요셉의 꿈을 마음 속에 새겨두고 있었습니다(창37:11). 그런 후의 요셉은 어려움을 계속 만났습니다. 형들의 질투로 웅덩이에 빠뜨려졌습니다. 그 다음에 형들은 웅덩이에서 꺼내어 미디안 상인들에게 종으로 팔아버렸습니다. 미디안 상인들은 이집트로 가서 보디발 장군에게 넘겼습니다. 성실하게 일한 요셉이 보디발 장군의 아내에게 모함을 받아 감옥으로 넘어갔습니다. 감옥에서 두 관원의 꿈을 해석해 주었어도 2년 동안 감감 무소식이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파라오의 꿈을 해석하고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요셉에게서 배울 수 있는 믿음은 처음 받은 꿈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처음 받은 믿음이 곤란한 중에도 여전하였습니다. 요셉의 현실은 요셉에게 계속 말했을 것입니다. '넌 잘 풀리지 않는다''네 꿈은 꿈일 뿐이다''네가 어쩔 수 없는 운명이 네 앞에 서 있다' 보라! 그렇지 않은가! 시원하게 내 삶이 형통한 적이 있었더냐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에 품고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어려움이 없는 것 아니고 그림자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더욱 귀중한 것은 현실의 분명한 속삭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림자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림자가 우리 몸을 주장하지 못합니다. 우리 몸이 다니는데로 그림자는 끌려다닐 뿐입니다. 우리 삶에 어두운 그림자가 있습니다. 왜 없겠습니까? 누구라고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림자일 뿐입니다. 아무 힘도 능도 없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해가 높이 뜨면 짧아지고, 해가 져가면 길어지고 저녁이 되면 사라지고 새벽에도 나타나지 못하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해가 뜨면 예수, 해가 져도 예수, 저녁이 되어도 예수, 새벽녘에도 예수, 그 살아계신 사랑의 하나님이 항상 여러분과 저에게 계십니다. 예수께로부터 오는 이 믿음 가진 사람은 형통할 때나 곤란할 때나 기도 생활, 말씀 생활, 전도 생활, 교제 생활을 놓치지 않습니다. 눈물이 있고 없고 그림자가 길고 짧고의 차이는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삶 안에 형통합니다. 만물의 회복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을 때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죄짐에서 해방하시고 모든 눌린 것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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